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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탕국 Apr 30. 2022

방관이란 이름의 또 다른 가해

<미디어 재판>


할리우드 스타 조니 뎁과 앰버 허드의 명예훼손 재판이 시작됐다. 미국 버지니아주에서 약 6주간 진행될 해당 재판은 미국 케이블 채널 Court TV를 통해 생중계된다. 유튜브에 '조니 뎁 재판'과 같은 검색어를 써넣으면 지난 재판을 그대로 볼 수 있는 이유다. 이 때문인지 우리나라 언론에서도 꾸준히 관련 기사를 쓰고 있는 중인데, 유독 한 언론사가 편향적인 헤드라인 아래 허드의 거짓말 의혹에 대해서만 보도하고 있어서, 이후 허드 측의 증언이 시작되어 분위기가 전환되면 어떤 입장을 취할지 궁금하기도. 물론 이번 재판이 명예훼손 재판이기에 허드의 주장이 거짓으로 밝혀지면 허드에게 불리한 영향이 있을 거라는 해석은 있지만, 그게 지난 2020년 영국 법원이 인정한 뎁의 가정폭력 혐의를 뒤집는 근거는 아닌 만큼 언론이 신중하게 보도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언론이 어떻게 보도하느냐에 따라 여론도 방향키를 잡기 마련이다. 그러니 조니 뎁 측이 그렇게 언론에 자신에게 유리한 내용을 흘렸던 것 아니겠는가.


사실 두 할리우드 스타의 재판 내용보다도 놀라운 것은 이 재판이 TV 채널을 통해 고스란히 생중계된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재판 생중계라고 하면 지난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심판 정도밖에 기억나지 않는데, 미국엔 아예 재판을 중계하는 채널이 따로 있다고 할 정도니 이걸 다분히 ‘미국적’이라고 봐야 할지에 대해선 여전히 의아하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언론이 재판에 집중하면 대중의 관심도 증가한다는 것,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언론은 그날의 화젯거리를 보도한다는 것, 한번 형성된 여론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었던 일을 전달하는 것에 불과한데 무엇이 잘못되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변명으로 내세우기엔 미디어는 너무나도 방관자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또 다른 가해행위를 해왔다.



[미디어 재판. Trial by media. 2020]

총 여섯 편으로 이루어진 다큐멘터리 시리즈는 실제 사건에 미디어가 어떻게 개입했는지, 그로 인해 여론은 어떻게 술렁였는지, 결과적으로 판결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눈길을 끌었던 것은 1편 ‘죽음의 토크쇼’와 5편 ‘환호하는 구경꾼들’로, 사건이 한창 주목을 받을 땐 흥분하며 달려들다가도 흥미가 떨어지거나 문제가 발생할 것 같으면 나 몰라라 하는 미디어의 이중적인 태도가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재미 본 사람은 있어도 책임질 사람은 없다


일반인 출연자의 충격적이고 자극적인 사연은 미디어의 메인 재료가 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과거 많은 인기를 끌었던 <화성인 바이러스>,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와 같은 프로그램이 이에 해당된다. 미국에선 이미 90년대부터 우리나라 프로그램의 수위를 훌쩍 뛰어넘는 방송이 인기를 끌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일반인들의 선정적인 비밀 고백을 메인 재료 삼은 <제니 존스 쇼>다. 다큐멘터리 1편 ‘죽음의 토크쇼’는 1995년 3월, 이 프로그램에 출연해 동성 친구 스콧에게 깜짝 사랑 고백을 받은 조나단이 프로그램 출연 3일 후 스콧을 살해한 사건을 다룬다. 조나단의 정신질환적 요소와 알코올, 약물 복용이 친구를 살해하는 극단적 행위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지만, 프로그램 출연이 트리거가 되었음도 부정할 순 없었을 터. 황당한 것은 이 재판이 생중계된 Court TV 채널을 소유한 워너브라더스가 <제니 존스 쇼>를 기획한 곳이라는 것이다. 사건 전후로 화제성과 시청률을 모두 챙기며 당연히 상업적 이득을 얻었겠지만 법은 이들의 책임이 없다고 판결한다.

<제니 존스 쇼> 진행자 제니 존스(좌), 조나단과 스콧이 출연한 토크쇼 장면 (우/미방영) / 이미지 출처: MBC 뉴스


5편 ‘환호하는 구경꾼들’의 내용은 더욱 끔찍하다.  1983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작은 해안마을에서 집단 성폭행 사건이 일어난다. 피해 여성은 어린 두 딸이 살아갈 미래의 세상이 더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에 재판을 결심하고, 여기에 언론이 관심을 가지면서 사건은 하루가 멀다 하고 미디어를 통해 보도된다. 여론이 들끓자 이것이 돈이 되겠다고 생각했을 CNN은 재판 생중계를 제안하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 나쁠 것 없겠다는 다분히 이상적인 생각을 한 판사는 피해자의 모습을 절대 촬영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제안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증언대에 나선 피해자의 이름과 주소 등 개인정보를 확인하는 과정이 고스란히 중계되면서 재판 생중계는 오히려 '신상 털기'의 장을 열어준 셈이 된다. 다큐멘터리에도 출연한 해당 판사는 자신의 판단이 어리석었음을 깊이 후회한다. 하지만 역시나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는다.


