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의 상징성에 대한 단상
얼마 전, 비엔나의 Kunsthalle Wien에서 흥미로운 전시를 보았다.
독일 작가 Olaf Nicolai의 <There is no place before arrival>이라는 이름의 전시가 한창 진행중이었는데, 사실 8유로를 내고 들어간 직후 '이게 다야?'라는 생각과 함께 당혹감이 밀려왔다.
Kunsthalle Wien은 실험적인 현대미술을 다양하게 소개하는 미술관으로 알고 왔기에, 현대미술의 난해함을 재미있어 하는 터라 잔뜩 기대했지만 그래도 '이게 8유로(=약 10,500원) 짜리라고?' 라며 본전 생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벽에 걸린 그림은 단 한 장도 없었고, 설치된 어떤 작품도 없었다. 오직 그 큰 공간은 바닥만 활용되고 있었다. 이 전시를 감상하려면 관람객은 바닥만 보고 다녀야 했다. 게다가 대부분의 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작품 옆 설명 글귀도 없는 이런 불친절한 전시라니. 관람객은 내내 고개를 숙이고 예의 차리며(?) 다녀야 하는데, 예술가는 너무 뻔뻔한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은 당시엔 하지 못했고, 오직 8유로의 본전을 뽑기 위해 땅바닥을 열심히 살펴보기로 했다.
그런데 도대체 이 바닥의 거대한 그림들에 무슨 의미가 있기는 할 텐데 대체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한 남자가 서 있는 그림, 책장을 그린 그림 같은, 보이는 것을 그대로 담아낸 듯한 그림도 있었지만 피사체 없이 그저 추상적으로 물감만 칠해진 그림도 있었다. 나중에 미술관에서 가져온 전시 설명책자를 읽어보니 '관람객은 익숙한 것들에 직면해 있지만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는' 그림이란다. 다만 작가는 이 22장의 그림을 뉴스 스크랩을 한 걸 통해 영감을 얻었다고 하니, 전시 설명대로 '(한때) 익숙했지만 (지금은)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잘 모르는' 것들을 담아낸 모양이다.
이 스물 두 장의 그림은 바닥에 꽤나 크고 넓게 '깔려 있다'. 그림과 그림 사이의 간격은 그다지 넓지 않은데, 마치 카펫 상점에서 여러 종류의 상품을 서로 겹치지 않게, 그러나 가능한 많은 상품을 내보이려 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다 보니 처음엔 그림을 밟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런데 그림들 위로 발자국이 마구 나 있는 게 아닌가! 처음엔 작가가 작업을 하며 남긴 발자국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러기엔 꽤 많은 발자국이 남겨져 있었다. 다시 보니 그림 주변엔 여느 미술관처럼 작품 주변으로 접근을 금지하는 제한선 따위가 없었고, 그림을 밟아도 직원이 전혀 제지하지 않았다. 바닥에 그려졌기 때문에 전시가 끝나면 그대로 가져가 소장할 수도 없는 미술, 열심히 그렸지만 관람객들이 마구 밟아 훼손하게 되는 미술. 이 작업을 통해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건 무엇이었을까? 애석하게도 전시 설명책자에는 작가의 의도는 적혀있지 않고, '관람객들은 그림 위를 걸을 수 있다'고만 적혀 있을 뿐이다.
현대미술이 재미있는 건 바로 이러한 모호함, 그래서 해석이 자유로워지는 점이다. 물론 어떤 창작품이든 그 결과가 대중에게 공개되는 것이라면, 작가의 손을 떠난 이상 해석의 범위는 넓어진다. 하지만 단적인 예로 루벤스의 종교화보다는 올라프 니콜라이의 바닥 그림이 더 해석의 여지가 넓은 건 사실이지 않은가.
20세기 이후의 작품들은 '의미와 상징의 문제' 같다. 좀 더 역사적으로 고찰해 보면 사진 기술의 발달로 인해 현실을 화폭에 담는 것은 의미가 적어지고... 등의 문제가 있겠지만, 그런 걸 차치하고 팝아트 이전과 이후의 작품 동향을 각각 한데 묶어 살펴봐도 그 차이는 명료하다. 변기가 예술작품이 되고, 우리집 너네집 할 것 없이 펄럭이던 성조기를 그린 그림이 미술관에 걸려 손도 못 댈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전 시대엔 '작품=작가의 의도'였다면 20세기 이후엔 '작품<작가의 의도'가 아닐까.
1961년 이탈리아 출신의 한 예술가가 자신의 매우 사적인 것을 예술 작품이라고 세상에 내놓아 큰 파장을 일으켰다.
작은 캔에 쓰인 문구가 보이는가? Artist's shit. 맞다. 예술가의 똥이다.
피에르 만조니는 자신의 똥을 작은 캔에 담아 봉한 후 그 위에 서명을 하고 '예술가의 똥, 정량 30g, 원 상태로 보존, 1961년 5월 생산'이라는 메모를 캔 옆면에 남겼다. 그는 똥을 90개의 캔에 소분하여 담았는데, 당시 금 30g의 값인 37달러를 캔 하나의 값으로 책정했다. 이 캔 중 하나는 지난 2008년 한화로 약 2억 3천만 원에 거래됐다.
