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3회 울산 전국체전 취재기
스포츠 기자로서 아마추어 선수를 만나는 게 마냥 쉽지는 않다. 되도록 많은 행사를 실시간으로 전해야 하는 통신사 기자라서 프로 선수들을 쫓아다니기도 벅차다. 산업으로 큰 프로스포츠에는 팬들의 관심과 함께 돈이 몰린다. 그런 분야에는 귀신같이 언론이 따라붙는다. 언론이 다시 프로스포츠의 이야기를 팬들에게 시시각각 전달하면서 팬들의 관심은 더 커진다. 판이 조금씩 확장되면서 돈을 더 빨아들인다. 기업이 후원에 나서고, 지방자치단체들이 스포츠 팀을 창설하겠다고 나선다. 그러는 사이 프로 스포츠판에서 조금이라도 성적을 내는 선수들에게는 으레 ‘신성’이라는 말이 붙는다. 새로운 별이라는 뜻으로, 기량을 막 뽐내기 시작한 선수를 별에 빗대는 관용적 표현이다. 신성이든, 거성이든 이처럼 운동선수 중 탁월한 기량으로 큰 인기를 구가하는 사람을 ‘스타’라고 한다. 축구스타, 야구스타, 농구스타 등. 이슈가 되는 유망주에게는 축구 신성, 야구 신성, 농구 신성 등.
https://www.yna.co.kr/view/AKR20221007173151007?section=search
프로 스포츠계를 취재하면서 내게는 불현듯 든 의문도 이 스타에 관한 것이다. 어떻게 사람에게 별이라는 칭호가 붙을 수 있을까? 스타라고 인식되는 사람들에게 정말 별이라는 호칭에 걸맞은 자격을 지녔는지 나는 괜히 아리송해진다. 인간이 영원한 존재로서 별이 되는 작업을 정당화하려면 상당히 많은 승화의 과정이 필요하다. 우린 사회 최고 지도자라는 대통령에게도 별, 태양, 달 등의 천체에 빗댄 비유를 쓰지 않는다. 그렇게 된다면 대통령을 우상화하냐면서 정치적인 논란부터 일 것이다. 별이라는 칭호는 너무 낯간지럽고, 직관적인 만큼 영광스럽다. 명멸하는 밤하늘의 별과 금세 인기를 얻고, 스러지는 연예, 스포츠계 유명 인사들의 속성이 비슷하기는 하다. 그러나 예로부터 우리말로 이런 사람들을 ‘별’이라고 칭해왔는지는 알 수 없다. 이것저것을 찾아보니 구한말 이후 언젠가부터 인간의 운명을 천체에 비유해왔던 서구 문화권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한참을 구글로 뒤진 끝에 스타라는 표현이 천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온 서구의 문화적 전통이라는 설명을 미국 시사 잡지 디애틀랜틱의 2017년 기사에서 찾아냈다. 기사에 등장한 미국 일리노이 대학 어배너 섐페인 캠퍼스에 몸담은 연극사 연구자 피터 데이비스는 영문학의 아버지라는 14세기 잉글랜드 문인 제프리 초서가 ‘영예의 집’이라는 시집에서 인간을 별에 비유한 것이 확인된 최초의 기록이라고 했다. 이후 16~17세기 대문호 셰익스피어, 17세기 프랑스 극작가 몰리에르도 천체를 향한 이런 비유들을 작품에 녹여냈고, 18세기부터는 영국 연극판에서 훌륭한 배우를 향해 ‘스타’라고 칭하는 기록물들이 잦아지기 시작한다. 이후 이 ‘별이 된 인간’들의 존재를 정당화한 건 연극을 이어 현대 최고의 오락 산업이 된 영화였다. 즉 스타라는 특별하고 아름다운 개인보다 연극과 영화라는 오락 산업이 먼저 있었다. 그게 논리적인 선후 관계다.
