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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림 Aug 14. 2024

몸 쓰기 = 돈 쓰기

[울림의 몸 이야기]

어릴 때는 내가 있는 곳이 곧 놀이터였다. 집안에선 실내 놀이를, 밖에선 더 활동적인 놀이를 했다. 내 움직임이 어떻게 보일지 신경 쓰지 않았다. 느껴지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몸을 쓰면서 놀았다. 소리를 지르고 뜀박질을 하고 춤을 췄다. 높은  곳에  오르고 철봉에 매달리고 뛰어내렸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공개된 장소에서는 마음껏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달리기는 지각 일보 전이나 쉬는 시간에 매점 갈 때나 체육 시간에만, 소리 지르기는 체육대회 응원 때나, 큰소리로 노래하고 춤추는 건 노래방에서나 할 수 있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사회화가 된다는 건, 특정 장소에서 해도 되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알아차리고 따르는 과정을 말하는 것 같다. 언젠가부터 마음대로 몸을 쓰고 소리를 내려면 돈을 내야 했다.


학생으로서 몸을 쓰기 위해 돈을 쓴 첫 장소는 노래방이었다. 중학교 때는 노래방이 유해시설로 여겨져서 몰래 다녔다. 학교에서는 노래방에 갔다가 걸리면 징계를 받을 줄 알라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그런 말에 겁먹지는 않았다. 고등학교에 갈 무렵에는 청소년의 노래방 출입이 허용되면서 시설도 깨끗하게 바뀌었다. 생일이면 롯데월드 자유이용권이 반값이라 롯데월드에 갔다가 노래방을 가는 게 친구들과의 의례였다. 소풍이나 수련회, 사생대회 등이 끝나도 노래방에 갔다. 동아리 대면식 때, 축제 뒤풀이도 노래방에서 했다. 교실이나 운동장에서는 마음껏 소리를 낼 수 없고, 사방이 막힌 작은 방 안에서 마이크를 잡고서야 소리를 지를 수 있다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춤을 좋아해서 집에서 녹화해 둔 가요 프로그램 비디오를 돌려보며 춤 연습을 했다. 쉬는 시간, 점심시간에 교실 뒤에서 친구들과 맞춰보며 수학여행 장기자랑을 준비했다. 대학에서는 율동패에서 실컷 춤췄다. 그런데 학교를 졸업하고 나니 춤을 추고 싶어도 아무 데서나 출 수가 없었다. 친구와 번화가 나이트에 가면 밤 9시 전까지 여성은 무료입장이었다. 왜 무료로 맥주 한 병과 기본 안주를 제공할까. 룸을 잡고 비싼 술을 시키는 남성 손님과 ‘즉석만남’을 시키기 위해서다. 웨이터에게 손목 잡혀 부킹을 가는 것도 싫었지만, 웨이터가 친구 손목만 잡고 나는 가만 냅두면 그것도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춤추는 건 재밌지만 부킹은 싫었다. 웨이터랑 싸우기도 지겨워서 나이트는 몇 번 가본 게 다였다. 


나이트가 시들해질 무렵 클럽이 인기를 얻기 시작했는데 웨이터가 없다 뿐이지 즉석만남이 수시로 이뤄지는 곳이었다. 아무나 몸을 들이대 ‘부비부비’하거나 손목 잡는 게 싫어서 남자친구와 친구들 여럿이 두어 번 가본 게 전부다. 춤 추러 클럽 오는 사람이 어딨어, 다 원나잇 하려고 오는 거지, 라는 게 당시 분위기였다. 그래서 클럽도 별로 당기지 않았다. 


20대 이후로는 춤을 배우고 싶으면 가요 프로그램을 녹화하는 대신 댄스 학원으로 갔다. 방송 댄스는 가수 따라하고 싶은 게 빤하게 드러나니 좀 더 있어보이는 이름의 재즈댄스반에 등록했다. 사실은 댄스 가수의 춤을 더 배우고 싶었는데도, 재즈댄스가 뭔지도 모르는데도 그런 선택을 했다. 배워보니 동네 학원의 재즈댄스는 강사의 안무를 따라하면 되는 거였고 제법 재미있었다. 댄스화를 사고 몸에 붙는 트레이닝복을 입고 커다란 거울과 나무 마루바닥이 있는 학원에서 땀을 흘렸다.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건 물론 즐거운 일이지만 안무를 배워서 그대로 따라 하는 정형화된 움직임이 주는 답답함도 있었다. 


마음껏 소리 지르고 노래하고 춤까지 출 수 있는 곳은 공연장이었다. 어두운 콘서트장에서는 무슨 짓을 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서태지 공연을 열심히 다녔다. 20대가 된 후로 오래 대기해야 하는 음악 프로그램 공개 방송은 가지 않게 되었다. 대신 돈을 내고 확실하게, 오랜 시간 좋아하는 아티스트를 볼 수 있는 콘서트에 다녔다. 슬램을 하고 헤드뱅잉을 하고 방방 뛰고 소리를 마구 질러도 되는 유일한 곳이었다. 서태지가 록 음악으로 컴백을 해줘서 가능한 일이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계약직으로 돈을 벌어서 서태지 콘서트에 갔다. 회사에서 밤을 새고도 지하철에서 졸다가 공연장에 가서 뛰었다. 티켓값이 비쌌지만 그만한 값어치가 있었다. 


