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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일근 May 18. 2022

스티브 잡스에게 배우다

디자인 First

스티브 잡스에게 배우다


연구소장에서 갑자기 사업부장으로 발령을 받고는 사업운영에 대한 자료도 찾고 조언도 많이 구했다.  그중 스티브 잡스의 자서전은 내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줬다.  2011년 말 잡스가 췌장암으로 사망한 뒤  월트 아이작슨이 출간한 책이다.  나는 IT사업부장에 부임한 2012년 말부터 이 책을 옆에 두고 시간이 날 때마다 읽었다.  내가 가장 영향받은 구절이 있다.  그는 제품을 만들 때 보이는 부분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부분도 정성을 들여 철저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예를 들면 매킨토시를 내놓을 때 디자인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이렇게 비유를 들며 강조했다.


"아름다운 서랍장을 만드는 목수는 뒷면이 벽을 향해 아무도 보지 못한다고 해서 싸구려 합판을 쓰지 않아요.  목수 자신은 알기 때문에 뒤쪽에도 아름다운 나무를 써야 하지요.  잠을 제대로 자려면 아름다움과 품위를 끝까지 추구해야 합니다. “


당시의 LG 노트북을 살펴보니 후면 커버에 방열을 위한 공기 순환 홀이 너무 많았고, 고정하는 나사들이 겉으로 드러나 보기에 안 좋았다.  그 반면 애플의 맥북은 이런 홀들이 없었고  후면에 나사도 디자인적으로 매우 깔끔하게 처리되어 거의 보이지 않았다.  평소에 잘 보지 않는 밑면마저 멋진 디자인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노트북 개발팀과 디자인팀에게 홀과 나사가 보이지 않는 혁신적인 디자인을 해오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개발팀은 난색을 표했다.  그렇게는 물리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나 역시 독선적이고 저돌적이어서 그들의 주장을 무시하고 밀어붙였다.  디자인 연구소에 홀과 나사가 없는 디자인을 만들어보라고 주문했다.  IT사업의 존폐가 달린 위기상황이었기에 과감한 도전과 변화가 필요했다.


치열했던 3개월


나는 부임 후 3개월 동안은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대모산을 1시간 걸었다.  산행하면서 그날 해야 할 일을 머릿속에 정리했고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했다.  일원동 자택에서 여의도 사무실과 평택 공장으로 번갈아 출근하면서 메신저의 부서 대화창에 업무사항을 올리는 일로 하루를 시작했다.  요즘 같으면 직장 내 괴롭힘으로 고발당할 수도 있을 만큼 직원들 입장에선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엔 너무 절박했다.  적자 폭을 줄이지 못하면 사업부가 사라질지도 몰랐다.  정말이지 오로지 일만 생각하며 살던 시절이다.  내 인생 최고로 집중해서 일했다.  그 3개월간 사적인 대외활동을 모두 접었으니까.  사업부장이 술도 끊고 미친 듯이 일을 하니 직원들도 초 긴장했다.  내가 지시한 것을 이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디자인 first!


내 머릿속에는 디자인을 혁신하고 무게를 줄이겠다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최우선은 디자인이었다.  나는 TV연구소장 시절에도 디자인에 관심이 많았다.  디자인 연구소 사람들과 늘 친하게 지냈고  디자인 연구소에 자주 방문해서 저녁을 함께 했다. 나는 노트북의 새로운 디자인을 젊은 디자이너에게 맡겨보고 싶었다.  그들에게 개발상의 문제는 생각하지 말고 디자이너로서 만들고 싶은 노트북을 디자인해보라고 지시했다.


이전에 TV를 개발하며 느낀 점이 있다.  디자이너가 만든 디자인이 개발팀으로 넘어가면 생산을 쉽게 하기 위해 많은 부분 수정을 요청해온다.  이러다 보면 디자인이 많이 변형되고 애초에 좋았던 디자인도 그저 그런 디자인으로 전락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다들 디자인이 중요하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 현장에선 엔지니어의 파워에 밀려 디자이너의 의견이 묻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애플은 다르다.  완성된 디자인을 엔지니어들이 쉽게 바꾸지 못한다.  디자이너의 결정이 엔지니어의 의견보다 우위에 있고,  이런 문화가 회사 내에서 공감대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나는 바꿔보고자 했다.  디자이너에게 일단 만들고 싶은 대로 디자인을 해오라고 특별히 지시했다.  그렇게 새로운 LG 노트북의 디자인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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