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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알 May 04. 2016

불평등과 자유 : 루소의 이야기

<인간불평등기원론>과 <사회계약론>을 읽고 

#0. 시작하면서 : 산만하고 정신없는 글임을 미리 밝힙니다. (주의/경고) 


루소를 읽고 머릿속에서 여러 직관들을 마주쳤다. 루소의 이야기는 정치, 철학, 경제, 문화 등 세상의 여러 이슈들의 접점 위에 있었다. 그 깊이와 중요성만큼 내 직관들은 강렬했으며, 또 그 강렬함만큼 내 글쓰기의 고통도 커졌다. 도저히 순서와 위계를 잡을 수 없는 귀중한 생각들을 쓰려다보니, 과감히 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만족스러운 구성을 만들지도 못했다. 이는 글 쓰는 이로써 나의 절절한 한계지만 그렇다고 그 직관들과 루소가 가치를 잃는 것은 아니다. 나의 직관인 만큼 내 나름대로 루소를 걸러서 읽으려고 했고 내 경험을 끄집어내기도 했다. 논리적인 흐름이나 일관된 주장을 목적으로 하는 글이 아니라고 먼저 밝힌다. 그만큼 이 글은 직관적인 글쓰기다. 굳이 제목을 붙이자면 <루소가 준 영감/직관의 기록> 정도가 되지 않을까?








#1. 루소를 읽기 전 내가 본 세상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딱히 근심과 걱정이 없었다. 그때는 세상의 냉혹함을 알지 못했고, 앞으로도 희망찬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 생각했다. 부모님은 언제나 나에게 대가없는 호의를 보내주었고 또래들도 무조건적인 호의에 익숙해져 서로를 대하곤 했다. 싫어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주변에는 언제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뿐이었다. 나는 공부를 꽤 잘했고 내 작은 세상이 요구하는 기준을 진즉에 만족시켰다. 내가 주변의 환경과 만들어 내었던 관계는 꽤나 재미있었고 조화로웠다고 생각한다. 물론 딴에 힘든 일도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대체로 아픔을 극복하면서 나는 밝은 세상을 믿었다.


언제부터인가 세상이 더 이상 예쁘고 아기자기하게 보이지 않았다. 내가 만들어낸 관계가 더 이상 기쁘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았다. 어릴 적의 나는 그 관계의 그물 속에서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었다. 내가 무엇을 하던 세상이 아이에게 주는 그런 종류의 온정과 이해의 눈빛이 나를 지켜주었다. 내 삶에서 가장 자유롭던 시절이었다. 점차 나이가 들면서 유연하고 말랑말랑했던 관계의 줄들이 조금씩 단단해졌다. 어느새 그것은 끈이나 실이라기에는 차갑고 튼튼한 사슬이 되어 나를 옥죄어왔다. 학교를 졸업하고 공식적으로 성인이 된 순간부터, 몸을 움직이는 것이 예전보다 힘들다는 것을 느낀다. 권력이니, 전통이니, 도리니 하는 것들이 이제 몸에 와 닿는다. 수많은 사회의 제약이 조금씩 피곤해진다. 생각해보면, 누구나 웃으며 행복할 수 있는 곳이 있을까 싶다.


우습게도 어린 시절에는 사람이 다 좋은 줄로만 알았다. 시스템이든, 교육이든, 부모님의 사랑이든 그런 보호막이 나를 감싸주어, 더럽고 구역질나는 세상이 튀기는 오물을 막아주었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관계에서는 ‘이해타산’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어린이는 항상 이득만 취하고 해를 취하지 않되 되는 존재였으니깐. 내 가족들은 이해를 초월하는 애정이 있는 공간이었으며, 친구들은 이해가 충돌하지 않는 선에서 친해졌다. 내 작고 연약했던 세계는 세상의 이해타산 법칙을 접하고 나서 조금씩 금이 갔다. 차가운 벽 앞에서 양심과 배려는 무력하다 못해 마모되고 잘게 갈렸다. 갈수록 가슴 따뜻해지는 일 만큼이나 냉소를 뱉을 일이 많다.

