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나는 ‘울지’였다. 울보의 ‘울’과 내 이름의 마지막 글자를 더해 만든 별명이었다. 태어난 지 서른 해가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엄마는 구전 설화처럼 내 울음의 역사를 읊는다. 그건 곧 엄마의 수난의 역사와도 같다. 한시도 안아서 얼러주지 않으면 울음을 터뜨려서 결국 흔들의자를 샀다는 이야기,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려고 했다가 내가 탈진해 죽을까봐 결국 달래줬다는 이야기까지, 내 기억 속엔 없는 일화가 엄마에겐 차고 넘친다. 내 인생의 첫 기억은 네 살 때부터인데, 그때부터 일곱 살 때까지 난 참 열심히 울었다. 오빠에게 오목을 졌기 때문에, 인형의 머리를 잘라주면 다시 자라지 않는다는 걸 아무도 말해주지 않아서 같은 이유였다. 그 시절 나는 많이 억울했던 것 같다. 사람들은 내 울음을 그치게 하기 위해 애를 썼다. 수 년 간의 경험에 의하면 운다는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울기만 하면 억울함이 풀리는 마법 같은 일이 종종 벌어져서 때론 지칠 때까지 목을 놓아 울기도 했다.
아무래도 너무 많이 운 모양이었다. 사춘기를 지나 성인이 되면서 그간 너무 울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문제는 울고 싶은 일이 생겨도 그러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눈물은 나왔지만 감정에 북받쳐 울지 않았다. 끓는점에 도달하기 직전에 불을 꺼버린 기분이었다. 심지어 소울메이트를 만난 듯 호들갑을 떨던 연애가 끝난 뒤에도 나는 울지 못했다. 사람들은 참 씩씩하다며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고 칭찬했다. 보고 싶다고 매달려도 안 되고, SNS에는 기쁜 척만 해야 한단다. 사회생활을 할 때나 개인적인 일에나 감정 분출은 미성숙한 일로 치부됐다. 특히 분노와 슬픔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어릴 때나 성인이 되어서나 그 감정들은 주변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어쩌면 옳지 못한 것이었다. 해가 갈수록 나는 점점 ‘쿨’해졌고, 그걸 노련함이라 부른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가끔 우쭐했다.
딱 두 번 예상치 못한 울음이 있었다. 오랜 투병생활을 하다 돌아가신 큰아빠의 장례 내내 멀쩡했던 나는, 운구차에서 자신과 똑 닮은 큰아빠의 영정을 들고 내린 우리 아빠를 보고 울었다. 4년 전, 실종된 자녀를 애타게 찾는 부모님들을 모시고 진행한 방송 녹화가 끝난 후, 한 어머니가 내 손을 꼭 잡고 “정말 고맙다. 우리 윤정이(가명)를 잃어버린 후에 아무도 날 ‘ 윤정 엄마’라고 불러주지 않았는데, 작가님 덕분에 행복했다”는 말을 했을 때 엉엉 울었다. 꼬맹이일 때 이후론 없었던 낯선 일들이었다. 갑자기 찾아온 슬픔이라는 감정에 당혹스러웠지만, 울음이 멈춰지지도, 멈추고 싶지도 않았다. 줄곧 ‘어쩌면 그릇된’ 일일지도 모르는 운다는 행위가 그때만큼은 틀린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2년 전, 여행 중 호기심에 명상센터를 찾은 적이 있다. 참가자들은 스님과 대화를 하며 서로의 생각을 나눌 수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각자의 고민을 털어놓게 됐다. 울고 싶어도 울 수가 없다, 감정을 다스리는 게 맞는 것 같은데 가끔 답답하다는 게 나의 고민이었다. 스님은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기 전에 나 자신에게 먼저 공감하라’고 답했다. 분노와 슬픔을 내비치는 건 결코 미성숙한 일이 아니며, 특히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에겐 그 감정을 표출하고 마주해야 비로소 해결할 수도 있다고.
그리고, 나는 더 이상 ‘쿨’해지지 않기로 했다. 어릴 때와 달리 이젠 목 놓아 운다고 억울함이 해결되는 마법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사람들이 말하는 노련함을 점점 잃어가는 것도 같다. 하지만 이젠 이게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나는 앞으로 나의 수난의 역사가 될 울음의 역사를 다시 써갈 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충분히 ‘쿨’하지 않아서, 때론 ‘울지’라서 참 다행이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