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고와 안데르센의 도시에서 다시 품는 어른이 되는 꿈
굉장히 슬픈 사실이지만, 그토록 고대하던 어른이 되고 나서 보니 세상은 그렇게 멋진 곳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땐가 나의 10년, 15년, 20년 뒤를 그려보는 시간이 있었는데, 나는 지금 보니 대단한 인생 계획을 아무렇지도 않게 써냈다. '20살: 하버드 합격/25살: 피아니스트, 연예인, 외교관, 선생님 중에 하나가 된 다음에 엄청난 미남과 결혼/ 30살: 미국에서 살면서 부자가 됨, 자녀들이 태어남, 행복한 제2의 인생 시작'. 실로 엄청난 인생(참고로 27살 지금의 나는, 당연하게도 여기 쓰여있는 것 중 그 어느 하나도 이루지 못했다)이지만 어쨌거나 어렸던 나는 내가 그런 어른이 될 거라는 믿음에 한치의 흔들림도 없었고, 고등학교 때만 해도 내가 어른이 되면 세상이 나를 반겨주는 줄 알았다. 하고 싶은 게 정말 많았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넘쳐 났다. 나는 정말 어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더 이상 애교로라도 어리다고 말할 수 없는 20대 후반이 되어보니, 나는 그저 그런 세상에서 찌들고 찌든 흔한 '현대인 1'이 되어있을 뿐이었다. '꿈을 크게 가지고 무럭무럭 자라라'는 어린 시절 들었던 말이 떠오르면 굉장한 배신감을 느꼈다. 동심을 떠올리며 예전에 본 만화나 책을 보거나 장난감을 만지는 시간은 생산성 없는 '철없이 노는 시간'이 되었고, 스스로 그 '노는 시간'마저 피곤하게 느껴질 정도로 녹초가 되어있었다. 하고 싶은 걸 하는 것보다 하기 싫은 걸 해야 할 때가 몇 배로 더 많았고, 심지어는 뭘 원하는지 모르겠는 때가 훨씬 더 많았다. 세상엔 또라이도 미친놈도 정신병자도 너무 많았다. 그렇지만 난 이건희 딸이 아니니까, 그렇다고 내가 무슨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도 아니니까 사회라는 곳이 내 맘에 안 내켜도 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고 월급을 받는 생활을 시작했다. 나는 서류상 성인이 되어버린 게 어느 순간부터 굉장히 짜증이 났다.
어렸을 때 나는 서양을 배경으로 한 무언가에 꽤나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지금과는 달리(...) 굉장히 똘똘했던 어린이 시절, 나는 드레스를 입고 나오는 공주들이 그려진 세계명작동화 전집을 읽고 또 읽었다. 엄마아빠가 어디서 자막이 없는 불법으로 복제된 디즈니 만화영화 비디오를 사왔는데, 그 비디오들 역시 조금 과장을 보태 수백번은 돌려봤다. 자막이 없었기 때문에 대사는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오히려 자막이 없었기 때문에 그림과 분위기에 더 몰두하고 빠져들었던 것도 같다. 나고 자란 곳 모두 한반도 땅인데다, 내가 알고 있는 한 대대로 외국인의 피가 섞이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난, 그야말로 완벽한 '토종 한국사람'인 나의 어린 시절에 무언가 '서양스러운 것'이 자리 잡고 있는 이유는 그래서일 거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 이름조차 서양느낌 제대로 나는 '코펜하겐'은 나의 어린 시절 기억 무언가를 자극하는 그런 도시였다. 가장 동화 같은 곳. 내가 어렸을 때 상상하면서 가장 선망했던 어떤 이미지의 도시.
우유와 다이어트 말고, '덴마크' 하면 사람들이 가장 많이 떠올리는 대표적인 것이 바로 레고 장난감과 안데르센 동화다. 어렸을 때 동네에서 좀 산다 싶은 애들 집에 놀러가보면, 사자성이나 바이킹 같은 거대한 레고가 놓여있곤 했다. 우리 집엔 그런 커다란 레고는 없었지만(슬픈 대목이다), 나 역시 인형 다음으로 레고를 가장 열심히 가지고 놀았다. 그러니 코펜하겐에서 가장 기대됐던 곳이 레고 스토어일 수밖에.
(+) 참고로 나는 레고랜드가 있는 도시 빌룬드(Billund)엔 못 갔다. 코펜하겐에서 너무 멀고, 무엇보다 내가 갔던 때에는 개장 시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겨울에 북유럽을 여행하면 이런 불상사가 종종 닥치곤 한다는 걸, 비수기가 괜히 비수기가 아니라는 걸 여행을 하면서 깨달음.....).