http://spiderstory.tistory.com/31







#2. 인간의 본래 성향보다 인간의 지금 성향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든 의문이다. 인간은 본래 착할까? 인간이 어떤 존재이기에 세상이 요지경일까. 성선, 성악 무엇이 우리의 본성인가 천재적인 사상가들과 과학자들이 셀 수 없을 만큼 오랜 시간 고민하고 논쟁해왔다. 루소를 읽고 그 인간들에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우리 본성이 애초에 선한가 악한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한 명의 인간으로서 마주하는 현 세상에서 우리가 어떠한지를 따지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본성을 알았다고 해서 그것이 변하지 않는다고는 누구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루소가 보기에 우리는 타락했다. 오랜 시간을 거쳐 사회가 커지고 곳곳에서 이해의 충돌이 일어나면서 우리는 서로를 시기하고 미워하게 되었다. 이익 손해의 거미줄이 사람을 타락시킨 것이다.


“인간의 영혼은 사회 속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수많은 원인에 의해 숱한 지식의 오류의 획득에 의해, 그리고 실체의 조직에 생긴 여러 가지 변화와 정념에 가해진 계속적인 충격으로 인해 애초의 모습이 변질되어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 33쪽
“우리는 인간사회를 어라든지 찬미할 수 있으나, 그 사회는 결국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면서 서로 미워하고 겉으로는 상부상조하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서로가 가능한 모든 해를 끼치려고 한다는 점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 172쪽
“이처럼 우리는 동포의 손해를 통해 자기이익을 찾고 한쪽의 파멸은 대부분 다른 쪽의 번영을 가져온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 172쪽
“누군가가 나에게 사회는 각자가 타인에게 봉사함으로써 이득을 보게끔 되어 있다고 대답한다면, 나는 해를 끼침으로써 더 많은 이득을 얻지 않으면 그야말로 다행이라고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적어도 정당한 이익이 부당한 수단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능가하는 경우는 결코 없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 173쪽


루소 말대로 자연이 정말 좋은 것이고 돌아가야 할 것인지는 동의할 수 없지만 그 이외에 루소의 관점과 감정에 공감한다. 자신을 희생하는 인간이 영웅으로 묘사되는 것은 신화나 전설의 이야기다. 현실에서는 그런 인간을 무엇이라고 부르지? 멍청이라고 부른다. 그런 상상 속의 이야기에서는 희생적인 영웅이 시련을 극복하고 희생에 대한 보답을 받는데 반해서 현실에서는 그런 보상 따윈 없다. 땅 위의 재화가 무제한인 것도 아니고 사람의 욕심을 제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보상을 위해서 필요한 이익의 양이 순식간에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라. ‘양심’을 위해서 ‘욕심’을 억누르고 보상을 마련할 수 있을까? 인디언 속담에 양심은 삼각형이다.

수많은 충돌과 외면을 반복하면서, 우리의 양심은 무용지물이 된다. 그것이야말로 루소가 말하는 사회 속에서의 타락이다.






#3. 어지러운 세상, 낙원과는 멀리 떨어진 곳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행동이더라도 용기 있게 그것을 추구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는지. 타인을 위해서 내 이익을 포기하는 희생에도 대가가 필요하다. 그것이 우리의 집단적인 성격이다. 흔히 사랑, 칭찬, 만족감, 마음의 편안과 안식 같은 대가에 만족할 수 있다면 희생적인 삶을 살려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가는 삶의 생태계도 조금은 따뜻해지지 않을까. 그런 세상이 조금도 낙원에 가까울 것이다. 모두가 서로의 짐을 덜어주고 먼저 봉사하고 그 희생을 인정하고 존경하는 곳. 무한한 사랑과 자비의 벌판에서 누구하나 질투하지 않고 누구하나 불만 가지지 않고 누구하나 상처받지 않는 곳. 내 몫을 챙기려는 강박에서 해방된 곳이며 타인의 행동에 불안해할 필요가 없는 곳.


