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시험에 떨어졌다는 뉴스를 처음 봤을 때, 농담인 줄 알았다.
삼성전자면 반도체 세계 1위 아닌가. 전 세계 메모리 칩의 40%를 만드는 회사. 시가총액 1,000조 원. 그 회사가 고객사 테스트에서 탈락했다고?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2년 넘게?
뉴스를 파보니 사실이었다. 삼성전자는 2023년부터 엔비디아에 HBM이라는 부품을 납품하려 했는데, 계속 시험에 통과하지 못했다. 발열 문제, 안정성 문제.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그 사이 경쟁사인 SK하이닉스는 2022년부터 엔비디아와 손을 잡고 독점에 가까운 납품을 해왔다. 2년이라는 시간은 기술 경쟁에서 치명적인 격차다.
투자 초보인 내가 이 뉴스에 꽂힌 건, 계좌에 삼성전자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지난 글에서 적립식으로 사고 있다고 했던 S&P 500 ETF에는 엔비디아가 들어 있었다. 엔비디아가 AI 칩 시장의 90%를 차지한다는 숫자를 보고, 이 회사에 부품을 대는 곳과 대지 못하는 곳의 운명이 어떻게 갈릴지 궁금해졌다. 한 기업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투자자라면 반드시 알아야 하는 산업의 구조가 여기 들어 있었다.
HBM이라는 단어를 처음 보면 외계어 같다. High Bandwidth Memory. 고대역폭 메모리. 직역해도 무슨 뜻인지 감이 안 온다.
나는 이렇게 이해했다.
일반 메모리가 편도 1차선 도로라면, HBM은 8차선 고속도로다. 같은 시간에 훨씬 더 많은 데이터를 동시에 실어 나를 수 있다. AI가 하는 일을 생각해보면 이게 왜 필요한지 바로 알 수 있다. ChatGPT에 질문 하나를 던지면, 그 뒤에서는 수십억 개의 데이터가 동시에 처리된다. 1차선 도로에서는 교통 체증이 걸린다. 8차선이 필요한 이유다.
구조도 독특하다. 일반 메모리가 납작한 레고 블록 한 개라면, HBM은 그 블록을 8개에서 12개까지 탑처럼 쌓아올린 것이다. 좁은 공간에 더 많은 데이터를 집어넣고, 층과 층 사이를 미세한 구멍으로 연결해서 초고속으로 주고받는다. 말로 하면 단순해 보이지만, 칩을 쌓으면서 열이 나지 않게 하고, 한 층이라도 불량이면 전체가 쓸모없어지니까, 이 기술의 난이도는 상상 이상이다.
여기서 핵심 숫자가 하나 등장한다. 수율. 만든 제품 중에서 합격품이 나오는 비율이다. SK하이닉스는 100개를 만들면 80개에서 90개가 합격한다고 알려져 있다. 삼성전자는 50개에서 60개. 같은 재료, 같은 시간을 투입해도 삼성은 버리는 양이 훨씬 많다. 버리는 게 많으면 원가가 올라가고, 원가가 올라가면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고, 결국 고객이 떠난다. 기술 기업에서 수율은 곧 생존이다.
그런데 왜 하필 삼성이 밀리게 된 걸까. 전체 메모리 시장에서는 부동의 1위인 회사가.
답은 타이밍에 있었다. SK하이닉스는 2022년에 엔비디아와 HBM3 독점 공급 계약을 맺었다. AI 붐이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삼성은 그때 HBM에 대한 판단이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기존 메모리에서 워낙 잘 벌고 있었으니, 아직 시장이 작은 HBM에 올인할 유인이 적었을 수 있다. 이건 추측이지만, 결과적으로 SK하이닉스가 2년의 선점 효과를 가져갔다.
2년이 왜 중요한지는 이렇게 생각하면 쉽다. 엔비디아 입장에서 HBM은 AI 칩의 심장이다. 칩 하나에 HBM 값만 500만 원에서 600만 원이 들어간다. 전체 칩 가격의 절반이 메모리 값이다. 이렇게 비싸고 중요한 부품의 공급사를 바꾸는 건 엄청난 리스크다. SK하이닉스와 2년 동안 쌓은 신뢰, 안정적으로 대량 납품해온 실적. 이걸 삼성으로 갈아타는 건 엔비디아에게도 도박이다.