언론은 프레임을 만들고 대중은 휘둘린다


해안 마을 집단 성폭행 사건은 언론에 의한 프레임이 어떻게 여론에 작용하는지, 언론이 방관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2차 가해의 장을 열어주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가해 남성들이 포르투갈계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언론은 이를 연일 강조한다. 포르투갈계 이민자에 대한 편견 여론이 조성되고, 이에 반발한 포르투갈계 이민자들은 집단 시위를 진행한다. 그리고 언론은 이를 하나의 현상으로 그대로 보도한다. 어느덧 집단 성폭행 사건은 '거대 미국 사회의 이민자 핍박'으로 프레임화 된다. 또 한편에선 '무고죄 논쟁'이 치열하다. 가해자 측 변호사는 피해 여성을 몰아가는 질문을 퍼붓고 이는 고스란히  TV로 중계된다. 이에 대한 대중의 목소리라며 언론에 송출되는 인터뷰엔 '그 여자는 왜 그 시간에 혼자 술집에 갔느냐', '합의 하에 즐겨놓고 나중에 강간이라고 신고하는 경우도 있다'는 2차 가해가 가득하다.

198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 일이라지만 기시감이 드는 것은 우리 언론 역시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떠오른 사건은 1964년, 억지로 키스를 시도한 남성의 혀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성폭행 피해자에서 오히려 가해자가 되었던 최 모 씨 이야기다. (‘56년만의 미투’로 지난 2020년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당시 법원은 정당방위를 인정하기는커녕 '피고와 결혼해 살 생각은 없느냐', '처음부터 피고에게 호감이 있었던 것 아니냐'라며 심각한 2차 가해를 했고 언론은 이 내용을 그대로 보도했다. 최 씨는 6개월간 구금된 채 수사를 받았고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 판결을 받았다. 불과 몇 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고위공직자의 '미투 사건들'도 마찬가지다. 당시 우리 언론이 어떤 프레임을 만들었고 그 과정에서 어떤 2차 가해가 이뤄졌으며 대중은 어떻게 휘둘렸는가를 생각해보면 과연 이것이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인가 되짚어보게 된다.


관심이 사라진 자리엔 상처만 남는다


사건에 대한 미디어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판결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이는 분명 판결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친다. <제니 존스 쇼> 사건 4년 후인 1999년, 미국 법원은 토크쇼 제작사인 워너브라더스에 '스콧 유가족에게 2500만 달러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고, 출연자에 대한 제작진의 세심한 보호의 필요성이 화두에 오르기도 했다. 해안 마을 집단 성폭행 사건의 경우, 여성 단체의 지속적인 관심과 목소리로 인해 성폭행에 직접 가담한 포르투갈계 남성 4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원하는 판결이 나왔다고 해서 잘 마무리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이후 워너브라더스는 미디어에 대한 자유를 주장하며 항소했고 법원은 이를 받아들였다. 결국 제작사는 스콧 유가족에게 어떤 도의적인 책임도 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을 보도한 언론은 거의 없었다. 집단 성폭행 사건의 피해 여성은 재판 이후 플로리다로 거처를 옮겨 새 삶을 시작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사건 발생 2년 후 알코올 복용 상태에서 차를 몰다가 전신주를 들이받아 사망했다. 피해 여성의 사망을 보도한 언론은 없었다.

미디어의 스포트라이트가 사라진 후 이들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가해자인 조나단 역시 미디어의 피해자였다는 점, 평생의 터전을 뒤로하고 완전히 새로운 곳에서 홀로 새 삶을 개척해야 했던 피해 여성의 막막함은 어느 언론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오롯이 개인의 과제와 상처로 남았다.  


‘중립 기어’는 과연 객관적인가


어떤 사건이 여론을 들끓게 만들 때 우리는 흔히 ‘중립기어 박고 본다’는 말을 한다. 어느 쪽의 편도 들지 않은 채로 사건이 진행되는 것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지켜보겠다는 의미다. 언론 보도에 있어서도 이런 태도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조니 뎁과 앰버 허드의 재판도 마찬가지다. 여러 재판 내용 중 앰버 허드의 거짓말 의혹만을 골라 보도하는 것은 과연 ‘있는 내용을 그대로 보도하는 언론’에 불과한가? 폭행 가해 혐의가 인정된 조니 뎁과 그 피해자인 앰버 허드가 서로를 폭행 가해자라고 주장하는 것을 vs 형식으로 나열하는 기사는 ‘중립 기어’를 박은 제삼자적 입장인가?

‘중립 기어'를 놓은 채로 달려 나갈 순 없다. 옳고 그름에 대한 가치 아래 선택을 하는 것이 바로 언론의 역할이다. 판을 깔아주고 쓱 뒤로 빠진 채 방관하는  행위가 더 이상 오락성이나 공공의 이익으로 포장될 수 없음을, 또 다른 가해 행위라는 것을 더 많은 언론이 예민하게 인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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