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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알 Oct 15. 2021

64세 김영희는 죽은 돼지를 끌고 35km를 걸어왔다

[냉전의 마녀들]을 읽고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9618145


정말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나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는 <칼의 노래> 유명한 첫 문장이다. 이 문장은 픽션 문장이지만 논픽션쓰기의 어려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장면들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개연성 넘치는 스토리가 물처럼 흘러가는 잘 쓴 소설은 정말 쓰기가 어렵다. 하지만 소설은 일단 '쓸 수는' 있다. 내가 장면을 풍성하게 하고 싶을 때는 뭐라도 넣으면 된다. 완전히 망해버린 묘사일지라도 앉은 자리에서 '묘사할 수는' 있다. 잘하기가 어려울 뿐.


논픽션은 사실, 실화, 역사를 다룬다. "그날따라 유독 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고 쓰기 위해서는 내가 쓰려고 하는 장소에 핀 꽃을 직접 눈으로 본 다음 그 선명도에 대한 객관적 판단을 위해 전문가의 진단을 받아야 하는 우스꽝스러운 처지에 처한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는 <칼의 노래> 첫 문장은 논픽션에서 쉽게 쓸 수가 없다. 이순신 장군이 거했던 섬이 정말 당대에 버려져 있었는지, 거주민은 없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500여년 전 과거의 일이므로 이 작업은 문헌을 통해 이뤄질 터. 이를 증명하는 문헌을 찾지 못하면 거짓된 문장이다.


논픽션은 윤리상 거짓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한 줄 서술을 위해서 엄청난 확인 작업을 요한다. <냉전의 마녀들> 3장 첫 문단이 이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1951년 4월 28일 토요일, 팰턴의 여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해 4월의 마지막 10일 동안은 제법 따뜻한 편이었다. 하지만 런던의 공기는 시민들의 건강에 직접적인 해를 끼칠 정도로 매우 악화된 상태였다. 이 날도 어김없이 건물들마다 뿜어대는 석탄난로의 매연이 런던 시내를 잿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네 문장이다. 꼼꼼한 독자는 눈치챘을 터 이 네 문장 안에 각주가 2개 달려 있다. 하나는 당시 런던 기후 데이터를 보여주는 인터넷 링크를 적시하고 있다. 또 하나는 1952년 런던 그레이트 스모그의 원인, 영향에 대한 논문을 인용한다. 이게 논픽션의 작법이다. 대개 여러 콘텐츠에서 도입부에 사용하는 공간 묘사에도 이정도 품이 든다. 4문장을 쓰기 위해서 논문 몇 편을 읽고 문헌 수십개를 찾아야 한다.


'재현'이라는 사실 놀랍도록 어려운 것이다. 내가 직접 확인하지 못한 세계의 한 장면, 한 순간을 무슨 자격으로 그것을 다 본 것처럼 쓴단 말인가. 그것이 사실인지를 내가 어떻게 증명한단 말인가. 이미 흘러가버린 세계는 언제나 언어보다 풍성해서, 언어로 그 세계를 재현해봐야 늘 한계가 있는 법이다. 그럼에도 재현을 원한다면 그 순간을 보고 듣고 경험한 사람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이미 너무 먼 옛날이라 인간의 수명 주기인 100년을 훌쩍 넘은 시기가 흘러버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기록, 문헌을 찾아야 한다. 그게 역사가의 일이다. 과거를 복원해서 '재현'하는 것. 과거를 복원해서 묘사하고 서술하는 것. 역사가는 연구자인 동시에 근본적으로 논픽션 라이터다.


