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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코타운 Jul 02. 2016

샹그릴라는 없었다(3): 꿈이 자랄 수 없는 땅

카무족 소수민족 마을을 찾아서...(3편)

전깃불 없이 산다는 것


밤이 되었다. 어둠이 찾아왔다. 주변을 둘러봐도 전등하나 보이지 않았다. 플래시 불빛이 산 위에서 움직이는 게 가끔 보일 뿐이었다. 어둠이 오자 마을은 정적에 휩싸였다. 놀던 아이들도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전깃불이 없는 세상이 어떤 세상일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물론 호롱불이나 석유등이 있는 것도 아니다. 집에는 손전등이 유일한 조명 수단이었다.


산마을의 아침


한 때는 이 마을에도 유럽의 NGO가 설치해 준 소규모 수력발전기가 있어서 잠시 전깃불이 들어온 적도 있었다. 물론 오래 지나지 않아 홍수가 났고 발전기는 망가진 후 수리 되지 않았다. 이 나라 사람들은 무엇이든 유지 관리하며 사용하지 않는다. 부서지면 누군가가 와서 새롭게 설치해주기를 기다린다. 산타클로스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이것은 비엔티안 시에서부터 이 산골까지 어디서나 동일하게 목격하는 현상이다. "당신은 도움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다. 


이른 아침에 비가 내리자 가족들이 모두 불가에 모여 앉아 있다


2층 침실에는 중간 정도에 간단한 칸막이가 부부의 침실과 거실을 나뉜다. 나는 이 거실에 해당하는 곳에서 다른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잘 것이다. 그전에 아래층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는 소리가 들렸다. 쏨분이 왔다고 주변의 친척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방에는 7-8명 되는 어른들이 모였다. 조명이 없어서 어두웠다. 손님들이 가지고 온 플래시 두 개가 조명의 전부였다.


쏨분의 고향 방문을 축하하다.


나는 내가 가져간 코펠에서 물을 끓인 후 시에라 컵 따른 후 커피믹스를 탔다. 이들의 눈에는 등산용 가스버너가 신세계처럼 느껴지는 모양이다. 모두가 눈이 동그랗게 쳐다본다. 커피 믹스를 주변 사람들에게 한잔씩 돌렸다. 처음에는 쑥스러워하는 눈치이다. 하지만 이내 서로가 한잔씩 먹었으면 하는 표정으로 바뀐다. 그렇지만 내가 가진 커피는 얼마 되지 않았다. 나는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게 어색한 시간이 흘러갔다. 한참이 지나서 식사가 들어왔다. 


'금이환양' 한 순분을 축하하기 위해 성대한 식사가 있을 것이란 기대가 조금은 있었다. 아마도 이들 기준에는 그랬을지 모른다. 식사는 역시나 바구니에 담긴 식은 찹쌀밥과 닭을 끓여낸 국물, 삶은 닭고기, 그리고 윗마을에서 먹었던 죽순이다. 식기 역시 변변한 게 없었다. 낡은 플라스틱 접시가 전부이다. 나는 내가 가져간 등산용 수저를 꺼냈다. 이 사람들은 젓가락을 능숙하게 쓰는 내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비가 내리자 추운지 모닥불을 피우고 있다. 집에는 난방이 안된다.


라오스에 오는 사람들이 모두 "쌀국수가 맛있어요"라는 여행 후기를 남긴다. 그렇지만 오리지널 라오스 사람들은 국수를 먹지 않았다. 찹쌀로는 국수를 만들 수가 없다. 국수는 비교적 최근에 베트남에서 들어왔다. 그래서 대부분 베트남 스타일의 쌀국수가 유명하다. 아마도 이 산골 사람들 대부분은 아직 쌀 국수를 맛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이것 때문인지 쌀국수가 맛있다는 여행객들을 보면 약간은 덜 라오스 스럽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자유로운 닭 두 마리가 유명을 달리하다.


외지에서 온 귀한 손님을 위해 오늘 밖에서 뛰어놀던 닭 두 마리는 유명을 달리했다. 사나운 닭은 사실 먹을게 별로 없다. 전부 뼈밖에 없다. 닭국물은 먹을 만하다. 예전의 플라스틱 가락국수 그릇 같은 곳에 담겨 나오는데 숟가락으로 같이 먹는다. 물론 젓가락은 사용하지 않고 나머지는 모두 손을 사용한다. 여기서는 여전히 손이 가장 중요한 식사 도구이다. 