여기에 시장 구조의 문제가 겹친다. AI 반도체, 그러니까 GPU 시장에서 엔비디아의 점유율은 90%다. 나머지 10%를 AMD와 다른 업체들이 나눠 갖는다. 밀가루 회사가 아무리 좋은 밀가루를 만들어도, 전 세계 빵집의 90%를 한 곳이 차지하고 있다면 그 빵집에 납품하지 못하면 사실상 시장에서 퇴장이다. 삼성이든 SK하이닉스든 엔비디아의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삼성은 손 놓고 있었느냐 하면, 전혀 아니다.
2024년 9월, 삼성은 드디어 엔비디아로부터 HBM3E 인증을 받아냈다. 2년을 매달린 끝에 얻은 합격증이었다. 늦었지만 문은 열렸다. 그리고 올해, 더 큰 카드를 꺼냈다. 2026년 2월 12일, 삼성전자가 차세대 제품인 HBM4를 세계 최초로 양산 출하했다는 뉴스가 떴다. 샘플이나 시연이 아니라, 실제 상업적 공급을 시작했다는 의미다.
HBM4의 성능은 확실히 인상적이다. 업계 표준보다 46% 빠른 속도를 달성했고, 최대치는 그보다 더 높다. "안정성의 SK하이닉스" 대 "성능의 삼성"이라는 구도가 만들어진 셈이다.
하지만 양산을 먼저 시작했다는 것과 시장을 뒤집었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SK하이닉스는 여전히 HBM 시장의 57%를 쥐고 있고, HBM4 물량의 3분의 2를 이미 확보했다고 알려져 있다. 4년 동안 쌓아온 엔비디아와의 관계, 높은 수율에서 나오는 가격 경쟁력. 이건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 시점은 묘하다. 삼성이 반격의 신호탄을 쏜 건 분명하다. 하지만 총성이 울렸다고 전쟁이 끝난 건 아니다. 진짜 승부는 올 상반기 점유율 숫자로 갈린다. 삼성이 현재 22%인 점유율을 30%까지 끌어올릴 수 있느냐. 그 8%포인트가 이 거대한 전쟁의 첫 번째 분수령이다.
이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느낀 게 있다.
투자를 시작하기 전에는 "삼성전자 = 갤럭시 만드는 회사"라고 생각했다. 반도체 세계 1위라는 건 알았지만, 반도체 안에서도 이렇게 세밀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줄은 몰랐다. 같은 메모리를 만드는 두 회사가 2년의 타이밍 차이로 이렇게 다른 위치에 놓일 수 있다는 것. 기술 기업에서 "빨리 시작하는 것"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를 체감했다.
그리고 하나 더. 뉴스에서 "삼성전자 HBM4 세계 최초 양산"이라는 헤드라인만 보면 금방이라도 역전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 아래 숫자를 읽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점유율 57% 대 22%. 수율 80~90% 대 50~60%. 엔비디아 물량 3분의 2 대 추격 중. 헤드라인과 숫자 사이의 간극을 읽어내는 것. 그게 투자를 공부한다는 것의 진짜 의미가 아닐까.
1편에서 적금을 깨며 재테크를 시작했고, 2편에서 ETF로 첫 투자를 했다. 이번엔 그 ETF 안에 담긴 기업의 속살을 들여다봤다. 바구니를 사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바구니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알아가는 과정. 그게 투자의 다음 단계인 것 같다.
아직 모르는 게 훨씬 많다. 하지만 반년 전, 삼성전자 매수 버튼 앞에서 손바닥에 땀을 쥐던 사람이 이제는 HBM 수율과 엔비디아 점유율을 이야기하고 있다. 느리지만 한 발씩 나아가고 있다는 감각. 이 감각이 나를 계속 공부하게 만든다.
삼성전자 더 깊이 파보고 싶다면 -> 경제한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