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서 읽기의 힘겨운 로망, 셰익스피어
<베니스의 상인>은 너무 유명하여 읽지 않았더라도 대개 줄거리 정도는 대략 알고 있어요. 이 작품은 본래 연극 상연을 위해 쓰여진 희곡입니다. 소위 스포 당한 상태에서 읽어도 재미를 잃지 않는 장르에요. 희곡은 소설처럼 풍부한 묘사가 없기 때문에 상상력으로 채워야 하는 빈 공간이 많아요. 그 공간을 어느 정도 채운 상태에서 읽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미리 내용을 알아보거나 관련 영상 등을 본 상태에서 읽기 시작하는 거에요.
사실 시중에 나와 있는 <베니스의 상인> 은 대부분 소설 형태를 띠고 있어요. 아무래도 일반적으로 희곡이라는 장르에 익숙하지는 않기 때문이겠지요? 산문 형식으로 각색된 책이라 할지라도 원전이 희곡이므로 보통 책 앞부분에 등장인물 목록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책을 읽기 전에 등장인물의 이름과 소개말을 잘 살펴보고 인물들 간의 관계를 한번 머릿속에 그려 보세요. 이 책의 내용을 아는 사람들도 ‘베니스의 상인’을 샤일록이라고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워낙 작품 안에서 샤일록의 존재감이 두드러지기 때문이겠지요? 베니스의 상인은 그에게 돈을 빌리는 안토니오입니다.
현대 영어로 옮긴 책이라 해도 희곡 원전을 원서로 읽는 것은 어렵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소설과 달리 상황이나 인물에 대한 묘사 없이 오직 대사만으로 상황 파악을 해야 하기 때문이에요. 이럴 경우 우리말로 된 희곡 원전을 먼저 읽고 소설로 각색하거나 축약된 영어책을 읽는 것도 방법입니다. 내용을 충분히 이해한 상태에서 산문으로 각색한 영어책은 쉽게 읽을 수 있어요. 그리고 아이는 희곡과 소설의 차이를 직접적으로 체감하게 됩니다.
희곡을 읽을 때는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읽는 것이 좋다고 전문가들은 공통적으로 이야기합니다. 희곡은 장과 막으로 구분되고 그럴 때마다 장소와 시간이 바뀌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띄엄띄엄 읽다 보면 앞의 내용이 잘 기억 나지 않거든요.
<베니스의 상인>의 원전에 배어있는 유대인에 대한 증오의 감정은 굉장히 강렬하고 당혹스럽기까지 합니다. 작품만 놓고 보면 셰익스피어는 극심한 인종차별주의자였던 것이 아닌지 의심마저 들 수 있어요. 모든 문학 작품에는 두 가지 맥락 즉 컨텍스트가 존재하는데요. 작품이 쓰여진 당시의 컨텍스트와 현재 책을 읽는 독자가 살고 있는 컨텍스트입니다. 이 둘을 구분하고 차이를 인식한다면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고 작품을 균형 있게 이해할 수 있어요. <베니스의 상인>이 쓰여졌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잠시 살펴볼까요?
셰익스피어가 활동하던 엘리자베스 시대는 반유대주의 감정이 팽배하던 시기였어요. 유대인들에 대한 반감과 배척은 모든 시기 전 유럽에 걸쳐 광범위하게 존재하긴 했지만요. 사실 평생 영국에서만 살았던 셰익스피어는 생전에 유대인을 만난 적도 없었습니다. 이미 300여 년 전에 유대인 공동체는 영국에서 완전히 추방당했거든요. 그럼에도 유대인은 사람들의 일상적 대화에서 여전히 경멸과 조소의 대상이었어요.