과연 이 안엔 정말 피에르 만조니의 똥이 들어있을까? 진실은 이미 50년도 더 전에 사망한 예술가만 알 일이다. 하지만 궁금하다고 해서 열어볼 수도 없다. 여는 순간 캔에 적힌 'freshly preserved'의 의미가 사라지고, 작품으로서의 가치는 훼손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freshly preserved'인지 아닌 지도 알 수 없는 일 아닌가.) 아주 '사적인' 것을 작품이라고 세상에 내놓은 괴짜 예술가의 자매품으론 <예술가의 숨>도 있다. 자신의 숨이 들어간 풍선을 작품으로 내놓은 것.
사실 피에르 만조니는 부자들이 비싼 값에 예술품을 경매하고 소장하는 것을 보면서, "과연 예술가가 하는 행위는 모두 예술일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것이 바로 그의 기상천외한 작품의 탄생 의도였단다.
나는 예술가가 '작품'이라 명명하여 세상에 내놓은 것은 작품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 가치는 작가의 의도, 작품의 상징성과 의미에 따라 크게 달라질 것이다. 보이는 것을 모방해 그림을 그리던 시대엔 작가의 그림 실력이 그 가치를 결정했다면, 현대미술에선 작가의 생각에까지 값을 매기는 형국이 된 것이다. 그리고 관람객은 작품을 감상하며 그 생각을 유추하고, 때론 오해한다. 하지만 그것이 또 다른 의미와 상징을 낳게 될 것이다. 내가 끊임없이 현대미술을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이 지점이다.
얼마 전 노르웨이의 Astrup Fearnley 미술관에서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을 만났다. 데미안 허스트는 여러 의미로 가장 주목 받는 동시대 작가일 것이다. 대학 때 들었던 현대미술사 강의에서 중요하게 다뤘던 몇 안 되는 생존작가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의 작품은 초기엔 죽음, 2000년대 이후엔 종교와 깊이 연관되어 있는데, 작품의 형식은 그 주제와 맞물려 항상 논란이 되고 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 형식 중 하나는 바로 동물의 사체를 포름알데히드 용액에 담가 그대로 보존하는 방식이다. 이때 사체는 장기가 다 적출된 상태. 장기가 있던 자리엔 철골을 채워넣고 그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박제를 한 것인데, 우리가 흔히 아는 박제는 내부가 보이지 않지만 데미안 허스트는 이 내부마저 그대로 공개한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그는 나비도 여러 차례 작품에 활용했는데, 박제 시리즈처럼 나비 역시 1989년부터 시리즈화하며 작업을 진행했다. Astrup Fearnley에는 그 나비 작품 중 35마리의 나비를 활용해 작업한 <I feel love>가 걸려 있다. 미술관에서 제시하는 작품 설명에 따르면, 나비의 삶의 순간을 캔버스에 고정시키는 작업을 통해 그 삶이 불멸화되었음을 상징한다고. 사실 이 내용을 모르고 멀리서 나비 작품을 보았을 땐 아름답다고 생각했지만, 설명을 읽은 후엔 매우 가학적이라고 느꼈다.
그런데 박제 시리즈 못지 않게 나비 시리즈 역시 여러 차례 논란이 되었다. 박제 시리즈가 동물의 사체를 가지고 작업한다면, 나비 시리즈는 살아있는 나비를 가지고 작업을 하는 것이기 때문. 지난 2012년에도 그는 영국의 Tate modern에서 <In and out of love>라는 작품을 전시했는데, 이 전시 때문에 무려 9천 마리의 나비가 죽어야했단다. 정작 해당 전시가 이뤄진 미술관의 대변인은 "자연에 있는 것보다 미술관의 환경이 좋아 나비의 수명이 더욱 길어졌다"고 주장했지만, 논란은 단지 '나비를 죽임'이 아닐 것이다.
데미안 허스트의 삶과 죽음에 대한 꾸준한 고찰과, 그것을 작품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태도는 예술가로서 매우 존중받을만하다. 자신만의 특별한 예술적 작업 방식을 통해 전세계적으로 가장 주목 받는 미술가 중 한 명이 된 것도 그의 꾸준한 고찰이 빚어낸 훌륭한 업적이다. 하지만 그 상징성이 과연 윤리보다 중요한 것일까?
프랑스의 페미니스트 예술가 중 생트 오를랑이라는 작가는 이러한 논란을 피해갈 수 있으면서, 그러나 데미안 허스트보다 더욱 가학적이라 할 만한 작업을 진행했다. 그의 작업은 바로 성형수술. 1990년부터 3년 동안 총 9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성형수술을 통해 만들어진 <성 오를랑의 탄생>은 보티첼리가 그린 비너스의 턱,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의 이마 등 서구의 아름다운 여성의 조건을 자신의 얼굴에 적용함으로써 미적 기준의 모순을 밝힌 작업이다. '사회가 여성의 몸에 가하는 압력'에 대해 질문하고, 그를 직접 보여주고자 한 오를랑의 작업은 타인을 해치지는 않지만 스스로를 실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어쩌면 더 가학적이다. 그의 의도를 존중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용기있는 방식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이렇게 해야만 세상이 작가의 뜻을 알아주는 것인가에 대해선 씁쓸한 것도 사실이다.
단지 결과물만이 아닌,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 작가의 의도와 상징성이 점점 중요해지는 현실, 그렇기 때문에 갈수록 다채롭고 기상천외해지는 작품과 작업 방식, 그리고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고 보다 넓게 해석할 수 있게 하는 자유분방함. 이것은 분명 현대미술의 큰 매력이다. 하지만 그 상징성은 얼마나 중요한 것일까? 그리고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존중 받아야 하는가? 현대미술을 계속해서 향유하기 위해 우리는 이를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