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묘미라 하면 뭐니뭐니해도 그 나라 마트 구경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나는 유럽에 가면 각종 치즈, 버터 매대 앞에서 눈이 돌아간다. 요샌 마켓컬리 같은 데서도 다양한 종류의 치즈를 살 수 있지만 일단 꽤 비싸기도 하고, 유럽 마트 어딜가나 한쪽 벽면을 든든하게 꽉 채운 치즈와 유제품 중에서 심사숙고하여 맛있어 보이는 걸 직접 보고 고르는 일 자체가, 이게 상당히 재밌다.
다 먹어보고 싶어도 나의 위장에는 한계가 있으니, 집중력을 발휘해서 이 치즈가 무슨 맛일지 상상해본 후,한국에선 못 먹어보았고+구하기 힘들어 보이며+내 입맛에 맞는 최적의 치즈를 발굴하는 것이다.
엄마, 동생과 파리에 가기 전 1박 레이오버로 머무른 헬싱키에서 또 마트 구경을 빼놓을 순 없으니 에어비앤비 앞 마트에 갔다. 헬싱키의 저녁은 어찌나 고요한지, 거리는 돌아다니는 사람도 없이 스산했지만 크지 않은 마트는 꽤나 북적거려서 이 사람들은 대체 언제 어디에서 온 것인가 싶었다.
이미 저녁을 먹은 상태였고, 다음날엔 아침은 미리 찜해놓은 까페에 가서 시나몬롤과 케이크를 먹기로 되어있었다. 그러고 나면 다시 파리행 비행기를 타야했기에 사실 뭘 산다 하더라도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없었고, 캐리어는 파리까지 보낸 상태여서 짐을 늘리면 안 되는 상황. 하지만 어찌나 맛있어보이는 것들이 많은지, 결국 초콜렛 몇 개와 크리스마스 에디션으로 보이는 귀여운 맥주 한 병을 충동구매 하고 치즈는 '구경만 하겠다'며 매대 앞에 서서 또 뭐에 홀린 사람처럼 이 치즈 저 치즈를 눈독들이고 있던 참이었다.
현지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급한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내 앞으로 걸어와 망설임 없이 집고 사라진 치즈가 있었으니, 바로 오늘의 주인공, 레이페유스토!!!
이렇게 생겼다!
실제로 보면 피자 레귤러 사이즈 정도의 크기에 군데군데 저렇게 구운 자국까지 있어서, 치즈 코너에 있지 않았다면 무슨 인도 난 같은 빵인가 싶을 정도의 비쥬얼이다. '오호라. 요새 한국에서도 핫하고 비싼 구워먹는 치즈 같은 것이로구나!' 하고 눈독을 들이던 찰나에 현지인의 Pick까지 받았으니 충동구매하지 않을 수가 있나!
엄마는 이 거대한 치즈를 들고 다니는 내 옆에서 또 "아니 그걸 또 언제 먹으려고 사는거야!!그만 사!!"라고 잔소리를 퍼부으며 따라다녔지만 우리의 장바구니 결제는 어차피 내 카드로 했기에 날 막을 수 없었다. 전세계 어디서나, 카드를 쥔 자에게 권력이 생기는 법이다.
그렇게 각종 군것질거리와 방석같은 치즈를 안고와서 그날 밤은 바로 곯아떨어졌다. 다음 날 아침, 시차 때문인지 나 혼자 새벽부터 눈이 떠졌는데 배가 어찌나 고프던지!!여행만 가면 왜 아침부터 배가 고플까?..
치즈를 먹어볼 수 있는 기회의 창이 열린 것이로구나!!하면서 에어비앤비 냉장고 안의 냉동빵과 치즈를 전자렌지에 돌려서 새벽 5시부터 조찬을 시작했다.
여행의 첫 아침식사. 첫 레이페유스토!
세.상.에!!!
현지인의 픽을 믿은 것은 역시 실수가 아니었다. 사진에서 볼 수 있 듯 데우면 약간 죽~녹으며 늘어나는 생치즈인 레이페유스토는, 담백하고 슴슴한 흔한 모짜렐라 류 치즈의 맛이었고, 특이한 건 식감이었다. 살짝 탄성좋은 고무를 씹는 것 같은 식감이랄까.
알고보니 이 특유의 식감 때문에 영미권에선 이 치즈를 "squeaky cheese" 일명 찍찍이 치즈라고 한단다. 실제로 씹으면 이빨 사이에서 찍찍 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의 탄성(?)을 자랑한다. 이빨 사이에서 미끄덩거리며 쫄깃하게 씹히는 고유의 텍스처가 아주 중독성있다.
그리고 마침내 엄마와 동생이 일어났을 때, 난 자신있게 내가 어제 사온 치즈를 꼭 먹어보라고 강권했고, 연신 감탄사를 내뱉는 엄마 옆에 앉아서 발을 까딱까딱거리며 "거봐!사길 잘했지?맛있지?맛있을 것 같았다니까!!또 먹고 싶지? 거봐!!!!" 하며 유세를 떨었다. 여기까진 나의 완승!!!
이 찍찍이 치즈에 완전히 꽂힌 우리 엄마는 그날 오전에 굳이 '그 치즈를 몇 개 사가야겠다'며 마트를 찾아다니더니, 가뜩이나 터지기 일보직전인 꽃무늬배낭 안에 이 방석 같은 치즈가 몇 개나 들어갈 수 있을지 가늠하며 슬퍼했다. 지난밤 충동구매의 가치를 인정받아 잔뜩 어깨에 힘이 들어간 나는 이번엔 내가 엄마를 뜯어말릴 차례임을 직감했다. 프로 여행러인 신여성 딸로써, 엄마가 촌스럽게 구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나 : "프랑스가면 깔린게 치즈야!!이것도 무조건 있을거야!!제발 그렇게 바리바리 싸다니지좀 마 가방 터지려고 하잖아!!"
엄마 : "진짜 프랑스에도 있어??(멈칫) 아니야 어떻게 될지 몰라. 야 너 프랑스에 이거 없으면 어떡할래!!!!한 개만 달라고 하기만 해봐라"
그때까지만 해도 '좋은 게 있음 쟁이고 보자'는 엄마의 아줌마스러움을 여행 아마추어가 짐 늘리는 수순이라며 비난하고 웃음거리로 삼았던 나는, 프랑스에 가서야 그 치즈가 핀란드에서만 파는 치즈라는 걸 깨닫게 된다. 뜨든. 프랑스는 치즈 전문국 아니었냐고요!
결국 파리의 마트며 백화점 식품관에서도 엄마 몰래 매번 찍찍이치즈를 찾아보았지만 흔적도 찾을 수 없었고, 내게 남은 것은 귀국 후 캐리어 안에서 터져버린 파리에서 산 트러플 부라타 치즈의 잔해뿐이었으며, 엄마는 돌아와서도 며칠 동안 찍찍이치즈로 부런치를 즐기며 나를 약올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