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를 위해 앞장서진 못할지라도 치졸한 선배가 되지는 말자
(* 지난 글 ‘내게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페이를 올려달랬더니 나가라고 했다’에서 이어집니다.)
팀장 3과의 대화가 끝난 후 조금 헷갈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그만두고 싶은데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
물론 계약이 이미 종료됐으니 바로 정리해도 되지만, 보통 자의로 그만둘 경우엔 계약서에 적혔던 대로 한 달 정도의 말미를 두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 방송사 입장에서도 작가가 갑자기 나가 버리면 새 작가를 당장 어디서 데려온단 말인가. ‘당장 나가도 된댔더니 팀 ㅈ되라고 진짜 바로 나가더라’고 소문이라도 나면 어쩐담? 잘린 것도 짜증 나는데 욕까지 먹으면 진짜 억울하잖아. 한 달은 좀 그렇고 일주일 정도만 더 하고 나간다고 할까?
사실 팀장 3에게 화가 나진 않았다. 며칠 동안 내가 보인 어떤 행동이 맘에 들지 않았을 수 있다. 하지만 나랑 제대로 일해보지도 않고 이렇게 보내버리다니. 같이 일했다면 잘 해낸다는 걸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그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그래서 정말 일주일 정도는 남아서 더 일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퇴근 준비를 하는데 메인 작가가 조용히 잠깐 둘이서 얘기 좀 하잔다. 멋쩍은 웃음을 띄며 말했다. 언니, 제 얘기 들으셨구나.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어디 들어갈 데도 없는 상황. 메인 작가와 나는 문 닫힌 편의점 앞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메인 작가도 새 팀장이 데려올 작가 때문에 밀려나는 마당에 후배가 먼저 내쫓기는 모양새니 마음이 편하진 않겠지. 팀장이 나를 내보낸다고 했을 때 곧 나갈 작가인 본인이 이렇다 할 의견을 낼 수 없어서 영 찝찝했겠지. 그동안 고생했다거나, 이런 일에 너무 마음 쓰지 말라는 격려와 위로가 담긴 이별 메시지를 주고받겠지. 그런 생각으로 자리에 앉았는데 메인 작가가 꺼낸 말은 예상과 달랐다.
일단 가만히 듣기로 했고, 내 귀에 도달한 내용은 이랬다.
1. 오래된 작가들이 발전된 모습을 더 보였어야 했다.
2. 팀장 3과 1:1로 무슨 이야기를 최근에 한 걸 봤는데 나에게 무슨 일인지 이야기를 안 해주더라.
3. 나는 너에게 솔직했는데 너는 거리를 두는 것 같더라.
우다다 쏟아지는 말의 파편에 잠시 아득했다. 지금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왜 팀을 떠나게 된 내게 이런 말을 쏟아내는지 모를 일이었다. 마냥 듣고만 있을 순 없었기에 나는 답했다.
1-1. 특히 최근 몇 달 아이템을 적극적으로 냈고, 코너를 만들고 구성하는 데에 있어 전보다 노력했고 성과를 보였다고 생각한다.
1-2. 프로그램 특성상 특정 주제가 돋보일 수밖에 없는데, 나는 다른 주제를 주로 맡지 않았나. 그래서 노력이 안 보였다 한다면 서운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2. 팀장 3과는 재계약 이야기를 했고, 페이를 올려줄 수 없다고 해 유예 기간을 가진 것이다. 하지만 메인도 곧 잘린다고 들었는데, 떠날 메인에게 우리의 페이 인상을 위해 싸워 달라고 할 순 없지 않냐.
3. (이건 대답하지 않았지만 사실이다. 나는 이 사람을 ‘내 속마음을 터놓을 선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메인 작가는 1-1과 1-2에 대해 “너의 노력과 성과를 알고 특정 주제를 너에게 맡기지 않은 건 잘못한 것 같”단다. 더불어 2-1에 대해선 “너희들 페이 문제는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긴 하지”라며 선을 긋더니, “나는 여기 남아 더 일하기로 했다”는 소식까지 전했다.
아... 그럼 계속 이 팀의 메인 작가로 남기로 했으면서, 후배 작가를 내보낸다는 팀장 의견에 동의했다는 건가? 이번만큼은 후배들 페이를 올려주어야 한다고 이야기 해주는 건 바라지도 않지만, 적어도 작가를 그렇게 홀대하는 걸 반대도 안 했단 말인가. 저게 뭐 떳떳하다고 나한테 얘기하고 있는 걸까.
나도 짧게나마 메인 작가 자리를 경험했고, 내 후배들을 가르치고 챙겼던 적이 있다. 서브 작가로 후배를 대하는 것보다 책임감도 컸고 팀에 싫은 소리도 할 줄 알아야 했다. 물론 이게 의무는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선배라면 ‘널 위해 해 줄 수 있는 건 없고, 그러게 평소에 잘했어야지’ 같은 말이나 그런 뉘앙스를 풍기는 행동은 안 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선 위로와 격려를 해야 한다. 조금 더 어른이라면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얘기도 얹겠지. 그러면 ‘우리 모두 일개 프리랜서일 뿐’이라는 괜히 서러운 서사를 만들어서라도 선배를 이해하는 후배가 되는 것이다.
그날 메인 작가의 말들은 변명에 불과했다. 페이를 올려달라고 한 내가, 새 팀장에게 좋은 첫인상을 주지 못한 내가, 전임 팀장에게 꼭 함께 가야 할 작가라는 추천을 받지 못한 내가 이렇게 물러날 만했다고 기어코 주장함으로써 그가 얻는 건 무엇이었을까.
그래서 나는 그 순간 단 하루도 더 머물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 밤 그 대화 후 헤어지면서 메인 작가는 말했다. 결정하면 이야기해달라고. 팀장에게 말하기 어렵거든 내가 대신 전달해줄 테니 나에게 이야기해달라고.
잘 들어가시라고 인사를 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내 이야기로 당신이 조금이라도 권위를 세울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끝까지 내 고민과 결정을 당신에게 먼저 말하지 않을 것이다.
당장 나오기로 결론을 짓고 단톡방을 조용히 나왔다. 그리고 주말 내내, 함께 고생했던 서브 작가와 제작 피디들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갑작스레 나오게 된 건 오히려 덤덤했는데, 나 대신 화내고 속상해해주는 것 같은 메시지엔 울컥했다. 우리는 새 팀장이 부임하고 새 구성원들이 올 것을 염려하는 한편, 그럴수록 업무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서로 힘이 되자 다짐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이 프로그램의 제작진으로 일하며 내가 얻은 건 사람, 배운 것도 사람이다. 특히 배운 것이라면 후배를 위해 앞장서 싸워주진 못할 망정 치졸해지지만은 말자는 것.
메인 작가는 나를 포함한 서브 작가들에게 종종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가깝지는 않지만 이 정도면 괜찮지 않냐’고. 문득 헤어진 후배들과는 어떤 관계인지, 유지하는 인연은 있는지 궁금해졌다. 좋은 선배로 여겨질 거라는 굳건한 착각은 내겐 그 밤 그 대화처럼 황당하고 서늘하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