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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코타운 Jul 01. 2016

샹그릴라는 없었다(2): 아이들은 행복하다.

카무족 소수민족 마을을 찾아서...(2편)

비가 내린 탓인지 진흙으로 다진 길은 질척거렸다. 군데군데 물이 고여있어 오토바이로 지나기에는 위태로웠다. 속도를 내기는커녕 때때로 두발로 땅을 딛고 중심을 잡아야 겨우 웅덩이를 지날 수 있었다. 타이어가 미끄러질 때는 가슴이 설렁했다. 비틀거리면서도 절대 넘어지지 않는 청년들을 보면서 그들의 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하나의 마을이 지나면 하나의 개울이 나오고, 하나의 계곡을 지났다. 개울을 건널 땐 내려서 걸었고, 오르막을 오를 땐 타이어가 곧잘 헛돌아 뒤에서 밀었다. 내려서 걸을 땐 진흙이 신발에 묻어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찬 듯 무거웠다. 옷에 흙이 묻고 말고는 더 이상 관심거리도 아니었다.


쏨분의 가족들이 살고 있는 마을


그렇게 얼마를 갔을까. 산에는 나무가 베어져 있는 곳이 점점 더 많이 눈에 띄었다. 화전을 일구기 위해 봄부터 미리 나무를 베어 놓은 것이었다. 갈색으로 선명히 구분되는 그 자리는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불을 지르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자욱한 연기가 하늘을 뒤덮어 해를 가릴 것이다. 환경보호주의자에게 산불은 미세먼지와 생태계 파괴로 여겨지겠지만, 이들에게 그 연기는 풍년의 약속이다. 그 불길을 보며, 나무가 터지는 소리를 들으며 가족들을 배불리 먹이는 즐거운 상상을 할 것이다. 이미 많은 산은 불에 타 검게 변해 있었다. 우리가 이른 봄에 논을 갈 듯이 이곳 사람들은 3월부터 나무를 베고 불을 지른다.


여기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중국 윈난성의 홍토지는 사람들이 대대로 계단식 논을 만들어 농사를 지었지만, 이 사람들은 올해는 이산, 내년에는 저산으로 불을 지르며 옮겨 다닌다. 그래서인지 어떤 문화가 자랄 수 있는 안정적인 기반이 없다. 농사를 짓는 곳마다 원두막과 같은 집을 짓고 여름을 난다. 군데군데 버려진 원두막을 볼 수 있었다. 내가 찾는 샹그릴라는 가난 속에서 자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나 역시 이런 모양으로 여행을 했다. 


누군가는 깊은 산속에서 샹그릴라를 발견하기를 꿈꾸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런 아름다운 세상이 아직 남아있기를 꿈꿨다. 알록달록한 색실로 수놓은 전통 복장과 황금빛 장신구, 머리에 독특한 두건을 쓰고 있을 것 같은 그런 사람들을 만나기를 기대한다. 그렇지만 길을 가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이 산속에서 가장 실용적인 복장을 하고 있다. 70년대 새마을 운동복이 이렇지 않았을까. 그리고 손에는 중짜 크기의 다용도 칼(낫)을 들고 있다. 그들은 이 칼 한 자루로 산을 깎는다. 바리깡으로 머릴 깍듯이 한 자루의 칼로 이 모든 일을 해낸다.


얼마나 달렸을까. 내를 건너고 산을 넘고 넘어 드디어 산 능선까지 올랐다. 벌써 해는 뉘엿뉘엿 구릉에 걸려 있었다. 다시 쏨분에게 물었다. 정말 오늘 중으로 갈 수 있기는 하냐,라고. 쏨분은 이제는 다 왔다고 말하며 먼 산 능선에 있는 마을을 가리켰다. 정말 이제 끝이 보이는 듯했다. 산 능선에 오르자 다시 진흙길이 나타났다. 둘이서 오토바이를 타고 가기에는 너무 미끄러웠다. 나는 차라리 걸었다. 산 능선이라 경사도 없고 평탄한 길이 었다. 이런 정도면 트레킹 하면 딱 좋은데.... 