록페스티벌도 좋아했다. 직장인이 된 후로는 여름휴가를 록페스티벌 날짜에 맞춰서 잡았다. 캠핑을 하면서 3일 동안 음악과 맥주에 흠뻑 취했다가 일상으로 돌아오곤 했다. 상술이 너무 심하다고 록페스티벌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의 공연을 몰아서 볼 수 있다는 즐거움이 내게는 더 컸다. 록페는 신기한 곳이다. 그 안에 팔찌를 차고 들어서는 순간 다른 세상으로 순간이동 한 것처럼 갑자기 모두가 자유로운 영혼이 된다. 화장실 줄을 서서도, 푸드코트에서 차례를 기다리면서도 음악에 맞춰 둠칫 두둠칫 몸을 흔든다. 옆 돗자리 일행들과 갑자기 술과 안주를 나눠 먹기도 하고 스탠딩 구역에서 신나게 헤드뱅잉을 하다 모르는 사람에게 물을 좀 뿌려달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낙원에 오기라도 한 듯한 경계적 체험은 수십만 원을 썼기에 가능했다.     


결혼을 앞두고 살을 뺄 때는 공원을 뛰기도 하고 계단도 올랐지만 집 앞 요가 학원도 열심히 다녔다. 운동도 돈 내고 했다. 집에서 옥주현 요가 비디오를 보고 따라하기도 했지만 유튜브가 없던 시절, 요가 비디오는 당연히 돈 주고 산 제품이었다. 24시간 운영하는 헬스장도 다닌 적이 있다. 집 근처에 공원이 있었지만 세상이 흉흉하다 보니 밤에 혼자 운동하기엔 불안했다. 차라리 직원도 있고 CCTV도 있고 밝게 불이 켜진 헬스장이 더 안전하게 느껴져서 돈을 안겼다. 물론 몇 번 가지는 않았다.


산악회 활동도 했지만 산까지 이동하려면 교통비와 등산 장비가 필요했다. 운동화 신고 갔다가 하산할 때 미끄러진 후 좋은 등산화도 샀다. 면티 입고 하루 종일 산행을 하니 땀 냄새가 나서 기능성 등산복을 사 입었다. 스판기가 있어서 잘 늘어나는 등산 바지가 활동하기에 편했다. 물통 넣을 포켓이 따로 있고 가볍고 어깨가 편한 등산용 가방도 구매했다. 


‘사치품’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소비를 많이 하지 않는다고 뻐기며 살았지만, 돌이켜 보면 단지 몸을 움직이기 위해서, 원하는 만큼 춤추고 노래하기 위해서, 경치 멋진 곳에서 깨끗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서 엄청나게 소비를 했다. 성인이 된 이후 몸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늘 돈이 들었다. 집에서 홈트 하면 되지 않냐고 하겠지만, 운동할 만큼 넓은 공간이 있는 집에서 사는 것도 비싼 주거 비용을 필요로 한다. 안전하게 걸을 수 있는 공원이나 산책로가 있는 지역에서 사는 것도 마찬가지다. 


아이를 낳고 나서 좋은 점은 아이랑 놀아주면서 어른도 신나게 몸을 쓸 수 있다는 점이다. 애랑 나가서 산책할 때는 가끔 이상한 춤을 춰서 웃겨주기도 하고, 갑자기 어느 색깔 블럭만 밟기로 정하고 뒤뚱뒤뚱 걸으며 게임을 하기도 하고, 어디까지 누가 먼저 도착하나 내기하며 뜀박질을 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다 큰 어른 혼자, 혹은 어른끼리만 그렇게 놀면 철 없다고 손가락질 받겠지만 아이가 한 명이라도 끼면 우스꽝스런 행동을 해도 괜찮다. 나와 남편은 공원에서 비누방울을 불면서, 캐치볼을 하면서, 연을 날리면서, 아이보다 더 신나게 열중해서 뛰어논다. 애는 금방 싫증을 내며 다른 놀이를 할 때 우리가 더 불붙어서 게임을 할 때도 많다. 육중해진 몸으로 타는 놀이터 미끄럼틀이 얼마나 스릴 있는지! 아이가 없었다면 감히 시도도 하지 않았을 일이다. 


다시 돈 쓰지 않고 자유롭게 몸 놀이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줘서 아이에게 고맙다. 그런데 아이가 없을 때도 마음껏 몸을 움직이고 소리치고 노래하고 춤출 수 있는, 돈을 내지 않아도 되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 남성들은 조기 축구회, 사회인 야구 동호회 등에서 그런 욕구를 풀겠지만 여성에게는 그런 기회가 많지 않다. 빨리 걷기 말고 좀 더 재밌는 몸 쓰기를 어떻게 하면 큰돈 들이지 않고 할 수 있을까. 돈 쓰지 않고 몸 쓰기를 궁리해 봐야겠다.  




출처 구글 이미지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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