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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수길 Mar 20. 2022

브릭스엄 항구

Brixham Harbour

2017년 6월 4일

 

1685년 잉글랜드의 찰스 2세가 세상을 떠나자 제임스 2세가 즉위하여 가톨릭교도를 고위직에 임명하는가 하면, 1687년 ‘신앙의 자유 선언’을 통해 가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차별을 중단시켰다. 귀족 중심의 국교주의인 보수파는 제임스 2세의 승계를 인정하는 토리당이 되었고, 상공인 중심의 종교적으로 관용적인 진보파는 제임스 2세의 승계를 반대하는 휘그당이 되었다. 다음해 제임스 2세의 아들이 태어나자 가톨릭교도의 왕의 계승을 우려한 프로테스탄스 대귀족 일곱 명이 제임스 2세의 장녀이자 독실한 프로테스탄트인 메리와 찰스 1세의 외손자 네덜란드 총독 오라네 공 빌럼(Willem van Oranje)을 불러들인다. 1688년 이들이 5만 명의 병력으로 브릭스엄(Brixham)에 상륙하자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달아났고, 1689년 이들 부부가 대관식을 거행하는데, 이것을 ‘명예혁명’이라고 한다. 

브릭스엄 항구 언덕에서 바라본 영국해협


브릭스엄은 영국 잉글랜드 남서쪽 데본(Devon) 카운티 토베이(Torbay) 구역의 어촌이자 행정구이다. 1760년 제한적인 역할을 했던 동부 부두(Eastern Quay)가 만들어졌다. 1799년 의회가 브릭스엄의 어시장 건설을 승인했고, 1804년에 완성되었다. 브릭스엄은 엑스터(Exter), 브리스톨(Bristol), 바스(Bath)에는 육로로, 런던(London)에는 포츠머스(Portsmouth)까지는 해로를 거쳐 다시 육로로 수산물을 공급했다. 1804년 두 번째 부두인 뉴키(New Quay)가 만들어졌고, 수산업이 급성장하면서 1843년에는 안전한 외곽 항구(Outer Harbour)를 만들기 위해 방파제가 건축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금이 고갈되면서 계획된 3,000피트 중 1,400피트만이 건설되었고, 1850년대와 1860년대의 극심한 폭풍우로 엄청난 피해를 겪기도 했다. 이때 많은 선박을 잃었고,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1909년 추가로 800피트가 만들어졌다가 중단되었고, 1912년 작업이 재개되어 1차 세계대전에 속도가 붙으면서 1916년 100피트가 추가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낡은 저인망 어선들이 사라지고 모든 어선들이 증기나 디젤 엔진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어선의 수는 감소했지만, 어획 규모와 가치는 늘었다. 1971년 뉴키를 따라 어시장과 사무실을 갖춘 뉴피시키(New Fish Quay)가 만들어졌다. 1989년에는 마리나가 문을 열었다. 매년 5월 초에는 브릭스엄 해적 축제(Brixham Pirate Festival)가 열린다.  

브릭스엄 항구


1850년 무렵 브릭스엄은 잉글랜드에서 가장 큰 어장이었고, 1860년에는 기차로 런던까지 수산물이 우송되었다. 그런데 1890년대 값싼 석탄으로 에너지가 바뀌자 요크셔(Yorkshire)나 중부 지역 등 동부 연안 항구들과의 경쟁에 밀려 정점을 찍었다. 브릭스엄은 2000년 들어 잉글랜드 내 최고 어항의 자리를 회복했는데, 어획량의 가치는 1,800만 파운드를 넘었다. 이에 따라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새로운 어시장이 건축되었다. 

브릭스엄 항구 마을 벽의 예술품


며칠을 묵었던 토트네스(Totnes)의 숙소에 걸린 그림을 보고 브릭스엄 항구를 찾았다.

토트네스의 숙소
토트네스 숙소에 걸린 브릭스엄 항구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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