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들이 사랑한 색과 향으로 가득한 골목골목을 스케치하듯 누비기
나는 사실 그림을 잘 못 그린다. 잘 못 그린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을 정도로 그림엔 정말 소질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없다. 사실 그림 그리는 걸 좀 무서워하기도 한다. 간단하게 형체를 따오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수준이다. 몇 년 전 컴퓨터학원에서 일러스트레이터를 배울 때였다. 펭귄 그림의 선을 따오는 간단한 작업조차 무슨 대단한 대작을 그리는 양 힘겨워하는 나를 보고 선생님이 작게 한숨을 쉬며 지나간 기억이 난다. 사실 나같은 사람은 그림을 그리지 않는 것이 곧 종이를 낭비하지 않는 길이니, 거창하게는 환경보호에도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또는 가상 세계의 저장공간을 쓸데없는 내 손가락의 흐느적거림으로 허비하지 않고, 그 공간에 차라리 내가 좋아라하는 미드나 소장하고 있는게 나의 소소한 잉여 라이프에도 도움이 될 거다.(어쩌면 이런 글을 쓰는 것조차 가상 공간의 데이터를 낭비하고 있는 걸지도...) 어쨌거나, 이런 내가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느끼게 되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다.
그런 드문 일이, 남프랑스의 작은 골목길을 돌아다니다가 일어났다. 좁다란 골목골목은 그림과는 백만광년 먼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나같은 사람조차 그림을 그리고 싶게 만드는 공간이었다.
프로방스(Provence) 지방 아를(Arles)은 인상파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머무른 도시다. 이 작디 작은 도시 곳곳에는, 화가가 캔버스에 담은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밤의 카페 테라스'의 배경이 된 노란 벽의 카페가 실제로 아직도 장사를 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아를 곳곳에는, 그림에 등장하는 곳이 아니더라도 길거리 곳곳이 따뜻한 남프랑스만의 색감으로 가득차있다. (물론 고흐는 이 곳에서 우울한 나날을 보냈던 것 같지만....)
관광객의 발길이 드문 골목길을 거닐다보면 창문 하나하나에 스며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감성을 자극하는 길거리와, 시각을 자극하는 프로방스 지방 특유의 색감이 마음에 들었다.
나름 대도시라 할 수 있는 니스(Nice)에서 버스를 타고 30분 남짓 걸려 도착한 절벽 마을 에즈(Eze)는 또다른 느낌을 주는 마을이다. 붉은색 지붕과 돌담이 어우러진 이 마을의 좁디 좁은 골목에는 관광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아기자기한 소품가게와 소규모 아틀리에가 빼곡히 들어서있다.
기념품 가게에서 파는 나염천과 아틀리에에서 걸어둔 그림에 등장하는 따뜻한 색감은, 에즈 골목이 가지고 있는 그 특유의 색깔과 닮아있다. 이 따뜻한 색감의 골목에 있다보면, 좁다란 골목길에 놓여진 녹슨 철제 테이블마저 어떤 화가가 정물화의 피사체로 삼았을 물건처럼 보이기도 한다.
엄연한 독립국가인 쪼꼬미 나라 모나코(Monaco)의 색감은 조금 더 독특하다. 에즈의 지극히 자연친화적이었던 돌담이 주던 색감과는 또 다른, 아크릴물감에서 짜낸 것 같은 파스텔톤으로 거리가 가득찼다. 이상하게 브런치에 글을 쓰면, 티스토리 블로그보다도 훨씬 더 허세가 넘치고 오그라드는 표현을 쓰게된다. 왜 그런거죠.
생폴(Saint Paul)은 에즈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작은 마을이다. 여기도 작은 악세서리나 소품, 기념품 가게와 아틀리에가 가득하다. 다만 에즈보다 니스에서 조금 더 떨어져있어서인지는 모르겠는데, 가게들이 아주 약간 조금 더 토속적인 느낌을 준다. 물론 여기도 최선을 다해 예쁘기로 작정한 가게가 많다.
에즈와 비슷한듯 하지만, 사실 생폴 골목길이 주는 즐거움이 하나 더 있다. 바로 골목길을 걷다 틈사이로 보이는 남프랑스의 비옥한 평원이다.
흔한 창문 하나조차 예사롭지 않으니, 아틀리에에 전시된 그림 역시 예사롭지 않을 수밖에.
사실, 꽃과 식물로 집이며 길거리를 장식하는 건 남프랑스 사람들의 특기다. 여기저기 꽃으로 장식하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 바로 여기다.
그런가하면,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골목길도 있다. 중세부터 꿋꿋하게 그 자리를 지켜온 아비뇽(Avignon)의 골목길이 그렇다.
이 골목길은 그 유명한 아비뇽의 다리(pont d'Avignon)로 이끄는 신기한 길이기도 하다.
조금 더 동화스러운 곳도 있다. 릴쉬르라소르그(l'isle sur la Sorgue)라는 어려운 이름의 이 작은 프로방스 도시는, 도시 곳곳이 운하로 둘러싸여있는 재밌는 곳이다.
칼라풀한 색감과 이국적인 향으로 가득한 남프랑스의 골목길을 거닐다보면, 왜 화가들이 이 곳으로 모여들었는지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직감적으로 납득할 수 있다. 그리고 심지어 햇빛에 반사된 길거리의 따뜻한 느낌들을 어떻게든 표현해지고 싶어진다. 그림을 몹시도 못 그리는 나조차 그림이 그려지고 싶어진 이유다.
그래서 그림을 그렸냐고 물으신다면...... 뒤늦게 유행 다 지난 컬러링북에 빠져들었다는 대답을 드릴 수밖에. 색색깔의 색연필로 무언가를 색칠하는 게 그나마 유일하게 내가 할 수 있는 미술과 가까운 행위였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 그렇지만 타고난 게으름을 이기지 못하고 가끔은 경치 좋은 곳에서 그저 멍 때리기만하는 사람의 여행기. 세상은 넓고 기웃거릴 곳은 정말 많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