영화계에 스타의 시대가 찾아온 것도 산업 초기 배우의 표정조차 제대로 구별할 수 없는 ‘저화질의 시대’가 지나고 나서였다고 한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산하 영화-텔레비전 아카이브의 얀 크리스토퍼 호라크 소장에 따르면 할리우드 초기 무성 영화 시절 이런 흐름을 대표한 인물이 당대 최고 배우 메리 픽퍼드였다. 그와 함께 등장한 찰리 채플린이 ‘영화 스타’가 돼 시대의 아이콘으로 승화했다. 오늘날 스타라는 표현은 이런 대중문화 속에서 형태를 갖춰갔다. 스타를 품고 있는 대중문화가 사람들에게 익숙할수록 그 스타는 더 스타가 된다. 오늘날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손흥민을 안다. 그를 좋아한다. 그가 해트트릭이라도 하는 날엔 포털에 관련 기사가 도배되고, 엄청난 좋아요를 받는다. 이는 모두 축구라는 대중 문화이자 프로 스포츠 산업이 우리의 일상에 너무나도 가까이 붙어있기 때문이다.
https://www.theatlantic.com/entertainment/archive/2017/02/why-are-celebrities-known-as-stars/517674/
축구라는 대중문화의 판이 아주 넓은 덕에 이제 막 가능성을 보여준 어린 축구선수들에게도 샛별이니 하는 수식어가 붙는다. 샛별도 어쨌든 별이긴 별이다. 이제 이런 ‘별들의 위계’상 서열이 낮은 새 얼굴부터 맨 꼭대기의 손흥민까지 소위 스포츠 스타들의 말 한마디한마디를 그대로 키보드로 받아쳐 전하는 게 내 일이다. 이 사람들의 이야기는 비슷하다. 항상 경기를 보러 와준 홈팬들에게 감사하고, 더 좋은 경기를 보여주려 하고, 선수로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한다. 이 선수들은 프로 리그의 한 경기에서만 제대로 활약하면 수훈 선수로 뽑혀 기자들 앞에서 자기 이야기를 전할 기회를 받는다. 내가 10월 7일부터 13일까지 울산 전역에서 열린 제103회 전국체육대회를 취재하면서 본 건 그렇지 못한 선수들, 스타가 아닌 선수들의 존재였다. 자기 종목에서 압도적 기회를 뽐내도 존재를 알릴 기회를 거의 받지 못하는 아마추어 종목 선수들이 거기 있었다.
이런 종목에서는 소위 축구, 야구, 농구 등 메이저 프로 스포츠 종목의 신성이라는 사람들과 비교하면 부끄러울 정도로 작은 관심만을 받게 된다. 이들의 존재는 대중문화의 울타리 밖으로 나서기만 하면 쪼그라든 채 웅크리고 있는 스포츠의 본질을 알려준다. 그 울타리 밖에서는 우리가 스포츠라고 부르는 것이 ‘체육’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된 월드컵이나 올림픽은 스포츠 축제의 대명사로 꼽히지만, 전국체전은 이름 그대로 전국적 규모의 체육대회다. 전, 국, 체, 육, 대, 회로 한 글자 한 글자 쪼개 봐도 그 어디에도 스포츠라는 근사한 뉘앙스가 들어갈 여지가 없다. 이 대회에 참여하는 많은 선수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땀방울을 흘리는 선수들은 체육인이지 스포츠 스타는 아니었다. 그 사람이 대부분의 자기 인생을 바쳐 기량 발전에 애쓰는 존경할 만한 위인이라도 그 명제를 바꿀 수는 없었다.
물론 아마추어 종목에서 스타들은 있다. 전국체전에서도 나를 포함한 모든 기자들의 취재 계획은 올림픽이라는 스포츠 행사(체육대회가 아닌)에서 성적을 내서 국민의 뿌듯함을 불러일으켰던 선수들 위주로 짜였다. 지난해 열린 도쿄올림픽 메달리스트인 양궁의 안산과 김제덕. 근대5종의 전웅태. 세계 무대에서 사실상 단거리 자유형 선수로는 2위인 수영의 황선우. 높이뛰기의 우상혁 등이다. 이런 선수들의 이름 뒤편에 이관호라는 선수도 있었다. 핀수영의 1인자다. 핀수영은 오리발 같은 바이핀, 돌고래 꼬리 같은 모노핀 등 추진력을 높이기 위한 지느러미를 발에 신고 규정된 거리를 얼마나 빨리 헤엄치는지를 겨루는 종목으로, 수영과는 다르다. 올림픽 종목이 아닌 점도 그렇다. 그는 이번 대회에서 무려 아시아 신기록을 세웠지만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다. 남자 일반부 무호흡 잠영 50m에서 13초84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전 아시아 기록은 13초85로 이 역시 이관호가 2016년 그리스 볼로스에서 열린 세계핀수영선수권대회 중 세웠다.