마당에는 닭과 병아리가 함께 노닌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200 ml 짜리 플라스틱 병에 담긴 술이 나왔다. 여기서는 라오라오라고 부르기도 하고 카오 라오라고 하기도 한다. 두병의 술은 금세 바닥이 났다. 장정들에게 한두 잔이 겨우 돌아가는 수준이다. 나는 순분에게 맥주는 없는지를 물었다.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한상자를 사 오라면 돈을 건넸다. 잠시 후에 비어라오 한상자가 왔다. 모두들 신이난 표정이었다. 중간에서 쏨분이 잔에다가 따라주면 맥주를 돌렸다. 잔이 부족했기 때문에 잔은 계속 돌고 돌았다. 20병의 맥주는 금방 끝이 났다. 

어둠 속에서 쏨분과 그 친척들은 그간의 이야기를 나눴다. 짐작컨데 비엔티안이라는 도시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주 옛날 서울 다녀온 청년이 시골 어르신들에게 서울과 서울 사람들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설명하는 것처럼 들렸다. 쏨분은 자신의 성공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듯했다. 아마도 곧 공무원으로 발령 받을 자신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 했을 것이다.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지만 나는 자리를 깔고 누웠다. 침낭 속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벼를 심기 위해 산을 불태워 밭을 준비하고 있다.


새벽이 왔다. 잠을 깬 나는 발소리를 죽여가며 밖으로 나갔다. 어둠 속에서 가파른 계단을 찾아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밖은 새벽 여명으로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지만 집 안은 여전히 깜깜했다. 사람들이 아래층에도 자리를 펴고 잠을 자고 있었다. 아마도 여러 사람들이 이곳에서 머문 모양이었다. 새벽의 장엄한 광경은 아쉽게도 보기 어려웠다. 전날 밤부터 내린 비의 여운으로 온 마을이 축축하게 느껴졌다. 먼산 높은 붕우리에는 구름이 걸려있었고, 하늘은 온통 흐렸다. 한참을 밖을 서성이다 추위를 참지 못하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 침낭 속에 다시 들어갔다. 한참이 지났을까...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래층에서 들렸다. 나도 슬그머니 내려갔다. 이런~, 모두가 부엌의 불자리 주변에 모여 있는 게 아닌가. 새벽이 추웠던 것은 나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침이 되자 사람들은 마을에서 몇 개 없는 수도가로 모여들었다.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는다. 이런 광경은 라오스 농촌에서는 아주 흔한 광경이지만, 젊은 처자가 공동 수도에서 신을 두르고 샤워를 하는 장면은 좀 이국적으로 느껴졌다. 신을 가슴까지 올리고 공간을 만들면서 물을 몸속으로 끼어 얻는 동작은 매우 물결처럼 부드럽게 돌아 넘어갔다.


젓가락 질을 못하는 사람들


어떻게 그 먼길을 다시 돌아갈지 막막함이 몰려왔다. 어젯밤에 내린 비로 길이 더욱 미끄러울 터였다. 비가 계속 내리면 꼼짝없이 이곳에 더 머물러야만 한다. 진흙탕 길이 얼마나 위험할지 여기 사람들도 걱정이었다. 


단칸 구조로된 참 옹색한 집이다. 밤의 한기를 그대로 받는 구조이다.


그런 걱정은 뒤로하고 아침식사로 무엇을 내어 놓을지 기대가 되었다. 나는 냄비를 하나 빌려서 버너로 물을 끓이고 라면을 끓였다. 아마 이 사람들에게 이런 광경은 꽤나 신기하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파란 가스불을 보는 것도 신기하고, 연기가 없는 불꽃을 본다는 게 놀라운 광경이었을 것이다. 그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라오스의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여전히 숯을 쓰거나 나무를 취사에 사용한다. 심지도 비엔티안에서도. 그들도 라면을 좋아할까. 확실히 그런 것 같다. 그렇지만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잘 먹지를 못한다. 사실 도구가 없는 게 더 크게 작용했다. 뭉뚱 한 중국식 숟가락밖에 없으니 라면을 먹을 수가 없다. 다음에 가면 나무젓가락이라도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젓가락을 사용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 부분은 도회지 사람들과는 구분되는 점이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젓가락질을 그런대로 한다. 물론 국수를 먹는 모습을 보자면 우리나라 사람에 비해 몇 배는 시간이 더 걸린다. 


아침 식사는 어제의 식은 찹쌀밥과 남은 국물, 죽순이 다였다. 가난한 삶에 대해서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내가 기대했던 그 어떤 것도 없었다. 방송 카메라 속에만 존재하는 것을 기대한 내 자신이 다 쑥스러웠다.


축구공과 운동복 전달식


오늘 방문의 하이라이트가 남아 있다. 그런데 날씨가 수상하다. 쏨분은 초등학교에 가자고 청했다. 그의 친구들과 함께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초등학교로 향했다. 길은 질퍽거렸고 하늘은 금방 비를 뿌려도 이상할 게 없었다.


