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 ACERE 컨퍼런스에서 다시 묻는 창업 연구의 본질
저는 지금 한여름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호주 시드니에 와 있습니다. 호주의 대표적인 창업학(Entrepreneurship) 컨퍼런스인 ACERE (acereconference.com)에 참석하기 위해서입니다.
2013년 처음 이 컨퍼런스에 참석한 이후 매년 참석하고 있으니, 올해로 벌써 열네 번째 발걸음입니다.
저는 창업가 출신의 연구자입니다. 과거 치열한 현장에 있었기에, 저의 창업 연구의 동기는 "창업 연구를 통해 현장에 필요한 실질적인 안내를 제공하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창업학 논문을 쓰고 발표하면서 문득문득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과연 나는 그 다짐대로 살고 있는가? 나의 연구가 진짜 창업가들에게 닿고 있는가?"
다행인 것은, 상아탑과 현장 사이에서 이런 '중간자의 고민'을 하는 사람이 저 혼자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제가 진심으로 존경하는 Dimo Dimov 교수님과 동료들이 쓴 논문은 저의 이 오랜 고민과 깊게 맞닿아 있습니다. 오늘은 시드니의 밤공기를 빌려, 연구자와 창업가가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이 현실에 대해 통렬한 성찰을 던지는 논문 한 편을 소개해 드리려 합니다: Dimov, Schaefer, and Pistrui (2020).
저자들은 학계를 향해 도발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도대체 창업학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현재의 창업 연구는 안타깝게도 '학자들만의 리그(Scholarly Conversation)'에 갇혀 있는 것 같습니다. 학자들은 동료 학자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글을 쓰고(Talking), 그들끼리만 서로의 글을 읽습니다(Listening). 정작 연구의 대상이자 수혜자가 되어야 할 '창업가(Practitioner)'는 이 대화에서 철저히 소외되어 있습니다. 논문은 이를 '엄밀성(Rigor)과 실용성(Relevance)의 딜레마'라고 지적합니다. 이론적으로 엄밀해질수록, 역설적으로 현장과는 멀어지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자들은 창업학의 관점을 '자연과학(Natural Science)'에서 '디자인 과학(Design Science)'으로 이동시켜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기존의 연구들이 자연과학적 접근을 취하며 과거의 현상을 설명하고 법칙을 발견하려는 '관찰자 시점'에 머물렀다면, 디자인 과학은 다릅니다. 이는 허버트 사이먼(Herbert Simon)의 통찰처럼, 미래의 해결책을 설계하고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내려는 '설계자 시점'을 취합니다. 즉, 창업 연구가 단순히 "현재 어떠한지(What is)"를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앞으로 무엇이 될 수 있는지(What can be)"를 탐구하며 창업가가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도구와 방법론을 만드는 학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행히 이번 ACERE 컨퍼런스 키노트와 토론에서도 디자인 과학 관점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사진).
논문의 제목에 있는 통합된 '우리'의 목소리(Integrative 'We' Voice)는 바로 이 지점에서 등장합니다. 지금까지 학자들은 "나는(I) 창업가들을(They) 이렇게 관찰했다"라는 타자화된 화법을 써왔습니다. 하지만 저자들은 이제 "우리(We)가 함께 어떤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라는 화법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이것은 학자가 상아탑에서 내려와 창업가와 함께 호흡하며 지식을 공동 생산(Co-creation)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학술적 이론이 현장의 문제를 해결하고, 현장의 생생한 경험이 다시 이론을 수정하는 선순환 구조. 저자들은 이것이야말로 창업학이 나아가야 할 미래라고 강조합니다.
이 논문을 읽으며 저 역시 다시금 처음을 돌아보게 됩니다. 혹시 나도 연구를 위한 연구, 논문을 위한 논문을 쓰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고요. 창업은 책상 위에서 일어나는 정적인 현상이 아니라, 거친 파도 위에서 벌어지는 생존의 투쟁입니다. 그렇기에 창업 연구는 그 투쟁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무기를 쥐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곳 시드니에서 열네 번째 컨퍼런스를 보내며 다시 한번 다짐합니다. 저는 현장과 학문, 그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것 같은 이 "중간자의 고민"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이 경계선 위에서, 학문의 언어를 현장의 언어로 번역하고 실무에 기여하는 연구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참고문헌
Dimov, D., Schaefer, R., & Pistrui, J. (2020). Look Who Is Talking … and Who Is Listening: Finding an Integrative “We” Voice in Entrepreneurial Scholarship. Entrepreneurship Theory and Practice, 45(5), 1166–1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