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나더 라운드>
브런치에 한참 글을 쓰지 않았다. 오랜만에 접속해 그간 확인하지 않은 알림을 살핀다. 그중 여럿이 한동안 글을 올리지 않았다는 브런치의 애교가 섞인 주의 메시지. 최근 도착한 ‘작가님이 사라졌습니다ㅠㅠ’라는 메시지는 꾹 밀어둔 게으름을 돌연 공격한다. 쓰지 않는 데엔 여러 가지 변명이 있다. 바빠서, 소재가 없어서 라는 말은 너무 일차원적이다. 나는 몰아치는 일을 마감 한 번 어기지 않고 해내면서도 넷플릭스와 디즈니 플러스, 쿠팡 플레이에 애플 TV까지 야무지게 챙겨봤다. 부지런히 학교 중앙도서관과 전자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었다. 여전히 한 달에 한두 번쯤은 공연도 본다. 향유한 콘텐츠만도 이토록 많은데 왜 나는 글 한 편 올리지 않았나. 보다 나아가 이차원적인(?) 변명을 해보자면, 예전만큼 감동하지 않는다. 무에 가까운 상태에서 거의 모든 것을 신기하게 받아들였던 지난날을 그리워하며 막상 쓸 땐 그다지 잘 썼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리뷰를 뒤적이다 ‘나중에 하자’며 또 손 놓아 버린다. 흠뻑 감동하고 열렬히 예찬하다 결국 기록하고 공유까지 해야만 직성이 풀리던 시절이 때론 어마어마하게 먼 옛날처럼 아득하다. 이렇게 살다 지는 걸까. 세상엔 감동할 게 너무 많아, 말의 무게를 모른 채 함부로 떠든 날이 그립기도 한 건 나도 나이가 들었다는 걸까. 반복된 무기력이 나를 짓누르는 와중에 그래도 한번 끙-차 힘을 내 기록하고 싶은 영화를 봤다. 지금껏 주절댄 시답잖은 얘기도 수만 피스 퍼즐이라는 내 인생에 빠져선 안 될 조각들이려니 싶은 그런 영화다.
인생을 절반쯤 살았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100세 시대 기준에 맞춰 생각해볼 때 ‘절반의 시기’에 도달하려면 아직 10여 년이 남았지만, 40대나 50대가 된대도 스스로를 성숙한 어른이라고 생각하진 못할 것 같다. 불혹(不惑)과 지천명(知天命)이라는 말이 무색하다. 우스개 소리로 ‘환갑에도 진로 고민하고 있을 거 같아’라곤 하지만 고민의 결과가 행동일지는 장담할 수 없다. 어제가 오늘과 다르지 않고 내일도 그럴 거 같은 허탈감은 과정과 결과가 없어도 어느새 내 마음 어딘가로 비집고 들어올 것이다. 10대와 20대의 힘과 아이디어, 도전 정신을 꿈꾸지만 30대인 지금도 나는 가끔 그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울 때가 있다.
영화는 청춘과 중년을 보란 듯 대비해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내일은 생각지 않는 듯 술을 들이부으며 깔깔대는 젊은이들 뒤로 곧바로 이 영화의 주인공인 네 명의 중년을 이어 붙였다. 고등학교 교사이자 친구 사이인 마르틴, 톰뮈, 니콜라이, 페테르. 차분하고 고급스러운 식당에서 니콜라이의 생일을 축하하는 자릴 갖는 그들의 모습은 안정적이지만 어딘가 따분하다. 수업과 학생들에 대한 열정을 느끼지 못한 지 오래. 하지만 다시 되찾고 싶은지조차 불투명해 보인다. 그러던 중 재미있는 가설이 이 지루한 테이블 위 안주로 등장한다. 우리의 신체엔 필요한 적정량의 알코올이 있는데, 현재 우리 몸은 그 적정량에서 0.05%가 부족하다는 것. 따라서 혈중 알코올 농도 0.05% 만큼의 수치를 유지하면 더욱 활기차고 창의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과연 이 가설은 진짜일까?
네 친구는 가설을 증명해보자는 굳은(?) 결의로 한 자리에 모인다. 시작은 나름 합리적이다. 지금의 매너리즘을 극복하기 위해 술을 마시는 것이니, 근무시간 중 때때로 섭취해 혈중 알코올 농도 0.05%를 유지한다. 저녁 8시 이후와 주말엔 금주한다.