그러나 그런 낙원은 달나라에나 있을 법하다. 지구에서는 많은 이들이 손해를 두려워하고 자기 이익을 찾는다. 물질적으로 풍부한 상류층에서 궁핍한 빈곤층까지 모두 다를 것이 없다. 풍년을 한탄하는 사람들, 사람들의 죽음을 돈으로 계산하는 보험업계, 많은 사람들이 더 궁핍하고 더 위험해져야 웃는 월스트리트의 누군가,억압적이고 착취적인 체제를 계속 강요하는 폭군 지도자 김정은. 삶의 밑바닥의 생존 욕구부터 소유욕과 갈취욕까지 온갖 욕심들이 만들어내는 도가니를 보라. 송파구 세 모녀는 모두의 무지와 외면 속에서 죽었다. 지구와 달나라의 거리는 384,403km보다 훨씬 더 멀다.


우리는 이미 모두가 평등해야한다는 가상적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 누가 불평등한 대우를 그대로 받아들일까. 보답 받지 못하는 희생은 불평등한 처우다. 그런 대우를 받으면서 훗날 언젠가는 걸 맞는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 속에서 살아가기에는 세상이 너무도 날서 있다. 사회가 커지면 욕망은 겹칠 수밖에 없고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으며 누군가는 기뻐하고 누군가는 상처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 사는 세계만큼 불확실하고 복잡한 것이 또 있을까. 그 세계에서 앞일을 계산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당장 눈앞의 욕심을 따라가고 이익을 볼 확실한 기회를 잡고 싶어 한다. 모두가 기뻐할 수 있는 미래를 기다리기에는 욕심은 인내심이 없고 미래를 기다리지 못한다. 지금 이 순간의 즐거움이 중요한 것이다. 이런 경향이 곳곳에 베여있는 곳이 오늘의 엄정한 현실의 사회다. 폐허 같은 곳이다.


또한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도덕과 규율 밑에서 숨죽이고 있던 욕심을 폭발시켰다. 동시에 우리의 이해관계의 규모도 폭발적으로 커졌다. 이익을 추구해도 괜찮다는 자본주의의 공언은 우리 양심에 사형선고와 같았다. 시장이 열리면서 경제적 관계가 얽혀지고 이해관계는 이전보다 훨씬 복잡하게 꼬여갔다. 꼬인 세상에서 우리는 좋든 싫든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 시장 경제에서는 욕심이 양심을 집어먹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시장의 질서와 규칙이 있지만, 독점은 계속 발생하고 편법이 계속 나오며, 속임수와 기만, 거짓정보, 담합 등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인가. 누군가 이익을 보려 악덕스럽게 행동하면 거미줄처럼 연결된 세상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러워진다. 이 불편한 관계야말로 억압의 관계다. 사람들은 어느새 서로를 억압하고 억압받는 인연의 관계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다. 책의 제목처럼, 인간의 불평등은 어느 순간 태어났다.







#4. <인간 불평등 기원론> : 불평등하게 된 이유


이상이 내가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보고 떠오른 단편적인 세상이다. 이야기가 비관적인 것 이상으로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암울하다. 루소는 인간이 원래 행복했을 것이라 이야기한다. 그에 따르면, 한 명의 인간은 행복했을지 모르지만, 두 명의 인간은 덜 행복하다. 세 명은 더욱 그렇다. 사람이 많아질수록 각 개인에게 돌아오는 재화의 양은 줄어들기 마련이다. 사람이 무한히 늘어나는 것만큼 먹을 것과 원하는 것이 무작정 늘어나지는 않기 때문이다. 루소는 인간이 본래 홀로 떠돌았을 것이고 곧 자연과의 충돌, 다른 동물과 인간과의 충돌이 빈번해지자 집단생활을 시작한다고 한다. 같이 살면서, 우리는 혼자의 삶이 가르쳐주지 않았던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다른 사람의 존재를 알게 되고 나와 그들을 비교하기 시작한다. 비교, 즉 우열을 가라는 행위는 우월한 것에 더 많은 가치를 두는 것이다. 곧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우월함을 증명하고 싶어한다. 관심을 받기 위해 아름다움을 가꾸고, 소유욕과 우열의식으로 재물과 식량을 갈취한다. 그 순간부터 우리는 온전히 우리의 의지대로만 행동할 수 없게 된다.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고 타인이 원하는대로 스스로를 바꾸려한다. 이 허영심(vanity)이야말로 모든 불평등의 씨앗이다.