그러나 문헌만으로는 반드시 한계에 부딪힌다. 영국사를 공부하다가 1598년 영국에 있었던 티버튼이라는 도시에서 큰 불이 났다는 문헌을 확인한 적 있다. 도시의 곳곳이 훼손되고 갑작스러운 재앙에 재산을 잃은 사람들이 망연자실했다고 한다. 땔나무를 살 돈이 없는 여자 거지들이 지푸라기를 모아 불을 붙이는 과정에서 불이 났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불을 붙이려했을까? 팬케이크를 만들려고 했다고 한다. 팬케이크가 먹고 싶어 지푸라기를 모아 불을 피우다가 도시가 다 탔다고? 이 거지들은 어떻게 됐을까, 확인해야겠다는 마음이 일었다. 그러나 다른 사료가 없었다. 영국 어딘가 사료 보관소 한 구석에 잠들어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찾지 못했다. 이 기구한 여자 거지들의 운명은 영원한 미궁 속으로 빠지게 됐다. 문헌에 없는 내용, 사실로서 객관적으로 증명해주는 근거가 없기에 어찌할 수가 없다. 어떤 경우에는 훗날 전해질 역사를 임의로 조작하거나 선동하기 위해서 거짓된 문헌을 남길 수도 있다. 이럴 때도 과거를 복원할 수 없고, 진실도 알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역사는 언제나 문헌을 통한 과거의 재현이며, 과거에 대한 추리이다. 문헌 사이 빈공간을 메워야 하기에 추리 과정이 필요하며, 자신의 추리와 의심이 합리적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논평적 문장이 등장한다. 이른바 역사가의 해설이고 해석이다.

다행히도 모니카 펠턴은 한국전쟁 당시 국제여맹의 북한 방문 상황을 상세하게 기록으로 남겨두었다. 저자는 이를 바탕으로 모니카 펠턴을 주인공하는 이야기를 재현해낸다. 모니카 펠턴이 그때 그 당시 그 곳에서 느꼈던 모든 감정들이 일기에 수록돼 있으니, 이런 소설적 서술이 가득찬 논픽션의 존재가 가능해진다.


"펠턴은 문화회관으로 들어가려다가 마침 주변에서 나무를 심는 북한주민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버드나무와 포플러나무의 어린 묘목으로 보이는 작은 나무들을 거친 황무지 위에 옮겨 심고 있었다. 폭격은 거의 매일 어김없이 반복되고 있었지만, 도시 재건사업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그들은 지옥 같은 현실 속에서도 미래에 대한 신념을 잃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인터뷰했던 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잃은 비탄과 최악의 환경 속에서도 "운이 좋다"고 말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미래라..." 팰턴은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동시에 저자는 역사가로서 논평자, 해설자의 역할도 겸한다. 팰턴이 전쟁 당시 북한에 들어가 안악과 신천 현장에 가서 현지 여성들의 피해를 조사하는 가운데 현지에서 '목소리 큰' 달변의 여성이 많았다는 대목이 나온다. 시골 여성들이 농업활동, 토지개혁, 문맹퇴치사업 등 당시 북한 정부가 시행하던 최신 정책들을 빠삭하게 꿰는 일이 가능한가? 팰턴은 이를 북한 정부의 프로파간다 작업의 일종이라고 의심했던 것 같다.


전쟁 적대국인 영국에서 모니카 펠턴 같은 인사가 자발적으로 들어와 전쟁 속 여성 피해를 조사한다고 하니 북한 입장에서 국제 여론을 호도하는 데 이보다 이용하기 좋은 제물이 없었다. 현지 조사 과정 중 북한 정부가 피해를 과장해 설명할 것을 명하며 여성들을 파견한다면 펠턴이 이를 진실이라 여기고 세계에 알리지 않겠는가. 그러나 펠턴은 여성 차별 시대에 영국 내 한 지자체의 도시개발공사의 사장까지 오른 엘리트였다. 팰턴은 실제 이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농촌에서 보이는 달변 여성'들을 의심했던 것이다.


그런데 역사가인 저자가 갑자기 이 부분에서 불쑥 등장해 이런 맥락을 설명한다. 어떻게 이런 일(사건, 역사)이 가능했겠는가, 질문을 던지는 것이 역사가의 또다른 임무다.


