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2편
위대한 작품이라고 꼭 논리적으로 완벽하지는 않다. 날서있는 통일성과 차가운 논리의 세계만이 삶의 영원성과 아름다움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런 식이었으면 세상에 남겨진 위대한 작품들은 모두 수리적으로 아름다움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그런 작품들도 있지만, 때로는 두루뭉술하고 맥락을 파악할 수 없어도 안개처럼 넓고 낮게 드리운 채로 삶의 진리를 포용하는 작품들도 있다. 털이 곤두서는 것만 같은 긴장감이나 빨려들어가는 몰입감이 없을 수도 있다. 당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가끔씩 흐리멍텅하기는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작품들이야말로 우리 삶의 오만 데를 다 건드리는 놀라운 오지랖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사막과 초원이 반쯤 섞여 있는 어딘가의 아득한 평원, 햇살을 수많은 낙엽 조각으로 부셔내는 바다와 수평선을 배경으로 삶의 시간들을 잘라내서 덕지덕지 기워 놓으면 그때부터는 자연과 인간의 이야기를 구분할 수가 없게 된다. 자연 속에 숨어 흐르는 슬픔의 향수처럼 오욕과 환희의 인간사도 이야기의 박동에 맞춰 은은하게 퍼지는 것이다.
<그리스인 조르바>가 바로 그런 이야기다. 내가 <조르바>의 정말 열렬한 팬이지만, 이 작품이 치밀한 계산으로 짜여진 것이라고는 도저히 못하겠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대체 무엇으로 이루어진 것일까. 나는 <조르바>를 쓰고 있는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떠올린다. 그도 <무기여 잘 있거라>의 마지막 단락을 39번이나 고친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그랬듯 컴컴한 골방 속에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창작의 고통에 방황했을까? 나는 그가 따스한 햇살 아래서 조르바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과 스스로 삶의 역사에서 뿜어져 나오는 영감을 그대로 적어 내려갔다고 생각한다. 급박하거나, 초조하거나, 고통스럽거나 하지는 않다. 그내면에 침잠했을 때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장면과 사람과 눈물과 웃음을 있는 그대로 적어 내려갈 뿐이다. 자유에 대한 설명, 인간세상에 대한 의문, 고향에 대한 찬양, 등 그는 이런 목표를 드러내기 위해 글을 쓰지 않는다. 그가 실존 인물 조르바를 생각할 때 튀어나오는 회상의 장면들을 종이에 꺼내놓을 뿐이다. 그러다보면 꼬장꼬장하고 두루뭉술한 목표들이 저속하고 구체적인 인물 속에 굴복하고 마침내 이야기가 남는다.
<조르바>는 두루뭉술해서 어렵다. <조르바>는 자유를 위한 설명문이나 논설문이 아니다. 하나의 중심 문장을 풀어내기 위해서 명확한 문장과 명확한 구성으로 뼈대와 살점을 채워 넣는 종류의 글이 아니다. <조르바>는 어떤 인물에 대한 기억과 작가의 삶에 대한 재구성이기에 온갖 훌륭한 진리들이 정돈되지 않은 채 널브러져 있다. 때로는 그 진리들이 서로 충돌하기도 한다. 아마 니코스 카찬차키스도 작품 속 모순과 충돌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독자들은 상당히 당황스럽다. 조르바가 정확히 무슨 말을 하는지, 조르바가 막 던지는 자유가 대체 무언지, 나(화자)가 이야기하는 잎사귀 너머 어둠이 뭘 뜻하는 것인지, 이 이야기 뒤에 숨겨져 있는 거대한 톱니바퀴가 대체 무엇인지 당최 헷갈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랑비에 옷 젖는 것처럼, 조르바와 나(화자)가 전하는 삶의 깨달음은 의식의 너머 울림의 형태로 시나브로 쌓이게 된다. 그렇게 26장까지 긴 여정을 마쳤을 때, 여정을 몇 번이나 반복했을 때, 나의 일상적인 삶에서 그 울림과 공명하는 장면을 만날 때, 쌓여왔던 의문들의 둑이 터져 감동이 쏟아져 나온다. 바로 위대한 문학작품의 힘이다.