1989년생 이관호는 마린 보이라는 별호를 받은 박태환과 동갑이다. 그래서 한때 '핀수영의 박태환'이라 불렸다. 비인기 종목 핀수영을 소개하면서 유사 종목의 익숙한 스타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한때 한국 수영의 아이콘이었던 박태환처럼 이관호도 핀수영에서 위상이 독보적이었다. 박태환은 이제 그런 위상에서 내려왔지만 이관호는 아직 자기 시대를 이어가고 있다. 2006년 전국체전에 데뷔한 그는 이듬해부터 2관왕에 오르며 본격적으로 금메달 수집을 시작했다. 2013년 대회까지 8년 연속 금메달을 딴 그는 2014년에는 은메달 두 개에 그쳤지만, 다시 5회 다관왕에 오르며 총 25개의 금메달을 모았다. 이번 대회에서도 금메달 하나를 추가해 벌써 26개가 됐다. 종목을 관장하는 대한 수중 핀수영협회를 통해 그에게 연락을 하니 반색하면서 자기 이야기를 전했다.
https://www.yna.co.kr/view/AKR20221011014500007?section=search
“제가 한국 나이로 34살이에요. 시합장에 가면 인사만 무더기로 받을 정도로 노장에요. 완전 노장.”
오전에 기록을 세운 그는 그날 저녁 7시6분에 나와 통화했다. 헤실헤실한 웃음이 휴대폰 너머까지 전해졌다. 대회가 주목을 받든 아니든, 대회가 스포츠든 체육이든, 자기가 스타든 아니든, 자신이 받는 대우가 정당하든 그렇지 않든, 이관호는 신기록을 내서 그저 기분이 좋았다. 그도 그럴게 선수로는 나이가 너무 많아 은퇴를 진지하게 고민하던 중 낸 성과였다. 한동안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려 국내외를 막론하고 기량을 펼 장이 없었고, 부상도 겹쳤다. “2020년에 무릎이 아팠어요. 연골연화증이라고 운동을 많이 하는 사람한테 생기는 질환이 생긴 거죠.”
이관호는 내심 이대로 선수생활을 마무리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1등은 생각도 못 하고, 그냥 색깔은 아무거나 좋으니까 메달만 하나 따가자는 생각으로 나왔어요. 그런데 전광판 보자마자 눈물이 날 것 같았죠. 전성기가 돌아온 것 같았어요.” 흥분된 목소리로 그는 “같이 운동하는 동생들이 나보고 다 된 것 같은데 계속 잘하니 농담으로 '좀비 같다'고 하더라. 더 욕심이 생긴다”고 했다. ‘좀비’라는 말을 꺼낼 때 이관호의 기분이 가장 고조된 듯했다. 나는 10분 내외의 짧은 통화를 정리한 기사 제목에서 그를 ‘핀수영 좀비’로 칭했다. ‘황선우보다 14살 많은 '핀수영 좀비'…은퇴 고민하다 亞기록 깨’라는 제목으로 공개된 그의 이야기는 네이버에서 총 9개의 좋아요를 받았다.
스포츠 기자라는 나 역시 이 대회 전에는 그의 존재도, 핀수영이라는 종목도 알지 못했다. 우리의 인지 밖에 있던 ‘괴물’ 이관호에게는 스타의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스타의 조건은 개인의 품성과 탁월함이 아니라 그가 몸담은 환경의 크기와 속성(특히 대중 영합성) 달려있는 내 결론이 맞다면, 아무리 그를 좋게 본다고 해도 대답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가 10년 더 정상의 지위를 지키더라도 대답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핀수영이 갑자기 올림픽 종목이 돼 민족주의적 감정을 고조할 기회를 받는 기적이 없다면 이관호에게 작든 크든 ‘별’과 관련된 수식어는 붙지 않을 것이다. 이관호는 2018년 세계선수권대회 호흡 잠영 100m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전 세계 1등이었지만 스타는 아니다.