<<그러나 팰턴은 한국전쟁 이전 시기 북한의 벽촌지역에 이르기까지 매우 강력하고 광범한 선전선동활동이 전개되었고, 그 결과 상당수의 평범한 농촌 여성들까지도 북한사회 변화에 대해 논리적으로 말할 줄 알게 되었다는 사실까지 알 수는 없었다. ... 당시 북한에서는 벽촌의 평범한 농민들까지도 거의 매일 일상적으로 정치, 경제, 사회문제에 대한 토론활동에 의무적으로 참여해야만 했다. 독보회의 존재는 그 대표적 사례였다. 독보회란 한자의 뜻 그대로 당대의중요 신문을 읽는 모임이었다.>>


모니카 펠턴을 주인공으로 한 국제여맹의 시간 순 행적과 저자의 논평, 해설이 무작위로 중첩되면서 이 논픽션의 내러티브는 한 곳으로 흘러간다. 그 종착점은 ‘한국전쟁의 진실’이다. 발표 직후 소련군의 프로파간다로 폄하됐던 국제여맹의 보고서는 어느 정도의 진실을 담고 있는지, 모니카 펠턴을 비롯한 국제여맹 조사원들은 어떤 인간들이었는지, 당대 북한 지역이 어떤 피해를 당했는지, 눈물을 흘리며 피해를 호소했던 북한 여성들의 비극의 존재와 그 진위를 살펴보려는 휴머니즘까지.


그에 닿기까지 나란히 달리는 두 ‘모험’의 이야기가 때때로 서로 중첩하고 간섭하면서 파도처럼 넘실대기를 반복한다. 하나는 당대 엘리트 여성들이 북한의 여성들의 피해를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전쟁의 험지로 떠나는 인도주의적 모험 서사이며 영웅서사이다. 또 하나는 한국전쟁에 진실에 닿기 위해 2021년 한국 어딘가에 사는 저자가 내딛는 역사적 추리의 모험 서사이다. ‘진실에 이르는 모험’ 플롯을 적극 차용한 역사 논픽션인 것이다.


제러드 다이아몬드 <총, 균, 쇠>는 역사책? 학술서? 내러티브?


근본적으로 ‘서사’라는 측면에서 이 책이나 셜록 홈스 시리즈는 다르지 않다. 둘 모두 사건의 진실과 경위를 알아내기 위해 펼쳐지는 내러티브이다. 사실 재미있는 이야기는 대부분 이렇게 ‘추리를 담은 내러티브’이다. 내러티브는 인간을 대체 앞으로 무슨 이야기가 펼쳐질지 궁금해서 참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얼른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그래서 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알고 싶어 인간을 안달나게 만들어야 한다는 점에서 픽션과 논픽션은 다를 게 없다.


이 책과 셜록 홈즈가 다를 게 없고, 이 책과 명탐정 코난이 다를 게 없다. 픽션은 작품 전체 긴장감을 위해 복선을 군데군데 설치해둔다면, 논픽션은 그 자리를 이것이 정말 실화냐는 의심과 놀라움이 대체하는 경향이 있을 뿐. 진실을 위해, 사건의 전체적 경위를 위해,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를 알기 위해 독자가 서술자의 인도를 받아, 한발한발 나아가는 과정은 똑같다. 독자에게 ‘재미’를 느끼게 해야 한다는 것도 똑같다. 텍스트로 태어나 ‘독서 시장’에 내던져진 이상 읽는 이들을 읽게 만들고 이 텍스트를 읽어야 하는 이유를 증명해야 할 운명을 피할 수 없다. 


논픽션이나 픽션 모두 내러티브를 지향한다면 독자를 인도해서 전개를 한꺼풀씩 벗겨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저자가 증명하고자 하는 진실로 나가는 과정이 촘촘하고 그 논증이 합리적이라면 독자의 신뢰를 받게 된다. 그 과정에서 품이 많이 들더라도 이를 위해 애썼다면 독자의 존경을 받을 수도 있겠다. ‘아니 여기까지 조사를 해서 이렇게까지 썼단 말이야’라고 독자가 생각하게 만들면 된다. 저자가 이르고자 하는 진실이 독자에게 큰 울림을 준다면 더할 나위 없다. 이 말은 거꾸로 말해 독자의 신뢰, 존경, 관심, 애정을 받기 위해서는 위해서 언급한 종류의 콘텐츠를 쓰면 된다는 이야기다. 합리적이고 투명한 논증, 책장을 넘기게 만드는 서술과 전개, 한 줄을 쓰기 위해 쏟아 부은 노력들. 이런 항목에서 자신이 있다면 이를 공개하면 된다. 이런 요소 없이 애초에 독자의 신뢰, 존경, 애정, 관심을 받으려는 게 도둑놈 심보다.