레고 스토어는 세계에서 가장 긴 보행자 거리라는 스트뢰에(Strøget) 거리에 있다.
자전거의 나라답게 자전거를 타고 있는 거대한 레고 인간들이 나를 반긴다. 크리스마스를 한 달 정도 앞둔 때여서 산타도 있다.
운하 옆에 파스텔톤 건물이 줄지어 늘어져있는 아름다운 뉘하운도 레고로 만들었다. 레고 세계에 온 걸 한껏 느끼기 위해 레고에 눈높이를 맞추고선 레고 뉘하운을 한참을 구경했다. (이때는 사실 진짜 뉘하운도 안 봤을 때다....)
색색깔의 레고 조각이 벽면 한가득 정리되어 있는 걸 보다 보니 굉장히 즐거워졌다. 즐거움에 취해 저 통들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는데, 찍고 나서야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레고 세상에서 궁극의 동심을 맛봤다면, 어쨌거나 코펜하겐에 왔으니 인어공주 동상에 가서 안데르센의 흔적도 찾아봐야겠지. 원래는 갈 생각이 없었는데 겨울 코펜하겐에서 6일이나 있는 동안 딱히 할 게 없어서 나도 그냥 가봤다. 사실 인어공주 동상은 브뤼셀의 오줌싸개 동상과 함께 유럽에서 가장 실망스러운 볼거리로 유명하다.
인어공주 동상은 익히 들었던 대로, 정말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그렇지만 아예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딱히 실망스러울 것도 없었다. 오히려 매연을 내뿜는 공장을 등지고서 관광객들의 실망과 비웃음을 한 몸에 받는 인어공주가 조금 애잔해 보이는 색다른 느낌도 받았다. 그래도 저기까지 찾아가는 고생을 했으니 굳이 거창하게 포장해주자면 동화의 세계가 훼손되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이랄까...... 이건 다 멍멍이 소리고 결론은, 굳이 찾아가서 볼 필요가 전혀 없는 볼거리라는 데 나도 동의한다는 거.
사실 진짜 안데르센의 흔적을 느끼고 싶으면 뉘하운(Nyhavn)에 가야 한다. 운하 양 옆으로 파스텔톤 색깔의 목조 건물이 늘어져있는데, 그 모습이 정말 동화 속 한 장면 같다. 베레모를 쓰고 볼이 빨간 꼬마가 튀어나와서 사탕가게에 가다가 항구에서 신비로운 선원을 우연히 만나 모험이 시작되는, 그런 동화가 있다면 아마 배경으로는 여기가 적합할 거다. 안데르센은 이 곳에 머물면서 동화를 썼는데, 비싼 방세 때문에 세 번이나 이사를 했다고 한다.
왜 이 곳에서 머물었던 위대한 동화작가가 안데르센 한 명뿐인지 의아할 정도로, 뉘하운의 건물들엔 뭔가 순진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뉘하운에서는 유람선으로 운하 투어도 할 수 있다. 탈 거라면 뭐든 좋아하는 나도 아침에 눈뜨자마자 날씨가 너무나 좋길래 유람선을 타러갔다. 겨울 북유럽은 해가 귀하기 때문에 날씨가 좋은 날엔 아무리 춥더라도 무조건 무조건 무조건 밖에 있어야 한다.
운하를 타니 인어공주 동상에 또 들렀다. 이럴수가... 아예 올 필요가 없는 곳을 그렇게 두 번이나 가게 되었다. 그렇지만 풍경이 너무나 좋으니까 용서해줘야지.
코펜하겐의 길거리 곳곳은 사실 굉장히 고풍스러우면서도 아기자기해서 가는 곳마다 동화 속 장면이 떠오른다. 사실 유럽 길거리 어디나 좀 동화스럽기는 한데, 코펜하겐이 유독 동화스럽게 느껴졌던 이유는 막연히 '동화스럽다'가 아니라 특정 동화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가 겨울에 가서 그런 거 같긴 한데, 사실 내가 코펜하겐에서 가장 많이 떠올린 동화는 성냥팔이 소녀였다. 왠지 길거리 어딘가에서 올망졸망하게 생긴 소녀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이건 그냥 내가 단지 추워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코펜하겐에서 '동심'을 책임지는 장소는 따로 있다. 티볼리 파크다. 1843년에 개장한 세계 최초의 테마파크라고 한다. 어트랙션이 엄청나게 흥미롭거나 한건 아닌데, 오래된 놀이공원이다 보니 빈티지한 분위기 자체가 티볼리 파크의 자랑거리인 것 같았다. 아름답기로 유명하길래 반드시 가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겨울 비수기에 여행하는 자는 무조건 정보력이 필수인 것 같다. 내가 갔을 때는 크리스마스 개장을 앞두고 준비하느라 쉬는 때였기 때문이다. 안 연다는 거 어쩌겠어.. 아쉽지만 이건 다 아무 계획 없이 나처럼 게으르게 여행하는 자의 업보겠거니 하고 넘기겠는데 문을 닫은 거보다 더 사람을 약 올리는 게 있었다. 내가 코펜하겐을 떠나기로 되어있는 그 바로 다음 날 다시 개장한다는 것. 비보도 이런 비보가 따로 없다.
