4월 21일 (수)
레바논에서의 첫 아침이자 격리 1일차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유엔은 레바논에 입국하는 모든 유엔군에 대하여 2주간 격리를 지시했다. 레바논에 들어오는 새로운 부대는 격리를 2주간 해야하고, 그 2주간은 기존에 있던 부대에서 임무를 진행한다. 새로 들어온 부대의 격리가 해제되면, 그제서야 그동안 임무 수행해오던 부대는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 또한 이 2주간은 기존의 부대와 새로운 부대의 접촉도 엄금하기 때문에 하나의 주둔지를 절반으로 나누어 지냈다. 두 개의 부대가 하나의 주둔지에서 지내야하는, 듣기만 해도 비좁은 14일이 시작된 것이다.
컨테이너 하나에 세 명이 잤고, 대위 한 명, 상사 한 명 그리고 바로 나! 중위 한 명이었다. 막내인 내가 당연히 바닥에 매트리스를 깔고 잤다. 한국에서 레바논까지 긴 여정에 피곤하였는지 지난밤 바로 골아떨여졌다. 눈을 뜨니 새벽 4시였다. 한국과 시차가 6시간 정도 있으니까 한국으로 치면 오전 10시인 것이다.
물론 오늘은 레바논에서의 첫날이기는 하지만, 일과는 정상적으로 진행할 것이고 또 전임자로부터 인수인계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다시 억지로 잠을 청했다. 오분 정도 지났을까 밖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리 개념이 없어도 그렇지 새벽 네시에 핸드폰으로 노래를 켜다니,
잠이 안와서 노래를 틀고 운동을 하는 것일까, 샤워를 하러 가는 것일까. 침대에 뒤척거리며 계속해서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도 끊기지 않기에 나가서 한마디 쏘아붙여야겠다 생각하고 밖으로 나왔다. 격양되었지만, 아직 자고 있는 룸메이트 두 분을 깨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컨테이너의 문을 조심스럽게 당겼다
노래는 아랍어였고, 멀리서 들리고 있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노랫말에 집중했다. 노래는 주둔지 밖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모스크의 기도소리였다. 어쩔 때는 구슬픈 것 같고, 어쩔 때는 흥겨운 것 같은 남자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가락을 타고 들려왔다. 고요한 새벽, 아직 동도 트지 않았기에 멀리서 있는 소리도 잘 들렸다.
지금이 라마단 기간이라는 것을 어디서 주워들었던 것이 생각났다.
기상시간인 아침 6시간까지는 대략 두 시간. 잠은 이미 깨었고, 서서히 해가 뜨고 있기에 주변이나 둘러보아야겠다 마음 먹었다.
중동이라도 새벽에는 한국의 초가을 정도로 쌀쌀했다. 방으로 돌아와 목이 늘어난 회색 폴로 헨리넥 스웨터를 입고 파란색 파타고니아 반바지에 보급으로 받은 초록 슬리퍼를 신었다. 재정비를 마친 후 다시 우리 생활관 컨테이너의 문을 당겼다.
밖으로 나와 보니 계단을 타고 올라가서 주위를 볼 수 있게끔 높은 곳에 만들어 놓은 휴게실 같은 것이 있었다. 흰색 양철 지붕에 야외에서 흔히 볼 수있는 6인용 나무 테이블과 주위로 플라스틱 의자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좀 더 높은 곳으로 가서 주위를 둘러보아야겠다. ‘
사다리를 타고 비교적 높은 휴게소로 올라가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난밤 레바논에 도착하였을 때는 미처 확인하지 못한, 숨이 탁 트이는 풍경이었다. 억세 보이는 파란 풀들과 바위 산들이 어우러져 큰 언덕을 이루고 있었다. 마치 어릴 적 교회에서 오래되어 보이는, 큰 그림에서 예수님이 어린 양을 들고 있는 배경을 떠올린다면 정확하다.
이제 점심 11시쯤 된 한국에 나의 안위와 더불어 이 그림 같은 배경을 공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카오톡으로 엄마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어~~ 아들 잘 도착했니?”
가게의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다가 나의 전화를 받고 웃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화면 가득히 엄마의 미소가 찼다.
“어 엄마. 여기 풍경이 너무 멋있네~.”
