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생태 복원기(1), 옆새우 처럼 상처 썰어내기
“오늘도 나한테 카톡을 안 보내면 넌 아웃이야.”
벌써 이 주일째 내게 소식을 전하지 않고
무응답으로 항변하는 초딩 친구에게
오늘 아침 마음으로 부르짖은 선언이다.
마음 한 켠에서는
이 친구 나한테 뭐 서운한 거 있나?
삐졌나?
아픈가?
무슨 안 좋은 일 있나?
그렇게 소설의 초안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나는 어제,
심지어 오늘도 친구에게 안부 톡을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시한폭탄 버튼을 눌렀다.
나는 일주일에 최소한 두세 번 안부를 묻는데
한 달에 한 번 정도 전화를 걸어오면 다행인 친구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기로 한 것이다.
“네가 정말 나를 절친으로 생각한다면
내가 늘 보내던 안부 문자가 이틀 정도 안 가면
당연히 나를 걱정해서라도 오늘 중에는
카톡이라도 보내겠지.”
이것이 나의 가설이고
가설이 증명되지 않으면 결과는 아웃으로
시한폭탄을 설정해 놓은 것이다.
꼭 나처럼 예민한 사람이 아니어도,
연인이나 가까운 관계일수록
답장 하나에 마음이 먼저 움직이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다.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산과 바다를 누비며 소위 ‘전문가’라는
껍질을 방패 삼아 숨어 살아왔다.
그 시간 동안 자연은
이해라는 포만감을 주는
푸짐한 잔칫상이 되어주었다.
그런 나에게
나름대로 절친이라는
46년 지기 친구의 카톡 침묵은 이해 불가이다.
공감이라는 차원에서 문제이고
심리적 거리를 두려 하는 관계의 위기이며
나만의 외사랑을 증명하는
가설로밖에 이해되지 않았다.
점심 식사를 때우고
여느 때처럼 모니터 앞에 앉았다.
감정의 골이 깊어져 쌓이면
추상적 언어로 감정을 배설해 온
나의 일기장, 페북을 열었다.
몇 년 전인가?
점봉산의 수려한 계곡에서 담은 사진.
그 아래 흘려 적힌 수십 줄의 산문시를
무심히 읽어 내려갔다.
아마도 낙엽을 힘겹게 썰고 있는
옆새우에게
진한 동지애를 느낀 것 같다.
며칠간 켜켜이 쌓인
마음속의 낙엽들을
추상적인 말로 덮으려 배설했던 글이었다.
물론 그것은 나의 비겁함이 아니라
무거운 낙엽 더미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나만의 생존 방식이었다.
그런데 그놈의 카톡 때문에 상처받은 오늘,
그날의 독백에 문득 이런 의문이 생겼다.
옆새우는
자신을 짓누르는 거대한 낙엽을 보며
과연 이런 생각을 했을까.
“이건 너무 커.”
“무거워, 힘들어.”
“하지만 언젠간 썩겠지.”
본능적으로,
나는 생태학자로서의 이성으로만
그 장면을 떠올렸다.
옆새우는 쌓인 낙엽을
한 번에 옮기려 하지 않는다.
지금 자기 입에 들어오는 만큼만 잘라먹고,
나머지는 미련 없이 흘려보낸다.
그 반복 덕분에 계곡은 두꺼운 낙엽에 막히지 않고,
맑은 물의 흐름을 유지한다.
여기까지는 언제나처럼 명확하고,
이성적인 결론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카톡에 마음이 상한 채로 그 장면을 다시 떠올리자,
머릿속에서는 이해가 된다고 말하고 있었는데,
마음은 그 말을 따라오지 못했다.
설명은 끝났는데 감정만 제자리에 남아 있는 느낌.
그 순간, 내 마음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어라. 나는 박사랍시고 계곡 속 옆새우의
생존 방식은 훤히 꿰고 있으면서,
왜 내 카톡 창에 고인 ‘1’이라는 숫자와
그 뒤에 따라온 외로움 앞에서는
이렇게 속 좁고 무지했을까.
삶의 절반을 넘게 자연을 연구하며
'순환'을 외쳤지만,
정작 내 마음의 물길을 막고 있는
서운함이라는 낙엽 하나 처리하지 못했던 것이다.
옆새우가 아무런 판단 없이 낙엽을 썰어
물길을 터주듯,
내게 필요했던 건 거창한 해석이 아니라
그저 이 마음을 '잘게 썰어' 흘려보내는
단순한 용기였다.
분해자 없는 내 마음 생태계는
느끼는 대신 설명하려 하고
울기보다는 애써 의미를 만들려 했다.
아프다는 말 대신 요상한 언어를 쌓아
순환하지 못하는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심지어 그것을 타인에게까지 요구하고 있었나?
만일 내가 옆새우처럼
해석 없이 현상을 허용했다면···.
내가 먹을 것만 취하고
남은 것은 미련 없이 흘려보냈다면···.
며칠 카톡 없는 친구를
비극적 소설의 주인공 삼아
이미 늪이 되어가는 내 마음의 둠벙속에
또 한 장의 두꺼운 낙엽으로 더했을까?
고작 카톡 하나에 무너지는 내가,
사실은 24년째 달고 사는 공황장애 약을 이해하려고
스스로를 옥죄고 있었다는 사실이
뼈아프게 다가온다.
전화를 걸었다.
이틀간의 내 소설을 장착한 시한폭탄을 무색게 하는
밝은 목소리···.
“어제, 오늘 바빴어?”
“10여 분간의 통화에서 우리는
진짜 1도 아무 일 없는 46년 지기 절친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는 ‘웃프다’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결국 내가 상상했던 모든 소설은
오롯이 ‘내 마음 생태계’에서만 벌어진 사건이었다.
친구의 마음속에는
산불도 없었고
사막화도 없었고
단지 “연락을 자주 안 하는 그만의 숲”이 있었을 뿐.
하지만 나의 웃픔은 자책이 아니었다.
“아…. 또 나 혼자 너무 멀리 갔구나~ ㅠ”
이렇게 나 자신을 때리는 웃음이 아니라
내 마음에도 “옆새우가 필요하구나”를 알아차린
미소였다.
이해되는 것만 취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썰어서 그저
‘인정’의 조각으로 흘려보내야겠다는
깨달음의 미소.
관계는 설정 대상이 아니었다.
사람마다 연락의 리듬이 다르다.
불안은 사실을 묻기 전까지는 가설일 뿐이다.
직접 묻는 건 약함이 아니라 신뢰의 표현이다.
이렇게 조각내어 흘려보내면
내 마음의 둠벙도 흐름의 자유를 얻을 수 있고
24년간의 공황도
그 뿌리를 찾아갈 수 있게 되지 않을까(?)를 느낀
귀한 하루였다.
잠자리에 들며 남긴 내게 보내는 위로의 한마디.
“내일부터는 나도 옆새우처럼 서운함이라는
낙엽을 삭이지 말고 그냥 썰어버리자"
“나는 버림받을까 봐 연락을 기다린 게 아니라,
그 녀석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겨서 먼저 손을
내밀었던 거야.”
“내 마음속에 옆새우를 키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