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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림 May 06. 2020

다운증후군 아이가 열어준 새로운 세상 6

[민들레] 부모일기


가장 보통의 육아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둘째 수유를 하고 아침식사와 첫째 도시락을 준비한다. 첫째를 어린이집에 등원시킨 뒤 집으로 돌아오며 현관문 손잡이에 걸린 가방에서 새벽에 배송된 이유식을 꺼낸다. 전자레인지에 30초 돌려서 둘째에게 먹이고 부랴부랴 짐을 챙겨 물리치료를 받으러 간다. 주 2회의 물리치료 외에도 종합병원 여덟 과에 주기적으로 검사와 진료를 받으러 다니기 때문에 달력이 병원 일정으로 빼곡하다. 저녁엔 밥만 겨우 해서 사온 반찬들로 때우기 일쑤다. 남편의 갑작스런 해외발령으로 매일 혼자 둘을 돌보다 보니 말을 알아듣는 첫째는 하염없이 엄마를 기다린다. 미안함에 주말엔 첫째를 데리고 문화센터로, 키즈카페로 돌아다니고 종종 마트에서 캐릭터 장난감을 사다 안긴다. 몸이 아파 도저히 저녁을 차릴 수 없던 어느 저녁에는 아이 둘을 집에 두고 죽을 사러 나가느라 뽀로로 동영상을 틀어주기도 했다.


아이 둘을 키우는 일은 하나 키울 때 수고의 두 배가 아니라 제곱이 필요했다. 남편이 한국에 있을 때에도 일찍 퇴근 하는 날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지만 해외발령 후에는 그 도움마저 없어 첫째가 하원한 저녁 시간엔 신경이 잔뜩 곤두섰다. 둘째 병원을 쫓아다니느라 내 몸 역시 성한 곳이 없었다. 도망가고 싶지만 도망갈 수는 없어서 육아 원칙을 하나씩 내려놓기 시작했다. 5년 만에 처음으로 남들 다 하는 ‘보통의 육아’를 하게 됐다.


자타공인 유난스럽게 아이를 키우다가 스스로 세운 육아 원칙을 내려놓기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근무기력증이 있는 둘째는 움직이기를 싫어해서 물리치료를 받는 동안 고개를 떨구고 울기만 하는데, 동요가 나오고 캐릭터들이 빙빙 돌고 불빛까지 번쩍이는 장난감을 가까이 대자 호기심에 팔로 몸을 지탱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간의 육아관에 따르면 절대 아이에게 주지 않을 장난감이지만 둘째가 반응하는 것을 보니 도리가 없었다. 치료가 끝나자마자 베이비페어로 달려가 현란한 장난감들을 잔뜩 사오며 엉엉 울었다.


몸으로 신나게 놀아주던 아빠가 없어 심심한 첫째를 달래주기 위해 문화센터에 처음 등록할 때도, 키즈카페 입장권을 살 때도 심란했다. 그런 곳 안 가도 육아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던 과거가 떠올라 씁쓸했다. 자연주의육아 한다더니 손목이 아파서 찬바람 분 뒤론 천기저귀는 서랍에 처박아 두고 일회용 기저귀만 쓰고 있다. 미디어는 절대 차단한다고 집에 TV도 없다고 자랑하던 나였지만 죽을 사러 나기기 위해 아이를 컴퓨터 앞에 데려가 영상을 틀어주었다.


가장 큰 절망은 배달 이유식을 시키게 된 일이었다. 첫째는 알레르기가 심해서 채식 위주로 키웠고 나도 자연스레 채식을 한 지 4년쯤 되었다. 첫째는 채식을 해도 건강히 잘 클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표본 같은 아이다. 키와 몸무게는 항상 또래 중 상위권이었고 잔병치레도 거의 없었다. 둘째의 이유식도 철분이 많이 들어있다는 시금치, 호박, 브로콜리 등의 채소로 열심히 해 먹였지만 정기검진 혈액검사 결과 빈혈이 심한 것으로 나와 철분제를 처방받았다. 고기를 열심히 먹이라는 충고도 들었다. 철분 함량이 높은 씨앗, 견과류, 곡식, 녹색 채소들이 많이 있지만 아직 어린 둘째에게 먹일 수 있는 재료가 한정적이고 수술을 앞두고 있어서 천천히 수치가 오르길 기다릴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채식을 한 지 오래되어 고기 냄새만 맡아도 역하기 때문에 내가 직접 조리를 할 수도 없었다. 주변 엄마들에게 물어 시판 이유식을 검색해보고 처음으로 주문을 했다. 발도르프육아를 할 수 없는 것도 슬펐는데 채식조차 내 뜻대로 안 되니 절망감이 컸다. 그런데 막상 아침에 배달된 이유식을 데워 먹이니 정말 편했다. 직접 만들어준 걸 더 잘 먹어서 시판과 병행하고 있지만 전보다는 훨씬 수월해졌다.