아직 해는 완벽하게 뜨지 않았지만, 하늘이 점점 청색으로 밝아졌다.
통화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 다시 침대에 누웠다. 다시 피로감이 몰려왔다. 30분 간 눈만 감고 있으리라 마음 먹었다. 잠깐 눈만 감았다는 생각을 하였을 때 기상 나팔이 들려왔다. 몰려오는 피로감을 극복하고자 뭐라도 씹어야겠다는 생각에 아침을 먹으러 식당으로 갔다. 레바논에서의 첫 아침식사였다. 아침은 한식과 빵식 두 종류가 준비 되었다. 모두들 처음보는 중동의 유제품에 큰 관심을 보였다. 중동의 우유는 서울우유보다는 파스퇴르 우유의 맛이 났다. 깔끔하기 보다는 지방이 많아 고소한 느낌. 치즈향이 강해서 호불호가 나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아침까지 먹고는 또 다른 컨테이너로 가서 샤워를 하고, 옷을 입었다. 화장실도, 샤워장도 심지어 사무실도 모두 컨테이너로 만들어져 있었다.
격리지역의 컨테이너 사무실로 출근해서는 아직 격리중이기 때문에 같은 주둔지에 있어도 만날 수 없는 기존 부대의 전임자와 통화하며 현지 민군업무를 인수인계 받았다.
민군 업무의 경우 단순히 기존 부대가 진행했던 사업뿐만 아니라, 그 전, 또 그 전 부대가 진행했던 사업이나 업무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 일관성 있는 사업 추진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전에 강조했던 것과 같이 다시 친선교류가 한국군이 레바논에 지내면서 윤활유로서의 역할을 얼마나 톡톡히 수행하였는지 경험담을 들었다.
약 한 시간에 걸친 통화에서 친선교류의 중요성을 들은 다음에는 만나야할 대상들에 대한 인수인계가 이루어졌다. 협력해야 할 단체, 만나야 할 사람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마을의 시장단, 레바논 군 지휘부, 레바논 군 정보기관. 이슬람 종교 지도자인 이맘, 인근의 대학교인 카드무스 대학교, 마을 내의 장애인 학교, 레바논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관료직 까이마깜까지. 그렇다고 그냥 줄 세워서 한 명씩 순서대로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들을 만나는 순서도 중요하다. 한국군과 협력관계에 있는 것은 이들의 정치적 입지에도 영향을 준다. 어느 마을 시장단이 어느 마을 시장단보다 먼저 만났다더라 라고 하는 것도 우리의 입장에서는 별 것 아니지만, 현지 시장단의 입장에서는 곧 한국군과의 친분을 나타내는 척도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고, 이는 곧 한국군의 지원과도 연결될 수 있다고 현지에서는 판단할 수도 있기 때문에 예민한 문제이다.
티르 시 내의 5개 마을 각 마을의 시장단을 만나는 것보다는 티르 시의 중앙직 공무원인 까이마깜이 의전서열이 더 높은 것을 인지하고 친선교류 계획을 짜야 하며, 김영미 PD님은 종교 지도자인 이맘과 좋은 관계를 맺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군인인 우리의 특성을 고려하면 유사시 우리를 지원하고 함께 임무수행하는 레바논 군의 우선순위는 그 누구와 비교해도 뒤쳐지지 않았다.
또 우리의 안을 구성하고 계획하여 생각대로 편성할 수도 없었다. 뭐 상대방도 일정이 있을거 아니냐.
갑자기 부담감이 확 생겼다. 무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엄두가 안났다.
이어서는 다른 여러 전임자들과 통화했다. 업무 이야기는 적당히 하고 다른 궁금한 것들을 물어봤다. 취미 생활은 어떤 걸 하는걸 추천하는지, 태닝을 할 만한 좋은 장소는 있는지, 뭘 가장 맛있게 먹었는지 등등.
우리가 오고 격리가 해제되어야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며 모두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통해 슬기로운 파병생활 팁을 전수했다.
무엇보다 인간관계에 대한 조언을 많이 들었다. 이전 파병전 교육때 들었던 심리학 교수님이 강연한 스트레스 강의에서 나오는 내용들과 놀랍도록 일치했다. 나는 그러지 않아야겠다 다시 한번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