한국 역사가들은 예전부터 엄청난 양의 문헌을 뒤지고 합리적 논증을 제시해서 과거에 대한 설명을 제시해왔다. 그런데 그들은 노잼이었다. 노잼을 자처했다. 그들은 셜록 홈즈나 명탐정 코난처럼 독자에게 흡입력 있는 텍스트를 내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미국에서 여러 역사학자들이 역사를 ‘재미있게’ 풀어낸 내러티브 논픽션을 발표해 퓰리처상 등 수상을 하는 데 반해 한국에는 그런 문화가 없다. 기본적으로 역사가는 연구자이기에 대중이 아닌 학계의 동료들을 상대로 하는 '연구'(콘텐츠가 아닌)를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총, 균, 쇠>가 우리 독서 시장을 휩쓴 지가 20년이 됐는데도 여전히 기가 막히게 잘 나간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자, 인기 비결에는 놀라운 학술적 발견을 내러티브로 풀어낸 데 있다는 사실을 아는 한국 역사학자가 얼마나 있을까? <총, 균, 쇠>를 보면 서장이 정말 흥미로운 덕에 어려운 설명이 이어지는 이후의 장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준다.


첫 장에서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1972년 7월의 어느 날 열대 섬 뉴기니 해변을 걷고 있던 장면을 회상한다. 그때 막 뉴기니 친구 얄리가 최초 등장한다. 우연히 그와 같은 방향으로 한 시간 가량 걷게 된 다이아몬드는 얄리가 번뜩이는 눈빛을 지닌 야심만만한 정치가라는 사실과 그가 고등학교까지밖에 교육을 받지 못한 토종 뉴기니인이라는 TMI를 술술 풀어준다. 얄리라는 친구가 질문을 던진다. <<왜 당신네 서구인들은 문명을 발전시켰는데 우리는 못 한 겁니까.>>


이런 식으로 질문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고 하는 전개는 익숙한 내러티브다. 그와 이야기를 나눈 해변의 장면 역시 전형적인 서사의 도입부다. 왜 해변일까? <우연히 해변에서 만나다니> 정말 <영화 같지 않나> 정말 제러드 다이아몬드가 얄리라는 친구를 해변에서 만났을까?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에 나올 것 같은 장면으로 시작하는 700쪽짜리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총, 균, 쇠>가 가진 이야기적 요소가 이 책을 학술서적이면서 ‘재미있는’ 콘텐츠가 되게 만들었다. 나는 <냉전의 마녀들> 저자가 반갑다. 우리 역사학계에도 이제 이런 내리티브의 중요성을 느끼는 연구자들이 등장하는 것 같아서 정말 반갑다.


나는 그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냉전의 마녀들> 저자는 서문에서 이렇게 밝혔다.


