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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만냠냠 Mar 15. 2022

임오년 마고숲밭 일기 - 우수

물이 되는 계절, 햇빛을 담는 온실, 새싹을 틔운 모종들

 눈이 비가 되어 내리고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되는 계절이다. 계절이었다고 한다. 지난 2주 동안 비는커녕 눈도 거의 내리지 않았다. 바싹 마른 산과 들엔 불이 번졌고, 우리 집 뒷산도 예외가 아니었다. 산 너머 하늘이 새빨갛게 타올랐다. 동네 친구들 단톡방에서 서로의 안부를 묻는 새 마음이 급해졌다. 뒷산으로 차를 몰았다. 어두컴컴한 산 아래에 도착하니 그제야 실감이 났다.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경광봉을 흔드는 경찰, 굳은 표정으로 줄지어 산을 오르는 수백 명의 산불진화대, 해가 뜨기 전까진 헬기를 띄울 수 없어 그저 방화선을 단단히 구축하는 것 말곤 방법이 없다는 뉴스, 그 와중에 재난문자 한 통 오지 않는 남원시까지. 덜컥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불난 곳에서 집까진 고작 1km. 친구들과 집에 돌아와 짐을 주섬주섬 챙겨 언제든 탈출할 수 있도록 차에 실어놨다. 친구는 가장 먼저 씨앗을 챙겼다.


 말 그대로, 산의 모든 것이 말라비틀어졌다. 웬일로 추운 겨울이었다 싶더니 유례없는 가뭄이 들었다. 지난가을에 뿌린 보리와 마늘 끝이 노랗게 떴다. 눈이 내리질 않았으니 녹아서 물이 된다는 우수에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없다. 그나마 여성해방 마고숲밭은 깊은 계곡에 붙어 있어서 어려움을 덜었다지만, 불안한 마음에 당분간 불을 피워 밥을 해 먹거나 모닥불을 피우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기후위기로 이상기후가 우릴 덮칠 때마다 언제까지 땅과 바람과 햇빛과 비에 기대어 농사 지을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길어도 우리 세대가 마지막이지 않을까. 복잡한 마음으로 모종을 내고, 부엽토를 뿌렸다.

 겨우 70평 남짓한 텃밭농사를 짓는데 번듯한 하우스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그래서 난방이 가장 잘 되는 방에서 모종을 낸다. 우리 집은 실내 온도가 15도다. 일찍 모종을 내기 시작하는 고추나 가지는 대부분 20도 이상이 되어야 싹이 튼다. 남들은 4, 5일이면 싹이 튼다는데, 우리 집은 2주 가까이 걸렸다. 느리다. 느린 탓에 조급한 마음이 하루에 몇 번이고 마음을 휘감는다. 혹시 씨앗이 잘못된 건 아닐까? 내가 파종을 잘못한 건 아닐까? 그럴 때마다 방 온도라도 따뜻하게 맞춰준다고 난방기를 튼다. 옆에서 지켜보던 친구는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 핀잔이다. 알아서 나오지 않겠냐며. 나도 씨앗이 가진 힘과 시간을 믿지만,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기후위기 시대에 농부가 되자며 땅도 갈지 않고 자연스레 농사를 짓겠다면서 호기롭게 말해놓고선, 전기를 펑펑 써가며 난방기를 트는 게 말이 안 된다는 건 나도 안다. 하지만 나 때문에, 내가 온도를 잘 못 맞춰줘서 올해 농사를 망하면 어쩌지?라는 불안, 그리고 내가 좋아라 하는 이 농사를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참 어렵다. 친구와 몇 번을 싸웠다. 그 사이 싹이 텄다.


 새싹이 나올 때 즈음 마당에선 모종을 키울 미니 온실을 만들고 있었다. 가급적이면 나무를 사지 않고 만들고 싶었다. 친환경 목조 건축물이든 뭐든 만들려면 저 멀리 바다 건너에서 아름드리나무를 무자비하게 베어 공장에서 가공을 한 뒤에야 가능하다. 숲밭의 화장실과 부엌을 만들 때도 그래서 마음 한 구석이 괴로웠다. 나는 생태적인 공간을 만들겠다며 지구 반대편 숲을 베었다. 그래서 이번엔 나무를 사지 않고 얻었다. 마을에서 집 짓고 남은 자투리 나무들, 너무 휘어서 쓸 수 없는 나무들을 얻어왔다. 처음엔 그럭저럭 만들만했는데, 가면 갈수록 어려워졌다. 비숙련 작업자가 휘어지고 틀어진 나무를 곧게 펴서 반듯한 무언갈 만든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거의 완성해갈 즈음에야 깨달았다. 갖은 고민 끝에 지붕은 어쩔 수 없이 폴리카보네이트를 샀다. 몇 번의 분노와 좌절을 맛보고서야 완성된 온실은 삐뚤빼뚤 엉망진창이었고, 다 해체하고 다시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였지만 그럴 깜냥도 없는 탓에 잘 쓰고 있다. 그동안 컨테이너 박스에 음식물 쓰레기를 모아 만든 퇴비와 마당에서 키우던 화분, 숲에서 퍼온 부엽토를 잔뜩 깔아주자 그럭저럭 괜찮은 틀밭 겸 온실처럼 보인다. 생긴 게 어찌 되었든 삭막한 시멘트 마당 위에 온실은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다. 나처럼 돈 벌 생각 없고, 자기 땅 없는 이주민에겐 신선한 흙 한 줌이 귀하다. 요즘엔 아침에 눈 뜨면 기온을 확인하고, 해가 온실까지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모종을 온실로 옮기며 하루를 시작한다. 해가 지면 다시 들여놓는다. 어설프게 만들어 구멍이 숭숭 뚫린 탓에 쨍한 한낮의 햇빛에도 온실 내부가 30도 내외로 적절하게 유지된다. 온실에 며칠 뒀다고 허브와 잎채소 새싹이 쑥쑥 올라온다. 올 들어 처음 만나는 초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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