정성들여 집밥을 해 먹이고 뜨개질로 놀잇감을 떠주고 인형을 바느질해주며 산으로 들로 나가서 아이들을 놀릴 수 있으면 좋겠지만, 도시의 아파트에서 이웃도 남편도 없이 아이 둘을 키우면서 병원까지 다니는 지금 나에게는 그런 에너지가 없다. 막상 보통의 육아를 해보니 깨닫게 된 점이 있다. 첫째는 키즈카페에서 방방 뛰며 즐거워했고 둘째는 장난감을 보며 꺄르르 웃었으며 내 몸은 조금 편해졌다. 장난감도, 키즈카페도, 배달 이유식도, 영상물도 무엇 하나 ‘악’이 아니었다. 실패도 아니었다. 육아는 아이를 돌보아 잘 크도록 돕는 것이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주의나 신념을 추구하는 수단이 아니다. 보통의 육아를 틀렸다고, 나쁘다고 생각했던 나는 얼마나 오만했던가. 아이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이지만 좋은 것이 무엇인지는 각자의 생각과 상황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정말 나쁜 것은 엄마에게 죄책감을 주입하는 구조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디어와 육아서에서 끊임없이 엄마의 역할을 강조하며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가르친다. 그런데 육아 멘토 오은영 박사가, 발도르프교육을 세운 슈타이너 박사가 온다 한들 내 자리에서 자신들의 철학을 실천할 수 있을까? 일주일도 안 되어 두 손 두 발 다 들고 포기할지도 모른다. 이제야 보통의 육아도 합리적인 방법이며, 함부로 다른 양육자의 육아방식을 판단하거나 평가할 수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함께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끼리 서로를 응원하고, 가능하다면 서로 돕는 것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할까.




제도 안에 받아들여진다는 안정감

저녁에도 주말에도 쉴 수가 없어 힘들어 하던 내게 지인이 시간제 보육서비스를 소개해줬다. 가정 보육 중인 6~36개월 사이 영아를 시간 단위로 육아종합지원센터나 국공립 어린이집 시간제 보육실에 맡길 수 있도록 한 정부 정책이다. 본인 부담금이 시간당 천원밖에 되지 않아 급한 일이 있을 때 부담 없이 이용할 수 있지만 첫째는 아기 때 워낙 ‘엄마 껌딱지’였기에 서비스의 존재 자체를 몰랐다. 다운증후군을 갖고 태어난 둘째는 인지 능력이 부족해서인지 유독 순해서인지 낯을 가리지 않는다. 가까운 시립 어린이집에 시간제 보육실이 있어 시험 삼아 한 시간 맡겨보았는데 울지도 않고 잘 놀았다고 해서 그 후로는 가끔 이용 중이다. 두 시간 동안 둘째를 맡기면 잠깐 헬스장에 가서 운동하거나 카페에서 홀로 커피 한잔 하며 책 읽는 정도가 다이지만 독박육아 중인 내게는 그나마도 가뭄의 단비였다.


잠시나마 한숨 돌릴 수 있는 것도 큰 장점이지만 둘째와 내가 이 사회에, 지역 공동체에 받아들여지는 수용의 경험을 한 것도 좋은 점이었다. 시간제 보육은 정부에서 운영하는 보육 포털 사이트에 가입해서 예약하면 되는데, 아이의 장애 여부를 묻는 항목이 없다. 첫날 시간제 보육 담당 교사에게 이용 안내를 받을 때도 아이가 발달이 느리다고 설명했지만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받아주었다. 부모협동조합으로 운영되는 공동육아 어린이집에서 알레르기가 있다는 이유로 첫째의 입학을 거부당한 경험이 있는 데다 다운증후군을 가진 아이를 꺼리는 기관이 있다는 경험담을 많이 들었기에 시간제 보육 어린이집의 태도와 이 제도가 더 감사하게 느껴졌다. 제도권 내에 받아들여진다는 게 이렇게 안전과 안정 욕구를 충족해줄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첫째는 네 살, 38개월에 어린이집을 가기 시작했다. 3년은 엄마가 키워야 좋다는 육아전문가들의 조언 탓에 독박육아로 힘들어서 머리를 다 쥐어뜯으면서도 기관에 보내지 않고 버텼다. 그때는 어린이집에 보내면 뉴스에 나오는 것처럼 학대를 당하거나 애착에 문제가 생기는 줄 알았다. 내 품 밖을 다 악으로 규정한 셈이다. 자아 충만하여 날뛰는 아이와 싸우는 나에게 주변에서 “그렇게 애한테 화를 낼 바엔 아무데나 보내라”고 충고하곤 했지만 가까운 가정 어린이집, 국공립 어린이집은 내 성에 차지 않았다. 기관을 선택할 때도 매우 고심해서 골랐다. 마음에 두고 있던 공동육아어린이집에서 거절당한 후 산이 가까운 발도르프어린이집을 찾아 이사까지 강행해 지금의 기관을 택했다.