“그런데 내가 학부시절 우연히 접했던 미국의 전문 연구서적들은 역사학과 문학의 경계를 허물며 역사연구에 인간적 감성과 연구자의 상상력을 과감하게 불어넣고 있었다. 미국의 중국사 연구자인 레이 황과 조너선 스펜스의 저서들은 그 대표적 사례였다. 레이 황의 <1587 아무 일도 없었던 해>와 조너선 스펜스의 <왕 여인의 죽음>, <반역의 책>, <강희제> 등의 역사서는 수백년 전 사료에 대한 심오한 분석과 놀라운 역사적 통찰력을 보여주면서도, 마치 문학서적을 읽는 것 같은 충만한 독서의 즐거움까지 전해주고 있었다. ... 나 또한 언젠가 기회가 되면 반드시 레이 황이나 조너선 스펜스와 같은 글쓰기의 모험을 해보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한국에는 내러티브 논픽션의 개념이 없다. 반면 미국에서 내러티브 논픽션은 문학의 하위 장르에 속한다. 그렇기에 저자가 언급한 저 중국 역사책들은 어떻게 보면 모두 문학이다. 독자들 사이에 던져지는 모든 언어 콘텐츠는 문학이다. 한국은 이런 개념 없이 문학이 오로지 소설과 시의 영역으로 축소돼 있다. 그래서 논픽션이라고 해서 대충 정보만 펼쳐놓고 끝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 정보들을 가장 세련된 형태로, 독자에게 재미를 제공하는 형태로 가공하고 재구성하려고 애써야 함을 모른다. 연구 주제나 전달하려는 메시지와 별개로 내러티브가 콘텐츠의 질을 담보해준다는 것을 모른다. 이 책이 왜 재미있을까? 대중들이 이 책에 왜 빠져들까? 역사가로서 논평과 모니카 펠턴의 여정을 어떻게든 내러티브로 엮어내려고 했던 저자의 노력 덕이다.


내러티브 없는 세상, 사회, 업계


이렇게 과거를 재현하고, 진실을 전달하는 직업이 역사가 말고도 또 있다. 기자들이다. 그런데 오늘날 기자들이야말로 독자의 신뢰, 관심, 애정, 존경에서 가장 거리가 먼 존재다. 기레기를 넘어 기더기라는 소리가 나오고 있지 않나. 이런 멸칭은 기자로서 너무나 억울하다. 동료, 선배들 보면 다들 취재 열심히 하고 진실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데 이런 멸칭을 타파할 길이 있음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집단적 무기력에 대해서는 아무런 변명을 하지 못하겠다. 위에서 적어둔 것처럼 독자의 신뢰, 관심, 존경, 애정을 얻으려면 내가 전하고자 하는 주장이나 진실에 이르게 된 논증과정의 합리성, 거기까지 다다르는 데 들어간 시간과 비용을 공개하면서 최대한 독자를 매혹시키는 방식으로 콘텐츠를 제공하면 된다.


그러나 기자들, 편집국, 언론은 이런 과정에는 무게를 두지 않는다. 우리 언론은 결론에 이르게 된 과정은 기사에 담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박재영 고려대 미디어학부 교수가 쓴 <뉴스스토리>에서 보면 동아일보의 조국 전 법무장관 관련 보도가 일례로 나온다. 당시 동아일보는 조국 전 장관의 딸이 고등학생 때 영어 의학 논문의 1저자로 등재됐음을 밝혀낸 기사를 단독 보도했다. 이 기사는 댓글만 16000개를 받았으나 지난하고 충격적이었던 ‘조국 국면’의 포문을 제대로 열어제낀 보도였다.


<[단독]고교때 2주 인턴 조국딸, 의학논문 제1저자 등재>

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110&oid=020&aid=0003235918

동아미디어그룹 사내보에 나온 취재기를 보면 이 기사는 그 결론보다도 과정이 정말 기가 막히다. 먼저 말하자면 이 기사에는 보도까지 한 달이 걸렸다. 첫 시작은 황성호 기자였다. 그의 첫 시작도 제러드 다이아몬드만큼이나 극적이다. 황 기자는 당시 막 사회부 법조팀으로 발령 받았는데 불연듯 9년 전 경향신문에 실린 조국 전 장관의 인터뷰가 기억이 났다고 한다. <그의 딸은 외고를 거쳐 대학 이공계에 진학했는데, “나의 진보적 가치와 아이의 행복이 충돌할 때 결국 아이를 위해 양보하게 되더라”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했다>는 문장이 기사 말미에 실렸다. 황 기자는 이호재 기사와 이 말의 의미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박 교수의 책에 실린 해당 부분을 그대로 옮긴다.


