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은 지성이 아니라 놀이 본능이다. The creation of something new is not accomplished by the intellect but by the play instinct.
만화영화 정글북 초반에 주인공인 모글리가 폭포가 떨어지는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목숨을 걸고 뛰어내린 이유는 호랑이에게 쫓긴다든가 하는 급박한 것이 아니다. 정글의 오랑우탄 친구들 사이에서 놀림감이 되는 것을 견디지 못해 자신의 용맹을 뽐내기 위해서였다. 친구들에게 인정받는다는 것은 어떤 경우 목숨을 걸만큼 위중한 일이기도 하다. 놀이생태계에는 사람의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동원하는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즉, 놀이생태계 안에는 인간의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발현시키는 메커니즘이 있는데, 이것이 놀이생태계와 놀이의 쾌락 원리 안에서 최대한도로 잘 작동한다.
어린이 뿐 아니라 성인이 하는 소비와 생산 활동의 바탕에 타인에게 주목을 받고 기대를 얻고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구가 크게 작용한다. 인간이라는 동물은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사회적 환경에 적응하면서 타인의 시선에 기꺼이 포획되는 욕구나 욕망의 메커니즘을 발달시켰다. 시선은 권력이다. 인류가 문명이라고 할 만한 것을 만들어 내기 전부터 이 욕구는 작동했을 것이고, 인류가 아무리 진보한 다음에도 이 욕구는 멈추지 않을 터이다. 우리가 어떤 일을 좀 더 잘하기 위해서 분발하는 것은 간단히 말해서 타인에게 무시당하거나 홀대 받지 않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직장 상사나 부모나 고객에게 곱지 않은 말을 들었을 때, 불쾌해 지는 것은 그 말 안에 바로 자신에 대한 타인의 평가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비판이든 상찬이든 간에, 타인의 평가는 언어로 전환된 타인의 시선이다.
타인의 시선은 때로 우리 자신의 존재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자아라는 것도 타인의 시선과 평판에 의해 이리저리 구부러지면서 규정된다. 타인의 시선과 입방아에 의해서 자기 존재가 부당하게 규정당할 때, 10원 한 푼 잃지 않았음에도 마치 전 재산을 잃은 것처럼 분노한다. 루머에 싸여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것이다. 그 루머가 회자되는 人口의 수에 무관하게 우리는 분노와 상실감과 무력감을 느낀다. 반대로 주변 사람에게서 칭찬을 받을 때, 우리는 마치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듯한 쾌감을 느낀다.
‘때릴꺼야, 혼낼꺼야, 해고할꺼야’등의 공포와 겁박의 원리는 인간의 잠재력을 갉아먹기만 할 뿐이다. 인간은 돈 같은 물질을 얻기 위해 최대한 열중하고 몰입해서 그야말로 심혈을 기울여 뭔가를 이루거나 하진 않는다. 인간의 잠재력을 이끌어내는 원동력은 물질적인 보상 보다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 명예가 아니라 상금 때문에 노벨상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물론 타인은 모르는 비밀스런 혼자만의 쾌락이란 것도 존재한다. 세상 어딘가에는 엄청난 보물을 혼자만의 공간에 쌓아 두고 아무도 모르게 홀로 즐기다가 아무에게도 남기지 않고 세상을 등지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오매불망 바라마지 않는 물질적 성취나 재화도 결국 타인의 시선이 매개되지 않으면 대체로 바닷가의 모래나 다름 없다. 온갖 귀한 보석과 기름지고 맛난 식량이 무궁무진한 무인도에서 혼자만 살 것인가, 아니면 지금 그대로 살아갈 것인가라는 선택하라면 후자를 선택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이가 어른보다 작은 이유는 어른을 올려다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른들이 가끔은 그들의 과거와 미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른이 아이보다 큰 이유는 아이를 내려다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를 지켜주기 위해서이다. 인간에게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이 발달한 것은 아이들이 어떻게 성장할 지 기대하기 위해서이다. 인간에게 현재를 예리하게 인식하는 능력이 있는 것은 아이들을 주목하기 위해서이다. 인간에게 과거를 평가하는 능력이 있는 것은 아이들을 인정해주기 위해서이다. 모든 어른들이 매일 아이들 앞에서 잠시만이라도 무릎을 꿇고 아이들 말에 귀기울인다면 우리 앞에 천국이 펼쳐질 것이다.
인간의 주위에는 인간이 있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내가 나일 수 있는 이유와 방식을 우리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찾아 왔다. 간혹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이유를 끊임없이 묻고 또 묻는 사람들도 있다. 서열이라는 단선적인 구조를 벗어나서 내가 나일 수 있는 개성의 싹이 나타나서 자라고, 인간의 감성과 마음을 읽는 보편적 행동의 토대가 되는 것을 익히는 곳이 바로 놀이생태계이다. 우리 시대 어린이들은 상호작용할 시간과 공간이 별로 없다. 우리는 과도하게 위험한 시도를 ‘어쩔 수 없다’는 말로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