지금 사는 지역에는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초·중·고등학교가 다 있어 아이를 키우기 좋은 환경이다. 그런데도 나는 공교육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첫째를 대안학교에 보내고 싶어 한 번 더 이사할 계획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둘째를 낳고 첫째를 보내고 싶었던 대안학교 홈페이지를 다시 살펴보았다. ‘인지학’을 바탕으로 인간 본성과 발달 단계에 맞는 교육을 표방하는 발도르프학교의 소개 페이지에는 장애를 가진 학생과 통합교육을 하지 않는다고 적혀 있었다. 입시 위주의 공교육을 벗어나 아이를 존중하는 교육을 펼치겠다는 대안학교에서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이유로 장애 학생을 배제하는 아이러니가 벌어지고 있었다. 적어도 공교육에서는 에둘러 다른 특수학교를 권하는 경우가 있을지언정 장애학생의 입학을 거부할 수는 없다. 장애인차별금지법에 저촉되기 때문이다. 둘째를 낳지 않았다면 대안학교의 민낯을 보지 못한 채 계속 선망했을지도 모른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되지 못할 정도로 우리 사회에 아직 차별이 만연하고 유치원과 학교에 특수반이 터무니없이 부족한 실정이지만 시간제 보육을 이용하며 지금의 법과 제도 안에서 보호받는 느낌을 받았다. 앞서서 목소리를 낸 장애인, 장애아 부모, 활동가들의 노력의 산물임에 감사했다. 그렇기에 앞으로 내가 이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제도권 밖의 대안교육에 환상을 품고 있던 첫째의 엄마와, 내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함께 돌봄을 받는 것만으로 감사해하는 둘째의 엄마 모두 나라는 동일인물이다. 같은 내가 맞나 싶을 만큼 만나는 세상의 격차가 크다. 앞으로 첫째를 키우면서 입시위주 교육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동시에 둘째의 의무교육을 받을 권리를 지켜주기란 어려운 일이겠지만, 양 극단을 넘나드는 경험을 통해 내 세계가 확장되고 깊어질 거란 생각도 든다.



아이가 열어준 넓은 세상

느리게 크는 아이를 키우는 것은 절망과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드는 일이다. 길 가다 둘째와 비슷한 월령의,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있는 아이를 보면 부럽다 못해 미운 감정까지 든다. 축구복을 입고 공을 차는 아이들 무리를 보면 내 아들은 축구를 못할지도 모른다는 앞선 슬픔에 울컥한다. 수많은 검사 결과에 일희일비하게 되고 면역력이 약해 감기에 자주 걸리는 것도 안쓰럽다.


그러나 느린 만큼 작은 성취에도 크게 기뻐할 수 있다. 다리에 힘이 없던 아이가 발로 몸을 지지하며 엉덩이를 들썩일 때, 누나가 오는 소리가 들리면 양손을 모아 박수치며 반기는 걸 볼 때, 물리치료가 싫다고 앙앙 울 때, 끝나고 내 품에 안기자마자 방긋 웃을 때, 아는 동요가 나오면 고개를 앞뒤로 흔들며 좋아하는 걸 볼 때, 내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 배시시 웃어줄 때 행복하다. 아무런 성취를 하지 않아도 먹고 자고 싸고 살아 숨 쉬는 매순간, 아이는 존재만으로 더할 수 없을 만큼의 기쁨을 준다. 장애가 있다고 그 삶에 행복이 적은 게 결코 아니라는 걸 아이는 매일 알려준다.


다운증후군을 가진 둘째와 만난 후, 매우 고통스럽지만 그 과정에서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전보다 더 많은 사람에게 공감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둘째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높은 성벽을 쌓고 그 안에서 내 육아만 옳다고 외치며 온 세상을 소외시켰을지도 모른다. 이제 나는 쇼핑몰 안의 ‘문센’에 들렀다가 아이와 식당에서 밥을 사 먹으며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보여주는 엄마를 보며 혀를 끌끌 차는 대신 그의 고된 하루에 진심으로 응원의 마음을 보낸다.


둘째를 통해 의료진, 치료사, 장애아의 엄마들, 시간제 보육실 교사진 등 새로운 인연을 많이 만나고 있다. 장애가 있는 아이를 키우는 게 처음이라 궁금한 게 많아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선뜻 말을 걸게 된다. 병원이나 치료실에서 만난 엄마들과 정보를 주고받는 데도 거리낌이 없다. 첫째를 키울 때 아이가 예쁘다고 쓰다듬는 사람에게 “왜 아이를 만지냐”고 쏘아붙였지만 둘째를 만난 후 세상을 향해 더 열린 마음을 갖게 됐다.


첫째를 키울 때 나는 이 험한 세상으로부터 아이를 어떻게 하면 보호할지 고민했다. 둘째를 키우면서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되었고, 일상에 감사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다. 첫째를 키울 때는 아이 손을 잡고 산으로 들로 전국 방방곡곡으로 돌아다니던 씩씩한 엄마였지만, 둘을 키우는 지금은 집에서 일상을 돌보는 것만으로 지치고 힘들어서 주변에 손을 더 많이 내밀어 도움을 청하고 있다. 나는 전보다 많이 아프고 허술해졌지만, 겸손해졌고 솔직해졌고 느긋해졌다. 일 년 동안 둘째가 열어준 세상은 혼란스럽지만 아름답다. 그 세상에서 나는, 우리는 흔들리면서 피고 자랄 것이다.


민들레 2020년 1~2월호 127호에 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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