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독일에서의 결혼생활

나는 왜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었을까

by 빛담

행복할 줄 알았던 독일에서의 결혼 생활은 외롭고 고단했다. 속도위반처럼 치러진 결혼식에는 내 쪽에서는 부모님만 참석했다. 형제들은 비싼 비행기값과 숙박비 때문에 오지 못했다. 뒤셀도르프 한인문화회관에서 열린 결혼식은 회관 개관 이후 처음 열리는 교민 행사였다. 대관 홍보를 겸해 사당패가 흥을 돋웠고, 한 한인 식당에서는 무료 뷔페를 내놓았다. 하지만 결혼식이라기보다는, 그동안 뜸하게 연락하던 교민들이 모여 하루 웃고 떠들다 헤어지는 잔치에 가까웠다.


한국에서 맞춰 간 은반지에 큐빅을 박은 결혼반지, 커플 잠옷, 레이스가 달린 앞치마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꾸며 준비했지만, 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장롱 깊숙이 넣어 둔 채 한 번도 꺼내보지 않았다. 장롱 문을 열 때마다, 설명할 수 없는 둔중한 통증이 가슴 어딘가에서 천천히 번졌다.


결혼 전 직장에 다니던 시절과 달리, 아이를 낳고 키우며 돈을 벌지 못하게 되자 관계의 균형도 깨졌다. 나는 어느새 아내라기보다 밥상을 차리는 사람, 엄마라기보다 아이를 돌보는 사람으로 규정되고 있었다. 결혼을 한 것이지, 대가 없이 일하는 사람이 된 것은 아니라고, 엄마가 된 것이지, 공짜로 아이를 돌보는 존재가 된 것은 아니라고 믿고 싶었지만, 그 믿음은 남편에게 좀처럼 닿지 않았다.


“결혼했으면 그게 네가 할 일 아니야? 도대체 뭘 기대했던 거야?”


그는 정말로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묻곤 했다. 내 기분을 살피던 사람, 사랑을 속삭이던 사람, 잘해 주겠다고 약속하던 남자는 어느 순간 사라졌고,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과 함께 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에 자주 사로잡혔다.


아이를 돌보느라 밥을 못 하면 게으른 여자가 되었고, 밥을 하느라 아이를 제대로 보지 못하면 게으른 엄마가 되었다. 아무리 애써도 나는 늘 부족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되기 싫어서, 누가 붙잡은 것도 아닌데 나는 단 한 시간도 집과 아이를 떠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켠에서는, 아무의 비난도 받지 않고 공원 벤치에 앉아 햇빛과 바람, 새소리와 사람들의 기척을 느끼며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죄책감 없이 혼자 영화관에서 팝콘을 먹으며 영화를 보고,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가족도 친구도 없고, 말조차 통하지 않는 타국에서 아이를 키우며 나는 조금씩 닳아 없어지고 있었다. 하소연할 상대는 남편뿐이었지만, 힘들다고 말해도, 답답해서 미칠 것 같다고 울어도 그는 더 이상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돈 문제는 훨씬 더 불균형했다. 남편은 내가 무엇을 샀는지 영수증을 보여주지 않으면, 다음에는 돈을 주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 말 속에서 나는 점점 더 작은 존재가 되어 가는 듯했다.


어느 날, 큰아이가 몸이 좋지 않았는지 먹은 이유식을 모두 토해냈다. 나는 아이를 안아 달래기보다, 그 음식이 얼마짜리인지부터 떠올리며 아이를 나무라고 있었다. 그 순간, 둔중한 무언가가 머리를 세게 치는 듯 멍해졌다. 돈이 아이를, 그리고 나를 이렇게까지 바꿔 놓아서는 안 된다고 느꼈다. 살아 있고 느끼고 생각하는 사람을, 돈 때문에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나는 나를 점점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관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혼이라는 말을 입에 올린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는 내가 무슨 돈으로 아이를 키울 수 있겠느냐며, 아이들을 청소년청에 맡기겠다고 말했다. 어느새 나는, 돈 없는 엄마는 돈 있는 아빠의 결정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다고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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