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경제(9.8~14)

by 강준형

미국, 전비 마련 위해 세금 체제 강화하다

1916년 9월 8일,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긴급 수익법에 서명했다. 미국은 아직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않았지만 이미 전비(戰費)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전쟁 대비’였다. 유럽에서 전쟁이 장기화하자 군수품 수출이 급증했고 이에 따라 해군 확충과 방위비 지출이 늘어났다. 다른 하나는 ‘재정 확대’였다. 미국 정부는 멕시코 혁명(1910~1920)과 유럽 정세 불안에 대응하기 위해 국방비를 대폭 증액하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새로운 세입원이 필요했다.


긴급 수익법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법은 기존 소득세율을 두 배 가까이 인상했고(7% → 15%), 연방 상속세를 신설했다. 군수품을 생산하는 기업에는 ‘군수품 이익세’를 물려, 방위산업이 얻은 전쟁 특수를 국고로 환수하려 했다. 단순한 세입 확대가 아니라 ‘전시 재정 동원’이라는 성격이 짙었다.


이 조치가 가능했던 밑바탕에는 1913년 제16차 수정헌법이 있었다. 그 전까지 연방정부는 헌법의 제약 때문에 직접세를 부과하기 어려웠다. 연방 소득세는 남북전쟁기에 한시적으로 도입되었지만 1895년 연방대법원이 위헌으로 판결해 사라졌다. 그러나 산업화와 도시화로 부의 격차가 커지면서 ‘누진세를 통해 대기업과 부유층이 더 많이 부담해야 한다’는 여론이 확산됐다. 이에 1913년 비준된 16차 수정헌법에서는 연방정부가 소득세를 합법적으로 부과할 권한을 명문화했으며 같은 해 소득세가 다시 시행되기에 이른다. 긴급 수익법은 그 체제를 본격적으로 확장한 첫 번째 전시성 세법이었다.


긴급 수익법은 일시적 조치가 아니었다. 1917년 미국이 독일 제국에 선전포고를 하며 본격적으로 전쟁에 참전하자, 더 강력한 전시수익법(War Revenue Act)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미국 조세체계는 국채 발행과 병행한 ‘대규모 과세 강화’라는 새로운 단계로 들어갔다. 즉 긴급 수익법은 미국이 근대적 조세국가, 특히 ‘전시 조세국가’로 변모하는 전환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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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대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대표적 시각 자료가 바로 ‘리버티 본드(Liberty Bond)’ 포스터다. 자유의 여신상이 독자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You buy a Liberty Bond, lest I perish(자유채를 사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라고 호소하는 그림은, 세금 인상과 국채 발행을 통해 전시 재정을 확보하려 했던 미국 정부의 절박함을 생생하게 전한다. 긴급 수익법이 제도적 토대를 놓았다면, 이런 선전물은 국민의 지갑을 열게 한 감정적 동원 수단이었다.


북부 태평양 철도 완공

1883년 9월 8일, 미국 몬태나주 골드 크리크에서 북부 태평양 철도의 마지막 레일이 놓였다.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대륙횡단 철도의 완성이었다. 길이 3,200km가 넘는 노선은 미네소타의 대도시 미니애폴리스를 출발해 대평원과 로키산맥을 넘어 워싱턴주의 타코마에 도달했다. 서부로 향하는 이 새로운 통로는 ‘철마’의 시대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분수령이었다.


미국은 1869년 유타주 프롬온토리에서 첫 대륙횡단 철도가 개통된 이후, 서부 개발과 교역 확대를 위해 잇따라 철도 건설에 나섰다. 북부 태평양 철도는 그 가운데 북쪽 루트를 담당했다. 철도 건설에는 연방정부의 대규모 토지 보조와 금융 투자가 동원됐다. 공사 과정에서 자본의 집중과 투기, 그리고 원주민의 저항과 이주민의 희생이 뒤섞였다.


북부 태평양 철도의 완공은 미국 경제 지도를 바꿔 놓았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보다도 먼저 북미 대륙 북부를 관통한 이 노선은, 곡물·목재·광물 자원의 이동을 획기적으로 촉진했다. 동부의 공업지대와 태평양 연안을 직결하면서 무역항 타코마와 시애틀은 급성장했다. 농민과 이민자들은 철도를 따라 대평원과 서북부로 몰려들었고, 토지의 가치가 급등했다.


그러나 이 거대한 프로젝트는 동시에 금융위기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착공 당시 재정난으로 파산을 겪었고, 이후에도 철도 건설 붐은 1893년의 대공황을 촉발하는 구조적 과잉투자와 연결됐다. 북부 태평양 철도는 ‘성장의 엔진’이자 ‘위기의 그림자’를 함께 지닌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적 인프라였다.