게다가 <베니스의 상인>이 공연되기 불과 얼마 전에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주치의였던 로페스가 여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처형당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 여왕은 온 국민의 사랑을 받는 존재였고 로페스는 개종한 포르투갈 출신의 유대인이었어요. 그를 향한 국민의 분노는 극렬했고 처형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결백을 주장하는 로페스의 마지막 발언에 대해 군중은 엄청난 야유와 잔인한 폭소를 보냈다고 해요.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이 군중 속에 있었을까?” 셰익스피어 연구자로서 세계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는 스티븐 그린블랫 하버드대 교수는 그의 저서 <세계를 향한 의지>에서 독자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물론 그 여부를 알려주는 기록이 남아있지는 않아요. 그러나 셰익스피어가 원전으로 삼았던 이야기에는 나오지도 않는 샤일록의 개종 판결로 이야기를 끝맺은 것은 실제 역사 속에 있었던 처형이나 강제 추방과 같은 극단적인 결말을 피하고자 했던 시도일 것이라고 그린블랫은 해석합니다. 사실 <베니스의 상인>을 주의 깊게 읽다 보면 샤일록은 그저 사악한 악당으로만 그려지지 않아요.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온갖 차별과 부당한 대우를 받음에도 고통을 호소할 곳 하나 없는 고독한 인물임이 드러나지요. 그의 절규가 담긴 유명한 독백은 아마도 셰익스피어 당시 그 누구도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던 유대인의 내면을 복원해낸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거에요.
작품이 쓰인 상황적 맥락에 대한 배경지식 없이 이 책을 읽는다면 단순히 친구를 도우려고 했던 착한 안토니오와 무자비한 악당 샤일록의 대결 구도만을 기억하고 끝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이해한 상태에서 작품을 읽는다면 샤일록을 그저 비난받아 마땅한 악인으로 쉽게 치부할 수는 없게 되지요. 단순한 선악의 대결, 단편적인 줄거리 이해 수준을 넘어 인물의 내면적 갈등이나 인물 간의 관계를 보다 심층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 작품은 언뜻 보면 권선징악이 이루어지며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되는 듯 보입니다. 그래서 별생각 없이 책장을 덮고 끝낼 수 있어요. 하지만 이야기 안에는 그리 어렵지 않은, 그러나 생각해볼 만한 중요한 주제들이 들어있습니다.
먼저 약속에 대해 살펴볼 수 있어요. 이 작품에는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 간에 맺어지는 몇 가지 약속이 등장합니다. 먼저 안토니오와 샤일록 간의 계약이 있지요. 이 계약은 비록 잔인하고 불합리해보이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지만 상호 동의하에 성립되었기 때문에 베니스의 법에 의해 그 정당성과 실효성을 보장받습니다. 법정에서 샤일록은 만약 계약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 베니스의 헌법과 시민권이 무의미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충분히 설득력있는 주장입니다. 당시 베니스는 국제 무역과 금융의 중심지였는데요. 개인 간의 계약 이행이 철저히 보장되지 않는다면 상업을 기반으로 번영한 도시의 근간 자체가 흔들리게 되겠지요. 이 책의 출전 <일 페코로네>에도 “베니스는 법률이 시행되는 곳이었으며, 유대인은 공적으로 법률을 적용받을 수 있는 충분한 권리가 있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고 해요. 그렇기에 재판을 맡은 베니스의 공작 역시 샤일록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호소할 뿐 계약을 무효화할 수는 없었습니다. 물론 안토니오도 자신이 채무 이행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저항하지 않고 계약 내용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이고요. 벨서자 박사로 변장한 포샤 역시 이 계약의 정당성을 우선 인정하는 것으로 발언을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상황이 실은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라는 모두의 동의가 있었기에 발생했다는 사실을 짚어볼 만한 해요. 약속이라는 것의 의미가 본질적으로 갖는 엄중함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지요. 약속은 신뢰가 바탕이 될 때 이루어지는 것이고 신뢰는 모든 인간관계의 기초가 되니까요. 차를 운전하거나 모르는 사람과 중고 거래하는 경우만 생각해도 약속의 실질적인 의미가 확 와닿아요.
