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생태 복원기(2), 예민함 이라는 생존 전략
숲 가에서 예고 없이 마주친 말벌 군단은
소리보다 진동으로 먼저 다가온다.
수천 마리의 날갯짓이 만드는
그 낮은 주파수의 함성이 들리는 순간,
뇌는 판단을 멈추고 근육에 모든 전령을 보낸다.
"뛰어라, 살고 싶으면."
그때의 기억은 땀구멍 하나하나가 기억하는
생존의 각인이다.
그런데 그 야생의 긴장감이
숲이 아닌 병원 대기실에서 재현될 때가 있다.
내 앞에는 익숙한 혈압계가 놓여 있다.
초록색 시작 버튼을 누르자 기계가
내 팔을 조여오기 시작한다.
"우~웅" 하는 기계음은 마치 그날 나를 쫓던
말벌들의 날갯짓 소리처럼 환청으로 들린다.
잠시 후,
압력밥솥 김 빠지는 소리가 지나간 모니터에는
‘158/102’라는 숫자가 선명하게 찍힌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무시하며
나는 황급히 휴대폰 검색창으로 숨어든다.
검색어는 '고혈압, 당뇨'.
AI가 뱉어내는 무미건조한 의학 정보들 앞에서
나는 속수무책으로 작아진다.
점심시간,
페이스북을 열자 더 가관이다.
알고리즘은 내 불안을 귀신같이 낚아채
혈압과 당뇨에 좋다는
온갖 건강식품 광고를 내 타임라인에 쏟아낸다.
나는 지금 '질병'을 앓는 것인가,
아니면 '염려'라는 데이터에 낚인 것인가.
오랜 시간 자연의 질서를 연구했다는
소위 전문가란 사람이
정작 자기 몸의 신호 하나 해석하지 못해
기계의 문장에 일희일비하는 꼴이
정말 서글프다.
자괴감 섞인 한숨을 내쉬다 문득,
겨울 논둑에서 만났던 '두루미'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내가 만난 두루미들은 경계심이 강하고
나만큼 예민한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먹이 활동을 하다가도
농부들이 일정한 거리 안으로 들어오면,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긴 목을 치켜세운다.
'경계의 거리'를 침범당했다는 신호다.
그들은 비명을 지르듯 경고음을 울리며
힘차게 날아오른다.
몸집이 큰 두루미에게
한 번의 비행은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코 그 거리를 타협하지 않는다.
효율보다 생존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비명 섞인 날갯짓은
예민함이 아니라 생명줄이다.
내 안의 경보기가 쉴 새 없이 울리는 이유도
어쩌면 내가 이상해서가 아니라,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애쓰고 있다는
몸의 처절한 신호가 아니었을까.
이제는 내 안의 두루미를 탓하는 대신,
그가 마음 편히 내려앉을 수 있는
따뜻한 논둑 하나를 내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이 대목에서 나는 내 삶의 궤적을 돌아본다.
24년 전 시작된 공황장애,
그리고 30년 넘게 '능력 있는 전문가'이자
'기대에 부응하는 아들'로 살아야 했던
팽팽한 긴장의 시간들.
내 안의 경계 시스템은
환경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을 '위험 지역'으로
분류하고 있었던 것이다.
병원이라는, 이론적으로는 가장
안전해야 할 공간에서도
내 몸이 먼저 전투태세를 갖췄던 것은
내 안의 '안전 데이터'가 수십 년 전의
공포에 멈춰 업데이트되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나는 그동안, 이 건강염려와 불안을
고쳐야 할 '고장'으로만 여겨왔다.
하지만 두루미의 비행을 복기해 보면
그것은 고장이 아니라,
나를 지키기 위해
내 몸이 최선을 다해 돌리는
'방어 기제'였다.
내 안의 두루미는 오늘도 목을 길게 빼고
사방을 살핀다.
혹시라도 주인인 내가 상처받을까 봐,
혹은 이 평화가 깨질까 봐
에너지 소모를 감수하며
날갯짓을 준비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 조금씩 알아간다.
내 불안이 '오류'가 아니라
나를 지키려는 오래된 방식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내 안의 안전 데이터는
조금씩 갱신되기 시작할 것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두루미의 목을
억지로 누르지 않기로 했다.
대신 그 녀석이 편히 쉴 수 있는
따뜻한 논둑 하나를
내 마음속에 마련해 주는 일,
아마도, 그것이
내가 나를 위해 처음 해보는
마음 복원일 것이다.
어쩌면 당신 안에도,
날아오를 준비를 한 채 서 있는
두루미 한 마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내 안의 예민한 두루미에게
따뜻한 논둑을 선물하면 어떨까?
나는
헤칠 마음이 전혀 없는데,
여전히 머리를 쳐들고
나를 경계하는 두루미를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