<우선, 인터넷을 뒤져 조 장관의 딸로 추정되는 인물이 올린 자기소개서를 찾아냈고, 같은 아이디로 판매된 자기소개서, 이력서 등 6개 문서를 8만4500원에 구입했다. 두 번째 실마리는 자기소개서에 적힌 “단국대 의료원 의과학 연구소 소속 인턴십 성과로 논문에 이름을 올렸다”라는 문장이었다. 어떻게 고등학생이 영문으로 된 의학 논문의 저자가 될 수 있었을까? 일단, 그 논문을 찾아야 했다. 취재팀은 학술 아카이브에서 조 장관의 딸의 이름으로 검색을 해보았지만, 논문을 찾을 수 없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영문 ‘CHO' 로 다시 검색하다가 우연히 6쪽짜리 논문을 발견했다. 공저자가 6명인데 조 씨가 제1저자였다.


논문조사 작업은 취재팀의 또 다른 기자 2명이 맡았다. 객관적이고 냉철한 조사를 위해 논문 입수팀과 조사팀을 분리했던 것이다. 조 씨의 딸처럼 한영외고 출신인 신동진 기자는 동문의 도움을 받아 퍼즐을 맞추기 시작했다. 논문검증 취재 경험이 있는 김동혁 기자는 병리학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조 씨의 논문을 통째로 번역했으며 논문의 실험내용, 연구 기간, 제 1저자의 역할 등을 이중 삼중으로 확인했다. 핵심은 조 씨가 제1저자로 등재된 배경인데, 그것은 공저자들이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취재팀은 공저자들이 입을 맞추지 못하도록 하려고 동시에 이들을 접촉하기로 했다. 8월19일 오전, 취재팀 기자 2명은 천안으로 내려가 단국대 의대 장영표 교수와 또 다른 공저자를 같은 시각에 따로 만나서 장 교수의 아들과 조 씨가 한영외고 친구 사이이며 조 씨는 인턴을 2주만 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사실상 이 기자들은 탐정이었고, 이 내용은 추리 소설의 한 부분으로도 손색이 없다. 저 단독기사에는 <본보가 이 논문을 입수해 분석을 의뢰한 전문가들에 따르면> 외 A 교수, B 교수를 직접 만났다는 말 뿐, 어떻게 취재가 이뤄졌는지 나와 있지 않다. 논문을 통째로 번역해 논문내용, 연구기간 등을 확인한 김 기자의 노력은 독자에게 신뢰를 심어줄 수 있었다. 취재팀이 논문 당사자들끼리 입을 맞추지 못하도록 동시에 취재를 시도했다는 부분은 이 내용의 사실성을 증명해줄 수 있었다.


무엇보다 황 기자의 첫 직관부터 이어지는 분투기는 그 자체로 훌륭한 내러티브가 될 수 있었다. 이런 기사가 기자들을 기레기라는 억울한 저신뢰의 늪에서 구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사는 그저 “확인됐다” 정도로만 리드를 썼을 뿐 그 외에는 다른 기사와 구분되는 형식적 차이점이 보이지 않는다. ‘확인됐다’가 왜 특이한 것이냐고? 리드에서 확인됐다는 서술어는 엄청난 취재를 통해 언론사가 확신을 갖고 내놓을 수 있는 팩트를 발굴했을 때 쓴다. 그런데 그 사실을 기자들만 안다. 대중은 모르고. 그게 문제다. 공급자 중심의 사고틀이 문제인 것이다. 기자 개인이 저런 기사를 쓸 수는 없다. 저렇게 내러티브로 기사를 쓰면 편집국이 허용해주지 않는다. 업계 전반이 이런 생각 밖으로 나가지 않기에 우리 기자들의 취재 역량은 뛰어난 데도 ‘작품’은 나오지 않다.