주변을 둘러보았다. 숲은 보이지 않았다. 몇 년 되지 않은 잡목들만 우거져 있었다. 사람들이 인공조림을 한 산에는 대부분 고무나무가 심겨져 있었다. 여기도 중국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졌다.


이런 마을을 수도 없이 지났다. 그중에는 마치 전통마을처럼 내 마음을 끄는 마을도 있었다.


길 중간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밖으로 나가는 쏨분의 친척을 만났다. 사실 이 동네는 이웃 모두 씨족사회로 구성되어 있다. 다 친척 형이고 아우였다. 단지 촌수가 가까우냐 뭐냐는 정도만 나뉜다. 쏨분과 그 친구들은 한동안 서서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천천히 바람을 맞으며 앞으로 나갔다.


쏨분의 마을로 들어가기 전에 마을의 친척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 마을은 대부분 친척들이다.


마을을  내려다 보이는 곳에 드디어 다다랐다. 루앙프라방에서 우돔사이를 넘어가는 경계에 위치한 남박(Nambak) 군 중에서도 제일 외진 곳에 위치한 마지막 마을이다. 관광지와는 전혀 다른 루앙프라방의 진짜 모습이었다. 


멀리서 아주머니 한분과 아이 셋이 나무를 해서 등짐을 지고 오는 게 보였다. 모두 여자다. 마대자루로 만든 사첼을 이마에 걸치고 메는 방식이었다. 그 사첼에는 땔감이 담겨져 있었다. 난방은 없으니 취사에 사용할 나무들이다. 우리 일행은 쏨분의 형이 사는 집으로 먼저 이동했다. 나는 그들이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들의 생활 모습을 좀 더 적나라하게 담고 싶었지만 그들과 나의 거리를 좁힐 만큼의 뻔뻔함은 없었다. 예의인지 이방인의 경계심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쭈삣뿌삣 그렇게 지나 보냈다. 이런 곳에서 일하는 어린이들 사진을 찍은 내 모습이 잔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 마을에서 역시 일을 하는 것은 여자 아이들이다. 자기 몸무게 만큼의 나무를 줏어 집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아이들은 역시 아이들이다. 그 여자 아이들은 마당에 나무자루를 팽개친 후 곧바로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같이 어울린다.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이 마을에는 골목길마다 아이들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학원도 없고 TV도 없이 그저 모두 나와서 같이 어울려 놀았다. 닭과 오리들도 친구처럼 같이 어울려 놀았다. 내 어릴 적과 한치도 다르지 않았다. 그땐 가난했지만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샹그릴라? 아이들은 어디에서나 즐겁다.


쏨분은 짐을 집 안에 들려 놓자마자 나에게 자기 어머님을 뵈러 가자고 했다. 이보다 더 윗마을에서 동물을 기르고 있는 곳으로. 원래 마을은 모두 그곳에 있었지만 십여 년 전 정부의 이주 권고에 따라 이곳으로 내려와 새롭게 정착을 했다. 그곳에는 아직도 재혼을 한 어머님이 살고 계시다.


여기가 하룻밤 묵은 집이다. 난방도 전기도 없다. 너무 추웠다. 나를 다시 문명세계로 데려다 줄 오토바이다.


가족사가 단순할 것 같지만 이곳도 꽤나 복잡했다. 어쨌든 다시 오토바이를 타고 더 깊은 곳으로 향했다. 저녁노을과 같이 산의 구릉을 다시 올랐다. 20-30분을 완만한 경사를 따라 오르자 조그마한 마을이 다시 나타났다. 마을이라기보다는 산채 같은 느낌이었다.


