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가을
면접일은 가을이라기엔 제법 추운 날이었다.
난 전날 밤까지 파리바게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새벽에 눈을 뜨니 음습한 한기에 이까지 딱딱 부딪힐 정도였다.
가난한 취준생에게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10만원도 안되는 면접용 정장에 걸칠만한 옷이 없어 싸구려 후리스를 걸쳤고, 점심으로는 어제 매장에서 가져온 유통기한 지난 빵을 하나 챙겨 갔다. 이미 온갖 면접이란 면접에 이골이 난 나로서 이번 면접도 그냥 또 하나의 면접일 뿐이었고, 하루가 빨리 끝나기만을 바랬다. 물론 붙었으면 좋겠고.
다른 면접 장소에서 남자들은 그래도 운동도 제법 한 것 같고, 수트빨에 힘입어 다들 꽤나 훈훈해보였다.그 중 누구나하고 사귀라고 해도 사귈 수 있을 정도라면 과장이지만 내가 상상하던 각잡힌 회사원들 이미지에 가까웠고 '나도 드디어 뼈를 묻고 이런 친구들과 사회생활을 하겠구만 호호' 생각하며 절로 어깨뽕이 차올랐다.
이번 면접은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왜냐? 공무원 시험이었으니까.
일반 취준생들과 달리 몇년간 책과 인강에 파묻혀 세상과 단절된 공시생들의 오합지졸이란. 뭔가 차분히 정돈된 이전 면접들과는 달리 다들 뭔가 나사가 하나 빠진 것처럼 부산스러운 것도 내 혼을 쏙 빼놓았는데, 수트빨은 고사하고 내 앞의 남자가 게시판을 확인한답시고 상체를 길게 빼자 바지에서 튀어나온 흰 면팬티, 하아.
그거다. 그 장면이 바로 '공시생'이라는 카테고리를 대표할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우리 할아버지도 안 입을 것 같은 헐렁한 흰 면팬티..
팬티뿐만 아니라, 몇년간 제대로 놀아보지도 못한 창백하고 병약한 사람들. BB크림을 바르고 딱 맞는 수트까지 입은 훈훈한 남자들이 아닌, 아빠 옷을 대충 입고 온 것 같은 회색 얼굴의 남자들. 남녀를 불문하고 참새처럼 마르거나 먹는 걸로 스트레스를 풀었거나, 운동이라고는 핑크아령도 한 번 안들어봤을 볼펜잡이들의 얇은 손목...
노량진역에 내리면 느껴지는 그 찝찝함과 공기 중의 패배감을 이들이 그대로 옮겨온 듯 했다.
그렇다고 내가 그들보다 뭐 잘나서 이렇게 이죽거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아우라가 안 좋아, 웬지 이 조직은 나랑 안 맞을 것 같아, 라는 불길한 느낌...
그런데 내 싸구려 흰색 후리스를 벗자마자, 난 거기에서 가장 없어보이는 사람이 되었다. 가뜩이나 싸구려 자켓에 오래된 후리스 털이 잔뜩 붙어서, 그렇게 모냥빠지고 지저분해 보일 수가 없었다. 내 옆자리에 앉은 여자는 내 자켓을 보자마자 호들갑을 떨며 진한 경상도 사투리로 '이거 왜이래요?너~무 심각하다. 밖에 가서 좀 털고 와요!'하며 손수 그 털을 하나하나 떼주기 시작했다.
오지랖 왜 저래... '아.. 괜찮아요 나중에 한번 털죠 뭐' 하는데 그 여자가 몇 번이나 '저기 밖에 화장실 있어요! 좀 털고 와요!'라고 채근하는 바람에 결국은 다시 추운 밖에서 자켓을 탈탈 털며 저런 오지랖도 병이네, 병이야. 하고 들어올 수 밖에 없었다.
다음 순서는 신분증 확인이었는데, 다들 민증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있자니 옆자리 오지랖녀의 민증에도 슬쩍 눈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어, 우리 동갑이네요??(반갑)'
'잘 봐요.'
'네?...아 빠른...?'
'제가 한 살 많아요.'