지금까지 초등학교로 사용된 대나무 교사이다.


초등학교에 도착하자 이미 많은 어린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미리 연락이 된 모양이었다. 초등학교는 새롭게 지어진 건물과 지금까지 사용하던 건물이 같이 있었다. 아직 정식 승인이 나지 않아서 새건물의 문은 잠겨있었고, 여전히 대나무 교사를 사용하고 있었다. 관료주의 사회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았다.


대나무로 지은 교사와 축구 골대


아이들을 모아 놓고 쏨분이 축구공과 하얀색 유니폼을 한벌씩 나눠 줬다. 아이들은 바로 옆에서 옷을 갈아 입고 공놀이를 시작했다. 나는 그런 광경이 어색해 자리를 피했지만 쏨분은 연신 아이들을 불러모아 놓고 사진을 찍는다. 이 친구 정치에 뜻이 있나, 이런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지만 그런 모양새는 오래가지 못했다. 같이 기념(?) 축구를 시작했지만 이내 빗줄기가 굵어졌다. 어쩔 수 없이 쏨분은 폼 잡는 일을 포기해야만 했다. 짜식, 선물은 내가 샀는데 폼은 네가 잡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애들에게 축구공과 운동복을 전달하는 중


새롭게 지은 교사 밑으로 비를 피해 있다가 빗줄기가 약해진 틈을 타 집으로 향했다. 아이들은 아마도 많이 신이 났을 것이다. 공 하나만 있어도 재미있게 놀 수 있을 때니. 그렇지만 주변에 구경하고 있는 여자 아이들을 위한 선물을 아무것도 사 오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 상황을 예상했다면 좀 더 세밀하게 준비를 했을 텐데...... 아쉬움이 들었다.


진흙 길을 걸어서 다시 문명의 세계로....


집에 돌아오자 모두를 길을 떠날 수 있을지 걱정을 했다. 길이 너무 위험하다는 게 중론이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이 길을 떠나야 했다. 다행히 11시가 가까워 오자 비는 그쳤다. 모든 마을 사람들이 다시 집 앞에 모였다. 거창한 환송식은 아니지만 떠나가는 쏨분을 배웅하기 위해 친척들이 모두 모였다. 나는 고마움의 표시로 50달러를 안주인(쏨분의 형수)에게 건넸다. 쏨분의 형수는 그게 돈인지를 잘 몰랐다. 달러는 아마 처음 봤을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시내에 가면 바꿀 수 있다고 하자 그제야 어색한 듯 웃음을 지었다. 사실 남박 군에는 은행이 없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돈을 바꿀지 나도 걱정이 되기는 했다.


집을 떠나기 전에 기념 촬영


내려가는 길은 미끄러워서 둘이서 오토바이를 타고 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내리막길은 줄곧 걸어내려갔다. 몇 시간을 그렇게 걸으며 또 뒷자리에 타면서 이동을 했다. 어제 지나온 마을을 하나씩 다시 지나갔다. 오토바이를 타는 손에는 어제보다는 더 적은 힘이 들어갔다. 그 사이에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어제 잠시 머물렀던 오토바이 주인들이 사는 마을로 들어섰다. 그곳에서 오토바이의 기름을 채웠다. 대개 마을 주유소는 1리터짜리 병에 휘발유를 담아서 판매를 한다. 한병씩을 각각의 오토바이에 주유를 했다.


그때 온 동네 사람들이 또 모여들었다. 이번에는 소문이 제대로 났는지 정말로 모든 마을 사람들이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내가 정말 이 사람들과 다른 것일까, 아니면 어제 나눠준 신기한 과자의 효과일까? 쏨분에게 물어보기엔 내가 너무 피곤했다.


이 글을 다시 4시간 가량 나가면 버스를 탈 수 있다.


마을을 떠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신작로가 나왔다. 그리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포장된 도로가 나왔다. 다시금 문명의 세계, 사실 여기도 여전히 시골이긴 하지만, 로 나왔다는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중간에 쏨분이 타고가는 오토바이에서 기름이 떨어졌다. 기름을 넣을 곳을 찾지 못해 잠시 헤메더니, 호스를 이용해서 다른 오토바이의 기름을 조금 옮겨서 주유소까지 겨우 갈 수 있었다. 주유통을 가득 채우면 3천 원 정도가 들어가는데 이 친구들은 대개는 그 반 정도만 넣는다. 항상 돈이 문제이다. 그래서 길거리를 가다 보면 기름이 떨어져 끌고 가는 오토바이를 종좀 마주친다. 아슬아슬하게들 살아간다.