사람을 만나는 여정이니까, 그런 여정이 돼야 하니까


왜 굳이 그렇게 써야 하냐고? <냉전의 마녀들>을 보라. 이런 방식이 아니었다면 독자들이 북한 여성들의 실상이 나오는 부분까지 이 책을 읽었을까? 북한 여성들이 전쟁에서 어떤 꼴을 당했는지 나오는 부분에서 더 충격을 받게 됐을까? 역사학자, 연구자들이나 봤겠지. 


이렇게 썼기 때문에 펠턴이 떠난 모험의 길을 독자가 따라간다. 펠턴이 만난 북한 여성의 참상도 함께 만나게 된다. 


전선이 아닌 후방 지역에 쏟아진 폭격. 터전이 문자 그대로 파괴된 사람들. 집이 없어 토굴을 파고, 거적대기로 비를 피하는 공간을 만들어 들어가는 사람들, 가족은 잃은 이들. 이렇게 삶을 꾸려가는 방식은 내셔널 지오그래픽이나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방영하는 오지 생존가들이 오지에서나 살아가는 방식이다. 전쟁 시기 한반도는 오지였다. 한국전쟁을 다룬 영화가 그 잔혹한 참상을 보여줬던 전선 지역뿐만 아니라 후방 역시 그랬다는 것이다. 폭격은 전후방을 가리지 않았다. 어느 순간 전쟁 당사자들은 군인, 민간인을 분별하는 행위를 스스로 그만뒀다. 한국전쟁은 그랬다. 그로부터 70년이 넘는 시간이 흘른 지금 우리는 그 사실을 모른다. 참상을 모르고, 아픔을 모르고, 아우성을 모르고, 분노를 모른다. 내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했는지 납득할 수 없어 분이 차오르면서 잃어버린 가족과 망가진 집과, 사라진 마을 앞에서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슬픔을 모른다. 


이 책을 읽은지 2주가 지났지만 아직 책에 나온 일화 하나를 잊을 수 없다.


국제여맹 조사원들이 황해남도 신천에 머물렀을 때 일화다. 전 세계 각지에서 조사회가 꾸려저 북한 지역 폭격에 따른 여성의 참상을 조사한다고 하니 북한 여성들의 관심을 끌었다. 여성들은 조사위원들의 숙소에 개인적으로 찾아왔다. 어느날 저녁 모든 방문객들이 숙소를 떠난 이후에도 여전히 마당 한쪽에 노인이 남아 있는 노인 한명을 발견했다. 하루 종일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그 여성의 이름은 김영희였다. 신천에서 35킬로미터 떨어진 금계리에 사는 64세 노파였다. 조사위원들이 해당 마을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일부러 찾아왔다고 한다. 김씨의 딸인 반동난은 조선로동당 열혈 당원이었고, 미군 점령 직후 체포됐다. 딸은 김씨에게 자신의 죽음을 너무 슬퍼하지 말라는 말을 전하고서 며칠 뒤 자식들과 함께 총검에 찔려 살해됐다. 


살해된 딸을 위해 무엇이라도 하고 싶다는 생각에 김씨는 조사위원들을 찾았다. 집 안에 한 마리 있던 돼지를 잡고서 말이다. 돼지는 당시 집안 최고 자산이었다. 김씨는 도살한 돼지를 끌고 35킬로미터를 걸어왔다. 체력이 팔팔한 나로서도 쉽지 않은 여정이다. 35킬로미터면 서울에서 수원까지 거리다. 그런데 조사단 일정이 지체돼 김씨는 그들보다 이틀 일찍 숙소에 도착했다. 돼지를 그 이상 오래 둘 수가 없어 그 고기를 전부고아원 아이들에게 나눠줬다. 김씨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죽은 딸을 대신해 조사위원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교 싶었는데, 이제는 돼지 하나 잡지 못하는 늙은이가 돼버렸다면서 스스로를 원망했다. 