'아니 무슨...ㅎㅎ'
유난도 이런 유난이 없다 싶었다. 면접장 옆자리 사람이랑 나이로 기선 제압하는 것도 아니고 빠른이면 어쩌라는 것인가. 참 별나다 별나. 말도 섞기 싫었다.
그 와중에 앞뒤에서는 그간 '스터디'를 통해 서로 알고있는 사람이 꽤나 많은 듯이 반갑게 서로를 찾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 변호사님은 어떻게 되셨냐, 준비는 많이 하셨어요, 어머 너무 반갑다~! 등등. 내 옆자리 여자도 개중 몇몇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아니 고작 면접인데, 무슨 스터디들을 얼마나 했길래 벌써 이렇게 친목이 형성되어 있다고? 웃기지도 않다. (당시의 나는 왜이렇게 비뚤어져 있었을까)
첫 번째 레슨, 아니 면접은 그룹 토론이었다. 당연히 옆자리 여자도 같은 그룹으로 토론에 참석했다. 주제가 뭐였는지 기억은 안나도, 걔가 말하는 걸 보니 생각보다 똘똘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당차게 보이려고 상당히 애쓰는군. 내 입장에서 토론에서는 나도 안정권에 든 것 같았다. 핵심 논지를 남이 채가기 전에 먼저 이야기했고, 잘못된 통계를 암산하며 반박하다가 어이없는 계산 실수로 모두에게 웃음을 선사하기도 했다. (안정권 맞나?)
첫 번째 면접에서 대기장으로 돌아와 다시 각자의 자리에 앉은 우리.
'달씨, 면접 학원 안 다녔죠?'
'네(그런걸 왜 다니니)'
'학원 안 다닌 티가 나네!'
'네?(미친건가)'
'그거 볼펜 자꾸 돌리는 거~그거 안좋아 보이는 거에요!'
'아 네...(너나 잘해 오지랖아)'
면접 학원도, 스터디도 이해가 안되는 판에 학원 안 다닌 티가 난다는 건 또 무슨 소리람? 내가 뭘 잘못했나? 아니 그렇더라도 왜 이게 지적질이야 초면에? 아까 원숭이처럼 자켓 털 뗄떄부터 계속 긁네???
짜증이 스물스물 몰려와 아예 시선을 피하고 있던 와중에, 이번엔 두번째 개인 면접을 기다리며 자기소개 연습을 서로에게 해보잔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너무도 진한 사투리로) '저 사투리 쓰는 거 티 나요?'
'혹시 지금 서울말 쓰시고 있는 중이었어요?'
한 방 먹였다. 근데 너무 웃겼다. 둘 다 순간 빵터져서 한참을 웃었다.
'아니 사투리를 그냥 대놓고 쓰시는 거 잖아요~~ㅋㅋㅋㅋㅋㅋ'
'아니 난 노력을 하는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루 종일 배배 꼬여있다가 그렇게 어이없이 한번 빵 터지고 나니 기분이 꽤나 좋아졌다.
약간 친밀해진 라포를 바탕으로 난 열심히(대충) 내 자기소개를 먼저 들려줬다. 근데 이 여자, 뭐 다른 얘기를 늘어놓으면서 자기 차례는 얼렁뚱땅 넘어가네. 아 또 당했네, 이 볼펜잡이들...
두번째 레슨, 아니 면접은 개인별 면접이었기에 각자 순서대로 면접장에 들어가고 나오는 대로 알아서 귀가하면 되는 방식이었다. 긴 하루가 드디어 끝난다 하고 면접장 앞에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자니, 이 여자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아니 왜, 왜그래요(걱정)'
'감정이 북받쳐서~흡'
대화를 나눌만한 상황은 아니어서 그 오지라퍼는 그렇게 귀가했고 난 솔직히 말해서 와 저거 미친 게 맞다. 아무튼 정상은 아니야. 저런 애들하고 회사생활하면 어떨까? 진짜 피곤하겠지? 우리 공직사회의 모습이 이런 거라면, 조국의 미래가 걱정된다. 제발 쟤는 붙지 마라.....를 그 순간부터 뼈저리게 생각하며 귀가했고, 합격했다. 오리엔테이션 날, '설마 그 돌아이는 없겠지, 제발..'하며 건물로 들어갔다.
(진한 경상도 사투리)"달씨!!!!!여기요!!!!!!!!"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