루소의 논리를 따라가 보면, 일단 불평등이 태어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처럼 보인다. 우리가 영원히 혼자서 자급자족하며 살 수 있었을까. 원시 상태에서 혼자 생활하던 인간들은 더 많은 자손들이 태어나고 생활영역에 겹치면서 공동 생활을 했다. 또한 그 안에서 생겨나는 비교의식과 욕심들 역시 이미 태어나버린 것이다.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 그 흐름을 다시 바꿀 수는 없다. 이 사실이야말로 인간이라는 종의 한계이자 현실이다. 우리는 과거를 바꿀 수 없는 것이다. 단지 더 나은 현실로 나아가기 위해서 바로 지금의 현실을 똑바로 보고 인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더 나은 현실’이라는 또 다른 이야기를 예고하고 있었다. 바로 <사회계약론>이다.


냉혹하고 암울한 이야기는 다 해놓고 그냥 끝내버리니 뒤가 참 찜찜하다... 개인적인 생각에, <인간불평등기원론>은 <루소생각 上>, <사회계약론>이 <루소생각下> 정도 되지 않을까. 결국 이 두 권의 책은 각각 현상 진단과 해결책이라는 영혼의 콤비가 되는 저서들이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읽고 생긴 문제의식을 계속 생각하기 위해서 나는 결국 이 책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5. 루소의 처방에는 뭔가 무서운 부분이 있다.


루소는 사회계약을 이야기한다. 과격하게 말하면, 루소는 공동체에 모든 것을 받치라고 한다. 루소 말로 하면, ‘각 구성원을, 그의 모든 권리와 합쳐 전면 양도하는 것’이다. 불평등의 심화 과정에서 생긴 억압과 상처는 모두 일반의지라는 거대한 존재 앞에서 모두가 같은 존재로 평등해지면서 사라진다. 아니 평등해진다기보다는 모두 다르면서 같은 존재가 된다. ‘공화국’이라는 집단의 주권을 이룰 때는 같아지면서, 서로 개인성을 확인할 때는 다른 존재가 된다. 그 질서를 따르는 구성원들은 비로소 불평등을 벗고 억압에서 헤어나올 수 있다. 모두가 일반의지인데 누가 누구를 어떻게 지배할 것인가. 아무리 힘센 누군가라도 모두를 지배하고 억압할 수는 없다. 결국 루소의 세계에서 누구도 다른 누군가에게 지배받지 않고 그들에 영향 받지 않으며 홀로 살아갈 수 있는 독립을 쟁취한다. 루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독립이다. 타인에게 억압받지 않고 좌지우지 되지 않고 자신만의 삶을 개척하고 추구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루소가 그가 살아생전에 소외된 많은 이들을 보며 느꼈고 사회계약을 고안한 이유다.


그렇다면 도대체 일반의지란 무엇일까. 친절하게 사전 해석을 가져왔다.