한편으로는 “약속은 모든 상황에서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것일까?”, “불가피하게 약속을 지키지 못할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등의 질문을 던져볼 수 있어요. 계약서에 써 있다는 이유로 채무자의 목숨을 빼앗는 것을 그저 정의로운 법 집행으로 볼 수 있는지 따져보는 것이지요. 법치는 민주주의 사회를 지탱하는 중요한 가치이지만 맹점과 한계도 있을 수 있으며, 이런 문제를 어떻게 접근하면 좋을지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포샤의 반지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어요. 포샤는 바사니오에게 반지를 주면서 이것을 절대로 남에게 주어서는 안 될 것을 맹세하게 합니다. 그러나 바사니오는 안토니오의 생명을 구해준 벨서자 박사에게 반지를 빼어줄 수 밖에 없는 난처한 상황에 처해요. “내가 바사니오라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부득이하게 친구와의 약속을 어겨야 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등의 질문은 우리의 생각의 범위를 넓혀줍니다.
또한 외양과 내면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어요. 겉모습과 본질의 부조화는 셰익스피어가 즐겨 사용한 모티브입니다. 포샤의 아버지는 포샤의 배우자를 선택하는 문제에 관해 유언을 남깁니다. 금, 은, 납으로 된 궤짝 세 개 중에 포샤의 초상화가 들어있는 궤를 선택하는 남자가 포샤와 결혼을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아라곤의 왕자, 모로코의 왕자 등 여러 나라에서 쟁쟁한 구혼자들이 몰려오지만 모두 실패해요. 이들은 금 아니면 은 궤짝을 선택했기 때문이지요. 초상화는 납 궤짝에 들어있었거든요. 행운의 주인공은 바사니오입니다. 그는 세상과는 달리 겉치레에 속지 않겠다며 수수한 납 궤짝을 고르지요.
모로코 왕자가 고른 금 상자 안에는 “반짝인다고 다 금은 아니다”라는 유명한 격언이 쓰여있어요. 세 가지 궤짝 이야기를 통해 셰익스피어가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이겠지요? 물건의 포장을 뜯었을 때 겉모습과 달라서 실망했던 경험, 누군가를 만났을 때 첫인상과는 다른 됨됨이에 놀랐던 경험 등이 떠올라요.
영화 <대부>, <여인의 향기> 등으로 유명한 연기파 배우 알 파치노는 셰익스피어의 열렬한 팬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2014년 영화 <베니스의 상인>에서 샤일록을 연기했던 그는 한 인터뷰에서 “샤일록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이며 셰익스피어적인 캐릭터이다”라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어요. 샤일록이 안토니오에 대한 복수를 천명하는 부분은 다시 봐도 명장면입니다. 샤일록의 유명한 대사, “Has not a Jew eyes?”(유대인은 눈이 없단 말인가?)로 시작하는 이 장면에서 샤일록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그간 받아왔던 모멸감에 대해 맹렬한 분노를 쏟아냅니다. 상대를 완전히 입 다물게 하는 알 파치노의 폭발적인 감정 연기가 일품입니다. 한편 언어를 통해 보이지 않는 인간의 내면 세계를 드러내는 셰익스피어의 천재성에 새삼 감탄하게 되요.
영국의 로얄 셰익스피어 컴퍼니(Royal Shakespeare Company)는 세계에서 가장 유서 깊은 극단입니다. 셰익스피어의 고향이기도 한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에 거점을 두고 세계 곳곳에서 연극과 뮤지컬, 오페라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있어요. 이 극단의 홈페이지에 ‘Shakespeare Learning Zone’ 메뉴에 들어가면 ‘베니스의 상인’을 선택하면 작품의 개요와 플롯, 1~5막까지의 주요 장면, 등장인물의 관계도 등 다양한 자료를 활용할 수 있어요. 과거부터 최근까지 이 작품에 등장했던 배우들의 사진도 올라와 있고요. 또 재미있게 읽은 장면을 선택하면 그 장면에 해당하는 2015년 공연 실황이 담긴 동영상을 대본과 함께 볼 수 있어요. 2시간 가량 되는 전체 공연도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답니다. 배우들이 연기하는 모습을 생생히 볼 수 있고, 음악과 무대 장치, 공연을 관람하고 있는 관객들의 모습까지 살펴볼 수 있어 영화와는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