이관호가 스타가 될 수 없다는 사실과 별개로 나는 2007년부터 15년간 종목을 제패하고, 34살에 자기 기록을 깬 그가 도덕적으로 존경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축구, 농구 스타들은 그토록 대중에게 자신을 향햔 ‘리스펙트’를 요구한다. 무얼 계속 증명하겠다고 의지에 불타곤 한다. 그러나 이관호는 딱히 이 부분에 대해서는 미련이 없었다. 그는 기사가 나간 후 나와 통화에서 “기사를 보고 부모님이 정말 좋아하셨다”고 웃었다. “세계선수권에서 우승할 때도 기사 한 줄 안 나왔는데요 뭐. 괜찮아요, 오히려 기사 하나라도 나와서 좋죠 뭐.” 종목 나름이겠지만 아마추어 종목 선수들은 프로 스포츠 선수들과는 풍기는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훨씬 소탈하다. 본인이 스타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들에게 그들 자신은 체육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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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연합뉴스) 이의진 기자 "잘하는 후배가 많아서 이제 뒤쫓는 입장이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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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에서의 9일간 취재가 검찰의 수사 속보를 따라가는 ‘일선 기자’들의 일처럼 어렵지는 않았지만, 체력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약 3만명의 선수, 선수단 관계자들이 울산에 동시에 몰려 함께 간 선배는 출장팀의 숙소를 구하는 일부터 어려움을 겪었다. 시내와는 차로 30분가량을 가야 나오는 울산 북구의 바닷가 마을까지 가서야 겨우 펜션 한 곳을 빌릴 수 있었다. 나는 박태환의 기록을 모조리 깨가는 19세 수영 1인자 황선우의 경기를 실시간으로 전하고, 그의 인터뷰를 담당하는 임무를 맡았다. 황선우는 5종목에 출전했고, 나도 5일간 하루도 빠짐없이 차로 40분을 달려 울산문수실내수영장을 찾아야 했다. 거기서 내 이목을 끈 것은 매번 경쟁자와 한참 차이를 벌인 채 여유롭게 터치 패드를 찍고 주먹을 불끈 쥐는 황선우가 아니었다. 이미 지난해 세계선수권에서 한국 신기록을 깨고 들어온 황선우가 1등을 독차지할 것이라고 모든 기자가 예상했다. 황선우의 무대로 예정된 50m 레인 8개 반대쪽에서는 다이빙을 위한 수영장이 마련돼 선수들이 열심히 수면으로 몸을 던지고 있었다.
어깨가 쩍 벌어진 수영 선수와 달리 수면에 닿는 면을 최소화해야 하는 다이빙 선수들은 남자, 여자 가릴 것 없이 덩치가 작았다. 그러나 수미터 상공에서 수면으로 떨어지는 충격을 견뎌왔던 몸은 다부졌다. 살벌한 근육을 자랑하는 다이빙 선수들은 흔쾌히 인터뷰에 응했다. 나와 동선이 엇갈려 이미 숙소로 들어가는 길인데도 사정을 하니 발길을 돌려주기도 했다. 여간 미안한 게 아니었다. 이관호와 동갑내기인 김진용은 고민이 많아 보였다. 다이빙은 특히 주축 선수들이 어리다. 1인자로 꼽히는 우하람이 1998년생이고, 김영남도 1996년생이다. 김진용은 1989년생이다. 굳이 따지면 다이빙계에서는 황혼기를 넘어 환갑쯤 되겠다. 그도 보통 선수는 아니다. 무려 17년 전인 2005년에 강원체고 소속으로 전국체전에 데뷔했고, 화려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때 플랫폼 다이빙 종목에서 처음으로 금메달을 딴 그는 이후 두 해 연속 세 종목에 출전해 모두 정상에 올랐다.
성인이 돼서도 실력은 여전했다. 실업팀으로 뛴 2010년 대회에서부터 다시 일반부에서도 금메달을 수집하더니 2014, 2016년 대회에서 2관왕에 오르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최근 우하람을 위시한 한 세대 아래 선수들이 치고 올라오면서 위상을 잃었다. 잘하는 후배가 많아서 이제 뒤쫓는 입장이 됐죠, 라는 김진용은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았다. 그리고 스포츠의 본질 중 하나가 끊임없는 경쟁이라는 점도 알았다. 그는 “젊은 동생들 쫓아가는 게 지금 나름의 행복”이라며 “그들과 경쟁이 또 재미있다. 결국 경쟁하는 게 선수”라고 말했다. 그 속내는 나이를 먹든, 부상이 있든 어떤 상황에서도 일단은 지기 싫은 오기였다. “그냥 지기 싫은 것 아닌가요?” 내가 묻자 김진용이 웃었다. “그렇죠. 내가 다른 선수들에게 동생일 때나 형일 때나 지고 싶지 않은 건 그대로인 것 같네요.” 이번 체전을 통해 부상 복귀를 알린 한국 다이빙 간판 우하람은 네 개 종목에 출전해 금메달 두 개를 땄다. 우하람이 따지 못한 두 개 종목의 금메달은 김진용에게 돌아갔다. 시상식에 올라서는 그에게 축하한다고 하니 고맙다며 씩 웃었다.
