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 사태에 시선 쏠린 사이, 내년 예산은 국민 관심 밖에서 ‘무삭감’
728조 슈퍼예산, 빚으로 떠받친 선거용 살포
쿠팡 사태에 시선 쏠린 사이, 내년 예산은 국민 관심 밖에서 ‘무삭감’ 통과
국회는 2일 새벽 728조 원 규모의 내년도 예산안을 사실상 원안 그대로 처리했다. 총지출은 정부 제출안 대비 0.1조 원만 줄어든 727.9조 원으로, 형식상 감액이 있었을 뿐 실질적으로는 ‘무(無)삭감’에 가까운 통과다. 총선을 앞두고 여야가 지역·계층별 현금성 지원 예산을 지켜 내는 데만 골몰했다는 비판이 짙게 드리웠다. 그럼에도 정작 예산 심사 과정은 ‘쿠팡 사태’ 등 굵직한 사회 이슈에 가려 국민적 검증 없이 조용히 진행됐다. 재정적자 확대, 적자국채 110조 발행, 국가채무 1,400조 원 돌파가 기정사실화된 상황에서도 불구하고 정치권은 지출 구조 조정보다 표(票)에 도움이 되는 예산에 더 무게를 실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회는 이날 총지출 727조9,000억 원 규모의 예산안을 가결했다. 올해 본예산보다 55조 원 넘게 늘어난 역대 최대 규모다. 여야는 5년 만에 법정시한을 맞췄다는 점을 강조하지만, 정작 예산 총량은 손도 대지 못한 채 ‘증감 맞바꾸기’ 수준의 미세 조정에 그쳤다. 여야가 감액한 9조3000억 원은 대부분 다시 증액으로 되돌아갔고, 실질적 지출 구조조정은 없었다. 정치권 스스로 내세운 ‘재정 정상화’는 구호에 그친 셈이다.
이 과정에서 주요 쟁점 사업은 그대로 살아남았다. 특히 지역상품권, 기본소득 성격의 지원사업, 지역 기반 현금성 예산은 여야 모두 “내구성 강한 표밭”이라며 건드리지 않은 대표적 항목으로 꼽힌다. 사실상 예산안이 국회 에 제출된 그 상태로 ‘통과 도장’만 찍은 셈이다.
문제는 이 슈퍼예산을 떠받칠 재원이 ‘빚’뿐이라는 점이 다. 정부는 내년 국고채 발행을 232조 원으로 계획했는 데, 이 중 적자 보전을 위한 적자국채가 약 110조 원에 달한다. 이미 취약해진 채권시장에서는 “발행 물량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우려가 퍼지고 있다.
적자국채
• 정부의 수입보다 지출이 많아 발생한 재정 적자를 메우기 위해 국가가 발행하는 채권
• 부족한 재원을 확보하고 경기 침체 시 경기 부양을 위한 재정 지출을 늘리는 것에 있음
• 단, 발행이 늘어나면 국가 채무가 증가하여 미래 세대의 부담을 키우고 재정 건전성을 악화시킴
국가채무는 내년 1,400조 원을 넘어설 전망이다. 국내 총생산(GDP) 대비 채무비율도 처음으로 50% 선을 돌파 한다. 세수 기반 확충이나 지출 혁신 없이 국채 발행을 통해 지출 확대를 유지하는 구조가 고착되면, 한국 재정의 신뢰도는 결국 시장에서 평가받게 된다. 일각에서는 “지금 속도라면, 머지않아 금리 프리미엄이 붙는 국가로 전락할 위험도 있다”는 경고를 내놓는다.
여야는 이번 예산 심사에서 지역상품권·기본소득뿐 아니라 도로, 철도, 하천 정비, 전통시장 현대화, 공영주차장, 생활SOC 등 지역구 기반시설 사업까지 폭넓게 방어 하거나 새로 반영했다. 특히 예결위와 조정소위 소속 의원들을 중심으로, 당초 기재부가 경제성 부족을 이유로 삭감했던 중·소형 SOC 사업이 지역구 요구에 따라 대거 부활한 것으로 전해졌다. 일부 농어촌 지역구에서는 농어촌 기본소득 시범지역 확대·농업용 보조·배수 개선 사업이, 수도권 지역구에서는 도시철도 환승센터·통학로 안전시설·체육관 신축 등 생활밀착형 사업이 ‘지역 숙원’ 명목으로 증액됐다.