쏨분은 길 중간에서 마을 사람들을 만나면 잠시 안부를 나눈다


 버스정류장 마을에 도착한 후 우리를 태워준 친구들을 위해 주유소에서 기름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수고비로 얼마를 또 건넸다. 물론 라오스에서는 절대 사양하는 법은 없다. 오토바이를 태워준 친구들과는 작별 인사를 했다. 아마 이 친구들이 돌아갈 때는 애들 먹을 것이라도 좀 사서 집으로 가려나. 아마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루앙프라방까지 가는 버스는 좀 전에 떠났다. 하루에 몇대 밖에 없는 버스를 방금 놓쳤다. 이젠 쏭테오를 이용하는 방법밖에 없다. 오후 세시가 좀 넘어서자 쏭테오가 도착했다. 보기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지만 트럭 뒤에서 타고 가는 것은 여간 곤역이 아니다. 특히나 3시간 넘게 타고 가자면 매연과 바람 때문에 힘들다. 그렇게 완행버스 같은 송테오를 타고 4시간을 달렸다. 


루앙프라방에서는 VIP 버스를 예약했다. 다시 짐을 싣느라 기다리기가 겁이 났기 때문이다. 물론 일반버스와 가격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우리 기준에서는...


때로는 그림같은 마을을 만나기도 한다. 물가라 위험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버스를 예약 후  툭툭 이를 타고 시내에 저녁을 먹으러 갔다. 물론 약간의 바가지는 피할 수 없다. 바로 코앞의 거리지만 거의 4만낍, 5천 원을 받는다. 라오스 친구가 있어도 대책이 없다. 수많은 실랑이를 하고 여러 차를 고르면 좀 더 싸게 할 수는 있지만 외국인이 봉이 되지 않기는 힘들다. 도대체 얼마나 더 봉 노릇을 해야 이 여행이 끝이 날까. 화가 났다. 아마도 이런 나의 표정이 쏨분에게도 그대로 전달되었을 것이다. 


다행히 돌아오는 버스는 제 시간에 비엔티안에 도착했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에 버스정류장에 도착하자, 쏭테오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쏭테오들은 자리가 가득 찰 때까지 떠나지 않는다. 외국 사람이 보이면 무조건 가서 물어본다. "비엔티안?" 화가 난 서양 승객이 그만 가자고 소리친다. 라오스 사람들과 다른 반응이다. 순간 주변의 많은 승객들이 박수를 친다. 아마도 쾌감 같은 것을 느껴서 인가보다. 나는 불만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가 얼마나 고마운 건지 그때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개울물에서 청태를 걷어서 우리나라의 미역과도 같은 것을 만든다.


나의 샹그릴라?


나의 긴 여행은 이렇게 끝이 났다. 체력적으로 힘이 들기는 했다. 쏭테오와 오토바이를 몇 시간씩 타는 일은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다. 이제야 그때의 일을 회상할 수 있을 만큼 내상도 크게 입었다. 물론 좋은 일을 위해서 이긴 했지만 단 이틀의 여행을 위해 리조트에서 일주일간 묶을 정도의 경비를 사용하고, 고생은 고생데로 신나게 했다. 그런 여행을 다시 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 추수철이 되면 다시 한번 방문하고 싶어 진다. 찢어지게 가난한 그 동네를. 그때의 경험을 살려서 이번에는 여자 아이들의 선물을 준비하고 싶다. 정말 일만 하는 그 아이들을 위해 잠시나마 자그마한 기쁨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 역시 보람 있는 일이 아닐까? 그리고 가능하면 버스가 아니라 차를 빌려서 갈 것이다. 그러면 좀 더 수월하게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좀 더 많은 선물을 가지고 갈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떠날 때도 애들은 멀리서 온 외국인 구경을 나왔다.


언젠가는 이 여행이 다시 그리워 질지도 모르겠다. 그 산 정상에 사는 사람들을 다시 만나고 싶어 질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맑은 하늘과 아름다운 저녁 노을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조금의 낭만이라도 느낄 수 있게.


나는 무엇을 보고 싶었던 것일까. 무엇을 위해서 그 먼길을 달려간 것일까. 지금도 그때를 가끔 떠올린다. 지치고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가보지 않은 세계를 가보고, 신기한 문화도 체험하고 싶었을 것 같다. 자랑질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정말 아무 것도 없었다. 음식도, 복식도, 문화도 없었다. 가난과 안타까움만 있었다. 자연을 파괴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가족들이 있었다. 


내가 찾는 샹그릴라는 없었다. (다시 1편으로)

매거진의 이전글 샹그릴라는 없었다(2): 아이들은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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