지난해 도쿄 올림픽에 출전한 여자 다이빙 기대주 권하림은 인터뷰가 있었던 10월 9일까지는 전국체전에서 한 경기도 뛰지 못했다. 출전하기로 한 종목에 이름이 올라와 있었기에 의아했다. 기대주라고 해서 대한수영연맹에 인터뷰 요청을 넣어뒀는데, 정작 경기 중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취재도 어영부영되는가 싶었다. 10월 7일에 인터뷰 의사를 전하고서는 답이 없었는데 이틀이 지나서 연맹 관계자에게서 권하림 선수 인터뷰, 지금해도 괜찮나요, 하고 연락이 왔다. 울산문수실내수영장 3층 미디어대기실에서 냅다 1층 로비로 내려가 권하림을 만났다.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눈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그러나 꺼낸 이야기는 표정과 딴판이었다. 6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국제수영연맹 세계선수권대회 직전에 다친 팔꿈치가 아직 낫지 않아 경기를 뛸 몸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권하림은 이 부상으로 그렇게 고대하던 세계선수권대회에도 출전하지 못한 터였다. “막 다치고 나서는 정말 현실감이 없더라고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실감이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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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이 필요한 상황이지만, 그렇게 되면 앞으로 10m 높이의 다이빙 종목은 포기해야 한다는 소견을 받았다. 자기 주력 종목을 포기하기 싫었던 권하림은 재활을 선택했다. 그렇게 하면 이번 체전도 나갈 수 있을 줄 알았다고 한다. “병원에서는 이번 체전이 어렵다며 무리하지 말라고 했지만 내가 너무 뛰고 싶은 거예요. 별일 없을 줄 알고 훈련을 계속했는데 결국 상태가 안 좋아졌어요.” 사실 권하림은 작년 도쿄올림픽에서도 불의의 부상에 발목이 잡혔다. 여자 10m 플랫폼 다이빙 예선에 나선 그는 30명 중 19위에 오르며 준결승에 가지 못했다. 준결승 티켓은 딱 18위까지만 받을 수 있었다. 그때 경기 후 우리 회사 선배와 인터뷰에서 권하림은 발목이 돌아간 채 다이빙을 뛰었다고 고백했다. 경기 전날 훈련을 마치고 선수촌으로 돌아가다가 비포장도로에서 발을 잘못 디뎌 오른쪽 발목이 돌아간 것이고, 전성기가 시작될 국면에 부상으로 벌써 세 번의 대회(올림픽, 세계선수권대회, 전국체전)를 놓치게 된 셈이다. 선수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불행이다. 적절한 설명을 찾을 수 없는 부조리라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물어봤다. “억울하지 않으신가요?” 권하림은 생글거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고 하잖아요.”
그 웃음이 바닥을 친 슬픔 속에서 다시 치고 올라갈 정신적인 힘을 얻어내기 위한 태도였다고 믿는다. 권하림과 달리 고공행진하묘 고지까지 마지막 한 걸음을 남겨둔 선수도 있었다.사이클 여자 고등부의 1인자인 전남체고 김채연은 10월 11일 도로개인독주 15km 결승에서 금메달을 따면서 대회 5관왕에 올랐다. 다음날 개인도로, 개인도로 단체 종목에서 출전도 예정돼 있었다. 대한자전거연맹 관계자는 통화에서 “채연이가 체력적으로 힘들겠지만 저력이 있는 선수다. 남은 두 종목에서도 금메달 딸 가능성이 없는 게 아니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7관왕이다. 나는 살짝 흥분했다. 전화를 끊고 바로 대한체육회 홍보실에 전화를 걸었다. “내일 7관왕이 나올 것 같은데요. 지금까지 7관왕이 나온 적이 있나요?” 더욱이 개인도로 단체 종목은 개인도로 종목 결승에서 팀별 점수를 합산해 순위를 가리는 만큼 최소 6관왕은 확실해보였다. “마지막으로 6관왕이 나온 게 언제인지도 알려주세요.” 홍보실은 이렇게 되물었다. “7관왕이 나온다고요?”