바그다드 회의와 OPEC 창립

1960년 9월 10일, 이라크 바그다드에 중동과 남미의 산유국 대표들이 모였다.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이라크, 쿠웨이트, 베네수엘라. 다섯 나라가 회의장에 앉아 결의한 것은 단 하나였다. “석유 가격을 더 이상 메이저 석유회사(세븐 시스터스, 7개 주요 국제 석유회사)에 맡겨두지 않겠다.” 이 결의는 곧바로 OPEC(석유수출국기구) 창립으로 이어졌다.


당시 상황은 단순한 에너지 문제가 아니었다. 1950년대 후반 세계 원유 시장을 지배하던 국제 석유회사들은 공급 과잉을 이유로 산유국에 일방적으로 원유 가격 인하를 통보했다. 원유 수출에 의존하던 개발도상국 정부의 재정은 크게 흔들렸다. 석유를 생산하는 나라가 석유에서 나오는 이익을 제대로 가져가지 못하는 구조가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바그다드 회의에서 태어난 OPEC은 “원유 가격과 생산량을 산유국 스스로 협의·조정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이는 국제 석유질서의 패권을 다국적 기업에서 국가로 되돌리려는 첫 시도였다. 처음에는 다섯 나라에 불과했지만, 곧 카타르, 리비아, 인도네시아 등으로 확대되며 국제 경제 무대에서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특히 1973년 1차 오일쇼크는 이 선언이 세계 경제에 어떤 파급력을 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세계무역센터 붕괴

2001년 9월 11일 아침, 뉴욕 맨해튼의 하늘로 여객기 두 대가 돌진했다. 아메리칸항공 11편과 유나이티드항공 175편. 비행기는 세계금융의 상징이던 세계무역센터(WTC) 쌍둥이 빌딩에 연이어 충돌했다. 곧이어 또 다른 항공기가 워싱턴 D.C. 인근 펜타곤에 들이닥쳤고, 네 번째 비행기는 승객들의 저항 끝에 펜실베이니아 벌판에 추락했다. 불과 두 시간 남짓한 시간에 3천 명 가까운 목숨이 사라졌다.


이 사건은 실물 경제에도 전례 없는 충격을 줬다. 뉴욕 증시는 나흘간 폐장했고, 글로벌 증시 역시 동반 폭락했다. 항공·관광 산업은 직격탄을 맞았으며 보험·재보험 업계의 손실도 심각했다. 미 연준은 금융시장의 혼란을 막기 위해 긴급 금리 인하와 유동성 공급에 나섰다. 국제유가는 급등락을 반복했고, 안전자산으로 몰린 투자금은 금과 미 국채 가격을 끌어올렸다.


장기적으로는 세계 경제 질서의 지형도 달라졌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에 돌입했지만, 막대한 전비 지출은 재정적자 확대와 유가 상승으로 이어졌다. 항공 보안, 금융 규제, 국토안보가 강화되었고, 글로벌 자본 흐름에는 ‘리스크 관리’라는 새로운 키워드가 자리 잡았다.


리먼 브라더스 파산

2008년 9월 14일 밤, 뉴욕 월가에서는 전례 없는 긴급 회의가 이어졌다. 미 재무부, 연준, 그리고 월가의 거대 은행들이 모여 리먼 브라더스 구제 방안을 논의했다. 베어스턴스와 패니 메이, 프레디 맥의 구제 이후 대형 개입이냐가 초점이었다. 하지만 재무부는 더 이상 공적 자금을 투입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바클레이즈·뱅크오브아메리카 등 잠재 인수자들도 끝내 발을 뺐다.


리먼 브라더스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158년 역사의 투자은행은 결국 다음 날인 9월 15일 법원에 파산보호(챕터11)를 신청한다. 부채 규모는 6천억 달러가 넘었고, 이는 미국 역사상 최대 기업 파산 기록이었다.


리먼의 몰락은 곧바로 금융시장의 공황으로 번졌다. 뉴욕 증시는 폭락했고, 글로벌 신용시장은 얼어붙었다. 단기자금 시장이 막히면서 기업 간 대출이 멈추자 국제 금융기관들은 연쇄적으로 흔들렸다. 유럽 금융권도 줄줄이 위기에 빠졌다. 미국 정부는 그제야 AIG를 구제하고 대규모 구제금융(TARP) 법안을 의회에 상정했지만 때는 늦었다. 2008년 가을, 월가에서 시작된 위기는 전 세계로 번지며 ‘대공황 이후 최악의 불황’이라 불린 글로벌 금융위기로 기록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