펠턴이 느끼는 감정을 우리도 느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는 반문을 우리도 하게 된다. 우리의 일상은 언제나 우리의 예상 범위 안에 있다. 그 밖에 비일상의 영역이 있다. 우리에게는 일상이라는 세계가 실제 세계의 99%처럼 다가올테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비일상이라느 느끼는 세계가 99.9%보다 크다. 개인의 경험, 인식 밖에는 언제나 놀랍고, 기구하고, 슬픈 세계가 펼쳐져 있다. 인류의 최대 발명품은 글일지도 모른다. 내 인식 밖 세계가 언어, 문자로 정제되면 우리도 그 존재를 알 수 있게 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좁은 인식이 조금씩 넓어져 간다. 글로써 창작되는 콘텐츠는 인간을 그런 여정으로 이끌어야 한다. 


그 목표가 꼭 휴머니즘일 필요는 없다. 인간 삶의 단면을 포착하라는 뜻은 단순한 명령이 아니다. 글에 담긴 본질적 속성이다. 인간의 오감으로 받아들이는 세계를 다른 사람과 공유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글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대화와 소통을 위한 매체가 글이다. 따라서 글에는 두 가지 본질적 정언명령이 담긴다. 첫째 인간에 대한 이해를 넓힐 것. 둘째 사람들 사이에서 공유될 것(재미 있을 것). '내러티브', 즉 서사 만큼 이 둘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방식이 또 있나 모르겠다.


인간에 대한 이해를 넓히지 않고, 글과 문자가 오로지 개인의 편협한 사고를 확대 재생산하는 데 불과하다면 어떤 결과가 벌어질까. 이 책과 관련해 단적인 예시가 있다. 경향신문, 한겨레에서 이 책을 소개한 네이버 기사가 있다. 그 기사 댓글을 보라. 최대한 원문으로 소개한다. <책 저자나 이 기사나 국보법 처벌이 필요하다. 역시 한걸레 기레기>, <미군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만 말하고 왜 중국군과 북한군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 왜 말이 없냐? 한국전쟁은 미국과 한국군이 일으킨 전쟁이란 말이냐? 전쟁이 평화적으로 시작되어서 끝난 적이 하나라도 있는가? 왜 전쟁을 일으킨 집단에 대해선 비판은 없고 그에 맞서 싸운 집단에 대해선 끊임없이 비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남한쪽 사람들에 대해서는 왜 조사늘 안하고 한쪽만을 대상으로 한건지~??? 그 의도와 목적 조사대상 방법이 의심스럽고... 이런 책을 끊임없이 들이대는 사람들의 의도와 목적이 궁금해지는군~~?!?!?!> 


왜 남한쪽 사람들에 대해서는 조사를 안했냐. 이는 펠턴한테 하는 질문일까, 이 책 저자한테 하는 질문일까. 한국전쟁 당시 북한 여성의 피해 호소를 듣고 북한에 찾아간 단체 국제여맹을 왜 다뤘냐는 질문인 걸까? 이 책은 그런 국제여맹, 그 중에서도 당시 영국인이었던 개인 모니카 펠턴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한 책이다. 모니카 펠턴을 다루는데 그 뒤에 남한 여성 피해 상황을 더했어야 하나? 그래서 '정치적으로 균형잡힌' 시각을 갖춘 책이 됐어야 했나? 그건 다른 책이 할 일이다. 혹은 남한 여성의 피해기를 읽은 독자가 스스로 머릿속에서 균형을 맞출 일이다. 


위 댓글을 쓴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든, 딸의 죽음 탓에 돼지를 잡아 35킬로미터를 끌고 와서 김영희와 같은 사람들의 일화는 픽션이 아니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 그런 여성이 있었고, 그런 여성들이 상당수 존재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그들의 겪어야 했던 아픔의 서사도 폄하될 수 없다. 그래서 논픽션이다. 그래서 논픽션이 어렵고, 또 그만큼 단단하다. 논픽션은 사실에 근거를 둔다.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사실로 꾸린 내러티브의 힘은 그래서 강하다. 


모니카 펠턴의 여정이 없었으면, 이 책이 없었으면, 이 책에 담긴 내러티브가 없었다면 김영희씨의 슬픔에 70년 후 남한의 독자가 닿을 일이 있었을까?  항상 그 사실을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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