루소의 저서 「사회계약론」[1769]에 나타나 있는 공익의 핵심적 개념.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루소(J.J. Rousseau)에 의하면 국가란 그 구성원인 국민 개개인의 자유의사(自由意思)의 상호계약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그 계약에 의거하여 성립된 공적 인격(公的人格)의 의사가 곧, 일반의지(또는 일반의사)라고 했다. 다시 말해서 일반의지란 이기적인 개인으로서의 독립성과 사익성(私益性)을 버리고 사회계약의 당사자가 되는 공적 주체(公的主體)로서의 시민의 의지, 즉 시민에 의해 제정된 각종 법규범 등이 그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일반의지 [一般意志, general will, volonté générale] (이해하기 쉽게 쓴 행정학용어사전, 2010. 3. 25., 새정보미디어)


사전적 해석을 보아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어떻게 개인이 하나의 정신이 된다는 말일까.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우리 세포의 숫자만큼 각자 다르고, 우리가 살아온 방식과 살아갈 방식 역시 제각각 다양한데 어떻게 하나의 의지로서 모일 수 있는 것일까? 일반의지가 처음 주었던 인상은 영적인 것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모든 사람들의 생각을 모을 수 있을까? 그것을 가능하게 할 기술적인 방법보다는 ‘사람들을 마음을 어떻게 돌릴 것인지’하는 심리적인 방법이 궁금했다. 그 방법은 영적인 방식이 아니면 안 될 것이다. 정신적인 합체에 반감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역시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의 약물과 쾌락의 계층 세계가 떠오르는 것을 왜일까? 혹은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의 인류보완계획이 떠오른다. 모두의 마음의 벽을 없애기 위해서 lcl(이름도 link connected liquid)이라는 희한한 액체에 모든 인류가 녹아버리는 애니메이션의 결말이 슥 스쳐간다. 쉽지 않은 문제다.

루소의 대답에서는 전체주의의 냄새가 난다. 도덕적이지 못한 인간들에게 다른 사람의 자유를 지키라고 도덕을 ‘강요’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의 자유의 가능성을 덮어두는 것이 옳은 방법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우리가 너무도 타락해서 인간세상의 악을 스스로 정화하길 기대할 수 없다면 인위적인 ‘힘’을 만들 수밖에 없다는 루소의 생각이 이해가 된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진 국가는 치명적인 결점 때문에 스스로 파멸한다는 것을 나는 역사에서 보았다. 애국심에 동조하지 않는 자들을 모두 축출하는 불관용, 투닥거리지 않는 조용한 민주주의, 국가 안에서 파당이 없는 만장일치. 건성건성 박수를 쳤다고 장성택을 숙청한 위쪽 동네가 떠오르지는 않는가?

  자유인의 상징 조르바


  내가 루소를 오해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적 본성을 갖도록 ‘종교’나 ‘애국심’을 주창하는 루소가 내 눈에는 일견 모순적으로 보인다. 결국 종교와 덕성을 ‘강요하는’ 시스템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루소의 방식은 사람들이 모인 사회에서 윤리와 가치의 독점이 일어나게 할 수 있다. 어떠한 생각만이 합리적이고 좇아야 한다는 판단은 구성원들이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행동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망쳐버리지는 않을까? 그가 생각하는 자유는 억압받지 않고 타인과의 관계와 영향에 녹아버린 우리 자신을 ‘회복’하는 일과 연결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특정한 윤리를 중앙에서 강제하는 일은 결국 이미 존재하는 수많은 개인성을 조금씩 침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스인 조르바 같은 사람이 잘도 받아들이겠는가?






#6. 방종과 복종 사이에서 자유를 고민하라.

 

루소가 말한 것처럼 모두가 하나의 인격이 될 때, 억울한 사람이 가장 적게 나올 수도 있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 나온 세태를 생각해보면 일견 그의 방법이 효율적이고 설득력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억압의 현실을 피하려고 ‘자유’를 희생해서 평등을 이룩하는 시도일 수 있다. 나는 일반의지 안에서 인간이 가장 자유롭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아무리 공적 인격이라고 해도, 그런 방법은 나에게 어쩐지 인간이 보여주는 무수한 자유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것처럼 들린다. 또한 어떤 사항에 대해서 하나의 원칙을 강제하는 시스템은 필연적으로 자의적으로 이용될 위험이 있다. 그 일반의지가 가장 강력한 힘의 집합체이므로, 동시에 사람들이 가장 소유하길 원하는 대상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도저히 확신할 수 없다. 그는 일반의지로 힘을 모아 그것에 복종하면서 그 안에서의 자유를 누린다고 했는데, 과연 제도와 국가 안에서의 삶만이 진정한 자유인가. 정말 인간의 자유가 그런 것일까?