이 얼토당토않아 보이는 실험에 따라 그들의 아슬아슬한 취중 수업이 시작된다. 네 친구는 쉬는 시간 틈틈이 술을 마시며 혈중 알코올 농도를 확인한다. 일정 수준을 유지해야 하니 학교에서는 계속 알딸딸한 상태다. 그런데 웬걸? 쓸모없는 내용을 가르치는 데다 재미까지 없다며 학생과 학부모의 항의를 받은 마르틴의 역사 수업은 어느새 아이들이 집중하고 참여하는 수업이 된다. 직접 체감하는 변화에 네 친구는 고무되고 그들의 실험 에세이 2장엔 이런 말이 남는다. ‘각자 다양한 양의 알코올을 섭취해 최적의 직업적, 사회적 수행능력 수준에 이른다’.
이 에세이를 적기 직전 그들은 술에 취한 듯 그렇지 않은 듯한 경계에서 훌륭한 연주를 하곤 했다는 한 피아니스트의 음악을 듣는데,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바로 이 부분이다. 각자 술의 효과를 봤지만 아직까진 반신반의하던 그들이 살짝 취기에 오른, 아마도 0.05% 정도의 혈중 알코올 농도를 유지한 상태에서 빚어낸 아름다운 선율을 듣고 비로소 알코올의 효과를 확신하는 순간. 그들은 환호하거나 반기지 않는다. 가만히 음악을 들으며 눈은 우는 듯 하지만 입가엔 옅은 미소를 띤 마르틴의 얼굴에선 이제야 이 따분하지만 어쩔 줄 몰랐던 매너리즘을 극복하는 방법을 찾았다는 안도감 같은 것이 읽힌다.
마르틴은 술의 힘을 빌어 데면데면했던 아내와의 관계 회복을 위해 용기를 낸다. 수업은 날로 재미있어지고 학생들은 마르틴의 한 마디에 신중히 귀 기울이고 열렬히 반응한다. 창의적이고 활기찬 사람이 되기 위한 ‘혈중 알코올 농도 0.05% 유지 실험’은 실패 없이 이어지고, 네 친구는 어느새 고삐가 풀린 듯 더 많은 양의 술을 들이켠다. 하지만 과유불급이라 했던가. 톰뮈는 모든 교사가 모인 회의 시간에 잔뜩 취해 나타나 술주정을 하다가 실직자가 되고, 마르틴은 술에 취해 집 앞 거리에 나뒹군 채로 밤을 보낸 추한 모습을 가족에게 들키고 만다. 분명 실험을 시작할 때만 해도 ‘우리처럼 통제를 하며 마시는 것은 알코올 중독이 아니’라고 했던 말이 무색하다. 술의 도움을 받아 잠시 반짝였던 삶이 술 때문에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결국 술이 매너리즘의 해방구가 아님을 깨달은 네 친구의 다음 스텝은 어디로 향할까. 다시 밝은 곳으로 나아갈 다음 스텝이라는 게 있긴 한 걸까. 아마 톰뮈의 선택은 그 불안감 혹은 허탈함을 해소하지 못한 결과일 것이다.
내일은 또 어쩌지 싶어도 시간은 부지런히 흐르고 어느새 학생들은 졸업을 한다. 한 손에 술병을 들고 거리를 요란하게 만드는 모습은 영화의 시작에 흐르던 청년들을 떠오르게 한다. 톰뮈를 보내고 둘러앉아 시간을 보내던 세 친구는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를 맘껏 발산하며 졸업을 자축하는 학생들과 마주하고,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그들 속에 섞여 술을 마시고 춤을 춘다. 자유분방하게 몸을 놀리는 마르틴의 모습이 이 영화의 절대적 명장면으로 꼽힌다. 전직 댄서였다는 배우 매즈 미켈슨의 이력을 알면 더욱 흥미로운 이 장면엔 더 이상 술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저 오늘에 충실하고 순간을 예찬하는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이미 그가 이 춤판에 들어서기 전, 맨 정신으로 아내와 문자를 주고받았다는 것도 중요하다.
영화의 처음엔 청년과 중년이 대비되고 마지막에 이르면 이들이 한 공간에서 마시고 즐기지만, 마르틴은 이들 사이에 온전히 섞이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과거의 에너지를 갈망하던 중년의 모습을 보여주었음에도 청춘을 예찬하는 영화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마르틴은 수많은 청년들 사이에서 스스로에 취해 조금은 고독하게, 하지만 멋지게 순간을 즐긴다.
주변의 청춘처럼 모든 걸 내려놓고 즐길 수는 없지만, 다시 내일이 되면 짐처럼 쌓인 따분함에 짓눌릴 수도 있지만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 지루하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을. 매너리즘의 웅덩이를 밟았을 때 그 자리에서 허덕이지 말고 다음 스텝을 내딛으면 축축하게 젖었더라도 일단은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세상엔 감동할 게 너무 많다는 지난날 내뱉은 말의 무게를 오늘을 충분히 향유한다는 마음으로 조금 덜어볼 수도 있겠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