<조르바>를 논하는 것은 더 어렵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확실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는 법이다. 아리송하고 두루뭉술한 것을 종이 위에 적어낼 수는 없다. 한때, <조르바>와의 완전한 결별을 위해, 모든 것을 뿌리 뽑는 글을 쓰려한 적이 있었다. 그때 확인한 바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는 크게 4가지로 (물론 무수히 많겠지만) 요약할 수 있다. 1. 자유란 무엇인가, 2. 인간이란 무엇인가, 3. 행복이란 무엇인가, 4. 세상이란 무엇인가. 단언컨대 이중에서 아무거나 하나만 골라도 30페이지를 넘는 논문을 써야한다. 더 자세히 다루려면 300페이지 책 한권씩을 써내도 모자라다. 그런 능력이 없거니와 그럴 열정도 없어서 부끄럽지만 바로 포기했다. 들이대는 것도 깜냥이니. ‘자유’에 대해서만 찾아봐도, 이사야 벌린의 자유,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 고대 서양의 자유, 한나 아렌트의 자유, 프리드리히 니체의 자유, 사회계약론자들의 자유, 칼 마르크스의 자유, 등 동서양의 모든 사상가와 한 번씩 결전을 해야 했으며 나는 매번 꼬리를 내리고 도망갔다. 나는 필사적으로 항변하고 싶다. 조르바는 저들의 이야기를 모두 건드린다. 나도 찾아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었다.
물론 조르바가 완전한 인간은 아니다. 내 아들보고 그렇게 살라고도 말 못하겠다. 뱃사람 신드바드 마냥 이리저리 쏘다녀서 나름의 개똥철학 하나 믿고 사는 사람이 아닌가. 그러나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떠했든 간에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조르바를 눈부신 매력을 뿜어내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나(화자)는 조르바를 우연히 만난다. 사실 ‘나’(충격적이지만 오그레라는 이름이 있다고 한다) 역시 매력적인 사람이지만, 작가는 독자가 그렇게 여기는 걸 원하지 않는 것 같다. 주저대고 회피하고 합리화하는 오그레에 맞서 조르바는 더 용감해지고 더 원시적이며 쾌활하고 결과적으로 더 매력적으로 그려진다. 오그레는 시종일관 조르바에게 감탄한다. 결국 이런 기묘한 권력관계의 그림이 완성된다. 그림은 크레타의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하고 그 풍경의 소실점에는 조르바가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뿜어내며 궁시렁대고 있다. 소실점에 서있는 조르바의 중력은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점점 강해져서 사상과 생각과 시선을 빨아들이는 블랙홀로 푹 꺼져버린다. 오그레도, 독자도, 작가마저도 조르바에 동화되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조르바는 비판이 어려운 무적의 캐릭터가 된다. 세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첫째 조르바는 너무 매력적이다. 그의 결점마저도 그를 돋보이게 한다. 둘째 그의 말과 행동은 워낙 중구난방이다. (작가 말로는 대지의 언어라는데) 비판을 하기 전에, 정확한 포인트를 집어내는 것이 어렵다. 셋째 포인트를 집어낸다고 해도 그가 슬쩍 던진 한마디에는 오랜 모순과 사례가 섞여 있다. 어지간한 내공이 없으면 말문이 턱 막힌다. 그런 이유로 책을 술술술 읽다보면 어딘가 마음이 불편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찝찝함은 조르바의 매력에, 대지의 언어술에 여지없이 흩어져서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확인하기가 어렵다. 조르바의 교란전술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단단한 발판이 필요하다. 발판을 어떻게 마련하느냐. 머리 아픈 사상의 늪에서 한참을 엉겨 붙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건 정말 보통 일이 아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