정치권은 이를 ‘지역경제 활성화’라고 설명하지만, “선거를 앞두고 예결위 의원 지역구일수록 예산이 집중되는 전형적 패턴”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재정여력이 빠르게 고갈되는 상황에서 현금성·생활SOC성 지출이 동시 확대될 경우, 중장기 성장투자로 가야 할 재원이 줄어 들고, 지역별 정치적 수요에 따라 재정이 왜곡되는 현상이 심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정부는 이번 예산을 ‘미래 성장 투자’라고 규정한다. AI· 반도체·우주·친환경 인프라 등 전략 분야 예산을 확대해 국가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구상이다. 그러나 실제 예산 구조를 보면, 총지출 증가분 상당수가 인건비, 복지, 보조금 등 의무성·경직성 지출로 채워져 있다. 미래 투자를 위한 선택적 지출이 아닌, 기존 지출의 자동 증가를 ‘예산 확대’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경제학계에선 “경기가 둔화하면 재정이 역할을 해야 하지만, 이는 생산성을 높이고 민간투자를 견인하는 방향 이어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번 예산의 상당 부분은 단기 현금지원·소비 부양 중심으로 편성돼 있어, 중장기 성장률 제고로 이어질지 의문이 제기된다.
이번 예산 편성을 관통하는 근본 질문은 결국 “누가 이비용을 감당하는가”라는 점이다. 현재의 정치권이 선택한 방식은 분명하다. 부담은 지금의 유권자가 아니라, 앞으로 세금을 낼 미래세대가 떠안도록 설계돼 있다. 내년한 해만 보더라도 적자 보전을 위해 110조 원 안팎의 적 자국채를 발행해야 하고, 국가채무는 1,400조 원을 넘어선다. 그러나 이런 급격한 부채 증가에도 불구하고 여야 모두 지출 구조개혁이나 조세개편, 연금 개혁 등 핵심 개혁 과제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특히 연금·건강보험·기초생활보장 등 의무지출 항목은 매년 자동적으로 수조 원씩 증가하고 있다. 고령화 속도가 OECD 최고 수준인 대한민국에서 이러한 구조는 이미 지속 불가능하다는 경고가 여러 차례 제기됐다. 그럼 에도 정치권은 표가 걸린 복지 지출 축소나 보험료·세율 조정 같은 불편한 결정을 또다시 미뤘다. 개혁을 회피한 대가로 생기는 재정 공백은 결국 국채 발행과 미래 세대의 납세 부담 확대로 메우는 방식이 반복되고 있다.
재정은 경기 침체나 금융 불안, 대외 충격이 올 때 국가를 지탱하는 최종 안전판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부채가 빠르게 쌓이고, 구조개혁 없이 소비성 지출이 확대되면 외부 충격이 닥쳤을 때 재정이 더 이상 ‘버팀목’이 되기 어렵다. 시장 또한 이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국채 발행이 계속 늘어나면 장기금리는 상승하고, 신용등급에 대한 평가도 달라질 수 있다.
국회의 예산심사는 본래 정부가 편성한 728조 원의 지출이 국가 전략과 재정 지속 가능성에 부합하는지 검증 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그러나 올해 심사는 총지출 조정 부재, 정책 효과 분석 미흡, 중복·비효율 사업 정리 부재 등 핵심 기능이 사실상 작동하지 않은 채 끝났다. 예결위 소소위 중심의 비공개 협상 구조가 반복되면서 국민적 검증 과정도 빠졌고, 심야 속전 처리로 공론장 역시 형성 되지 않았다. 법정시한 준수라는 형식적 성과 뒤에 실질적 심의는 사라졌다.
따라서 국회가 예산을 통과시키는 방식부터 재검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예산 심사의 목적은 부처·지역 이해관계에 따라 예산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사업 효과 분석, 국가 우선순위 재조정, 재정건전성 점검, 미래 세대 부담 최소화 같은 기준을 토대로 예산의 방향과 구조를 설계하는 것이다. 지금처럼 거대한 예산이 공론 없이 조용히 통과되는 방식이 반복된다면, 재정 운영은 정치적 필요에 휘둘리고 국가의 장기 전략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