그래도 다시 길거리를 하염없이 걷다 보면, 티볼리파크를 놓친 나 같은 게으른 여행자도 나름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한 골동품 가게에서 만난 아저씨가 그랬다. 인상도 더 이상 그렇게 인자할 수가 없는, 거의 천사 같은 사람이었다. 먼 곳에서 혼자 여행 온 사람에게 주는 선물이라며 로얄 코펜하겐 앤틱 찻잔을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가격에 그냥 내주기도했다. 나보고 어디 어디 여행을 갈 거냐고 물어보길래 내가 여행 예정지를 죽 읊으며 최종 목적은 오로라를 보는 거라 했더니, 자기가 그린란드에 오래 살았는데 거기서 거의 매일같이 오로라를 봤다며 자기를 만났으니 내게도 오로라의 기운이 전달됐을 거란 축복의 말까지 덧붙였다. 나는 내가 아이슬란드에서 강한 오로라를 볼 수 있었던 건 전부 다 이 아저씨가 전해준 기운 덕이라고 생각한다.
유람선을 타다가 본 멋진 도서관에도 찾아가봤다. 코펜하겐 왕립도서관인데, 블랙 다이아몬드라는 별명을 가진 아름답고 현대적인 도서관이다.
나는 사실 도서관의 분위기를 무척 좋아한다. 책 냄새도 좋고, 책이 가득한 모습도 좋고, 사람들이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도 좋다.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주는 몇 안 되는 장소다. 그렇다고 내가 평소에도 도서관을 자주 찾는 학구적인 인간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니라고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다(....).
도서관에서 나와 강변을 걷다가, 길 한복판에 설치되어있는 트램펄린에서 아가들이 놀고 있는 걸 보게 되었다. 처음엔 환풍구인줄 알았는데 트램펄린이었다. 아이들이 노는 게 귀여워서 그걸 옆에서 구경하다가, 나도 옆에서 같이 뛰었다. 코펜하겐에서 가장 즐거운 순간이었다.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는 곳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아무 생각 없이 통통 튀어 오르니 기분이 저절로 좋아졌다. 나는 아직 살아있어!
나는 여전히 내가 어른으로 취급받는 게 맘에 들진 않는다. 어른 노릇을 제대로 못 하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사회생활을 버거워하고, 또라이에 치이고, 어쩌면 내가 또라이처럼 굴지도 모르겠고, 사람들이 '현실'이라고 부르는 이런저런 조건들도 한참 따져야 하고, 그러다 또 만성 피로에 시달리며 찌들어있는 그저 그런 일상을 반복하면서. 어린 시절 반짝반짝 그리던 어른이 되기엔 이제 한참 늦어버렸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코펜하겐에서 다시 들여다본 나는, 서류상 어른이긴 한데 아직도 어린 시절 봤던 무언가를 떠올리면서 설레어하는 '덜 자란' 어른이었다. 세상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멋진 곳은 아니었지만, 내 기억 어딘가에는 아직 동화가 남아있었던 걸 확인했다고 해야 할까. 코펜하겐이 그다지 낯설지 않았던 이유는 어린 시절 내가 영향 받은 동화스러운 분위기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어서였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느낌을 기억하고 있다는 건, 내 동심이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증거 같았다. 난 내가 덜 자란 어른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직은, 그리고 계속 계속, 나는 더 자랄 수 있다.
그래서 난 어른이 되었더라도 계속 어른을 꿈꾸기로 했다. 하버드에 가고, 재벌이 될 수는 없더라도, 언제든지 나는 지금보다 더 멋진 어른이 될 기회가 있다.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아끼고 더 많이 진심으로 순간순간을 사는 어른이 되어야지. 이건 다 코펜하겐이 준 선물 같은 생각이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 그렇지만 타고난 게으름을 이기지 못하고 가끔은 경치 좋은 곳에서 그저 멍 때리기만 하는 사람의 여행기. 세상은 넓고 기웃거릴 곳은 정말 많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