그렇지만 이 방법이 아니라면 저 이기적인 사람들과 희생자들을 어떻게 그대로 두고 볼 것인가. 자유를 위해서 자유를 손대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이 안타깝다. 내 딜레마는 정확히 이 지점에 있다. 자유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다. 욕심대로 행동할 수 없는 인간은 인간이기 이전에 동물로서 조차 대우받지 못하는 셈이다. 내가 가진 것들과 나와 연관된 여러 가지 것들을 마음대로 할 수 없을 때에는 분노가 올라온다. 동시에 나와 마찬가지로 모두가 그러함을 알기에, 그들의 권리를 존중할 준비가 되어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고 여겨왔다. 그러나 내 좁은 인간관계를 넘어서 이해관계가 무수히 얽힌 넓은 세계로 나와 보니 생각보다 어렵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공공성보다는 나의 이익을 추구하고 기만적인 행위의 가해자로 피해자가 되어 있다. 그들의 잃어버린 자유는 누군가 자유의 몫을 빼앗아 와야만 스스로 보상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영원히 고통 받아야만 하는 것일까. 그러기 않기 위해서, 루소가 보여준 것처럼 우리는 방종과 복종 사이에서 끊임없이 답을 찾기 위해 투쟁해야한다. 그것만이 정답이다.







#7. 루소와의 즐거운 시간 : 루소의 진단은 그럴 듯 했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과 <사회계약론>에서 그가 보여준 놀라운 통찰은 현대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내 경우, 삶의 많은 경험들이 루소의 불평등 기원론의 구절과 일치하는 순간이 있었다. 루소가 쓴 여러 구절에서 많이 공감하고 통탄했다. 루소를 읽는 과정은 힘들지만 매력적이었다. 직관을 중시하는 사람에게 루소는 경외와 좌절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사람이다. 그가 한 말은 거의 확실하게 이 세상의 한편을 묘사하고 있었고, 중의성이 담긴 문장들이 모여 확실한 논리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나는 내가 그의 말을 제대로 해석했는지 끊임없이 노심초사했으며, 수렁에 빠지지 않도록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했다. 그의 이야기는 너무도 많은 의미를 담은 해석과 의미의 도가니와 같아서, 한번만이라도 발을 삐끗한다면 내 길을 잃고 그 안에 빠져버리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이 에세이는 쓰는 동안 나는 흘려보냈던 내 직관들과 새로이 만날 수 있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루소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는 후한 평가를 내렸지만, 그 본성이 타락한 지금에 대해서는 박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 당시로부터 한참이 흘렀지만 여전히 우리는 새로운 불평등과 억압을 매일 마주한다. 그 속에서 우리는 우울해진다. 우리가 여전히 우울한 이유는 우리의 특성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우리는 여전히 허영 속에 살고 비교 속에서 고통 받기에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는 내가 입은 옷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 나의 행동을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는지, 관심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신경 쓴다. 어쩌면 그러한 것들이 우리의 생각 속에서 이미 내면화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 안에서 솟아나는 충만한 느낌보다는 타인이 채워주는 인정과 관심에 울고 웃는다는 바로 그 사실이 우리를 억압하는 진정한 불평등의 족쇄일 것이다. 결국 루소의 모든 이야기는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무엇보다 우리의 영혼을 치유할 것을 주장한 루소에게 경의를 표한다. 적나라하게 우리 스스로를 비판한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마지막 구절로 글을 마무리한다.


사실상 이 모든 차이들의 직접적인 원인은 바로 이런 데 있다. 즉 미개인은 자기 자신 속에서 살고 있는데, 사회인은 언제나 자기 밖에 존재하며 타인의 의견 속에서만 살아간다. 말하자면 자기가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을 타인의 판단에 의거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 1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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