울타리가 쳐져있고 몇 채의 허술한 가옥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입구부터 10-20 cm 두께의 동물의 배설물로 뒤덮여서 마치 진흙탕 위를 걷는 것 같았다. 오토바이의 귀재들도 그곳만은 그냥 지나지 못했다. 도저히 발을 딛기 싫었지만 별수가 없었다. 물컹하는 느낌이 발을 타고 전해졌다. 울타리를 넘어가 굳은 땅에 발을 디디자 안도가 몰려왔다. 소, 돼지, 염소, 닭, 모든 가축들이 뒤엉켜 함께 살고 있었다. 물론 여기에 사람도 포함된다. 경계가 없는 듯했다. 이렇게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까. 마치 동화책 속의 나라에 온 느낌이었다.


울타리 안에 가정집이 있고 그 주변엔 돼지가 함께 기거한다. 음식물을 낭비하는 법은 없다.


몇 년 만에 모자 상봉이 이루어진다. 어머니는 먼길 온 아들을 생각하며 요기를 내왔다. 볕이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집에서 대바구니에서 식은 찹쌀밥과 아이들이 까고 있던 죽순이 오늘의 요리였다. 읍내에서 먹다 남은 닭고기 반찬도 꺼내졌다. 물론 난 죽순만 먹었다. 그을음이 무쇠솥 두께만큼이나 내려앉은 그 솥에서 계곡의 물로 쪄낸 죽순이지만 고구마 까먹듯 맛있게 먹었다. 사실 시장했지만 먹을 게 그것 밖에는 없었다. 


  

어두운 집 안에서 언니들은 죽순을 다듬고 있고, 동생은 앉아서 지켜보고 있다.


여기서도 아이들은 어려서 어른이 된다. 아직 초등학교 저학년처럼 보이는 아이들도 여기서는 자기 몫을 해야 한다. 난 그들이 해준 음식을 먹고 있다. 쭈삣쭈삣하면서...... 한참 동안이나 혼자서 저물어가는 해와 돼지가족들의 재롱을 봤다. 쏨분은 금의환향한 양 자신 있게 이야기를 끌어가는 듯했다.

  

울타리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는 그 돼지 가족들을 보고 있자니 좁은 우리에만 사는 우리나라 돼지들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돼지들의 삶의 질은 라오스가 확실히 높았다. 이것은 100% 확신할 수 있었다. 최소한 여기서 돼지들은 엄마 돼지와 아기돼지가 함께 살고 있다. 극성스럽게 새끼가 어미젖을 빨아도 어미돼지의 표정에서 행복이 지나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쏨분의 어머니가 살고 있는 마을. 동물과 사람이 함께 살아간다.


쏨분은 5만낍(7천원 정도)을 어머니에게 용돈으로 드린다. 짜식 너무 짜다 싶었다. 이 여행 비용도 모두 내가 댔는데 좀 더 쓰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그 돈도 이들에게는 무척 큰 금액일 것이다. 시내에서야 한 끼 밥값도 힘들지만 말이다. 나 역시 아이들에게 과자 값을 건넸다. 아마 그들에게는 무척 큰 돈일 것이다. 누구라도 여기에 오면 주머니를 털게 된다.


그러고 보면 이들의 소득에 비하면 물가는 살인적이다. 라오스가 평온해 보이는 것은 아마도 너무 가난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들이 일해서 살 수 있는 게 도대체 뭐가 있을까. 그러니 포기할 수밖에. 그냥 체념하고 사는 수밖에. 부자가 되려는 꿈은 이들에게는 사치다. 그저 올 한 해 굶지 않는 것만으로도 축복이다. 뭐가 더 필요할까.


집 앞마당에서 바라본 풍경. 호연지기가 생겨날까?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아쉬움은 뒤로 남긴 채. 어둠이 짙게 내려앉았고, 돼지 가족들의 모습은 어둠 속에 점점 더 희미해져 갔다. 언제나 그렇듯이 가족 간의 이별은 애틋함을 남긴다. 보지 않아도 그들의 감정이 내게도 전해지는 듯했다. 나에겐 동물들과 같이 살아가는 애들의 미래가 보이는 듯했다.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아갈까. 이방인의 값싼 동정이 일어나는 것을 막아보려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3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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