대한체육회에서 전해온 역대 다관왕 사례는 이러했다. 대한체육회에서 메달, 성적 등 데이터를 전산화한 최초의 대회가 1989년 제 70회 전국체전이다. 이후 6관왕은 고등부, 일반부를 통틀어 단 네 번 나왔다. 1990년 양궁에서 김수녕과 임희식, 1992년 체조에서 박지숙, 1997년 또 체조에서 이경기. 7관왕은 데이터 전산화 이후에는 나온 적이 없다. 언론 보도를 뒤져보니 1972년 대회에서 체조 종목에 출전한 최영철이 7개 종목에서 금메달을 독식한 적이 있다. 다만 이 기록은 1989년 이후만 집계된 체육회 데이터베이스에는 등록되지 않은 내용이다. 공식 기록인지 확인하려면 상당히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할 듯했다. 그러자 기사의 뼈대를 두고 고민이 깊어졌다. ‘무려 50년 만에 전국체전 7관왕’이라는 제목을 붙이자니 최영철의 기록을 체육회 공식기록으로 쓰기가 부담스러웠다. 그렇다고 ‘전산화 후 첫 7관왕’이라고 쓰자니 50년이라는 딱 떨어지는 간극을 그냥 지나치기 아쉬웠고, ‘민주화 후 첫 7관왕’이라고 쓰려니 정치적 이벤트가 기록의 대단함을 잡아먹는 느낌이라서 꺼려졌다. 시대가 언제인데 민주화라니. 7관왕은 민주화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흔치 않은 기록이었던 것이다.
일과가 끝난 11일 밤 바닷가 펜션 방에서 침대도, 책상도 없어 바닥에 노트북을 늘어놓고 혼자서 기사 준비에 바빴다. 결국 ‘50년 만에 7관왕’이라는 제목을 살려 기사를 완성해뒀다. 6관왕 시 ‘25년 만에 6관왕’ 기사도 만들었다. 그러나 그 기사들은 쓸 수 없게 됐다. 다음날 대한자전거연맹 측은 비보를 전해왔다. “채연이가 아쉽게 낙차했습니다.” 대회 기간 앓아온 요로결석 탓에 결국 완주에 실패한 것이다. 개인도로 종목의 점수를 합산해 주는 개인도로 단체 종목에서도 자연스럽게 메달은 무산됐다. 예상됐던 2개 메달이 사라져 5관왕에 그치게 됐다. 고등부라고 할지라도 5관왕은 대단한 업적이다. 50년 만의 7관왕과 25년 만의 6관왕을 눈앞에서 놓친 김채연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김채연은 “그래도 목표했던 것보다 메달을 많이 따서 좋았다. 넘어져서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는 없다”고 했다. ‘6, 7관왕을 노렸지 않냐’고 묻자 김채연은 “아니요. 노린 것까지는 아니에요”라고 답했다. “국가대표가 되는 게 첫 번째 목표고요. 최종 목표는 자전거라는 종목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거예요.” 대한자전거연맹 관계자는 아쉬워했다. “스타가 나올 뻔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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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채연과 같은 나이였던 2008년 나아름은 전국체전 4관왕이었다. 개인도로 15km 독주에서 아쉽게 금메달을 놓쳐 5관왕은 이루지 못했다. 이듬해부터 일반부로 나선 나아름은 2년 후인 2010년 대회에서 처음으로 5개 종목에서 금메달을 땄고, 2017년 전국체전에서도 5관왕에 올랐다. 나아름은 2018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게임 4관왕에 빛나는 한국 사이클의 간판이다. 국내 모든 사이클 선수의 꿈이라 할 수 있는 유럽 프로팀에도 입단했다. 2019년 이탈리아 여자프로사이클팀 알레-치폴리나에 합류해 두 달간 한 수 위인 유럽 선수들과 경쟁했다. 이런 국제무대 성적과 입지적 위상 덕에 나아름은 언론에 ‘사이클 여제’라는 칭호로 소개된다. 나아름이 전국체전에서 얻은 금메달만 서른 개가 넘는다. 그런 나아름도 올해로 벌써 32살이 됐다. 올해 대회에서 나아름이 목에 건 금메달은 1개뿐이다. 개인도로에 나선 팀 선수들의 기록을 합산해 따지는 개인도로 단체 종목에서만 웃을 수 있었다. 이외 개인 종목에서는 도로 독주 25km에서 금메달이 아닌 동메달을 하나 땄다. 나아름은 김채연의 5관왕 소식을 듣고 “나도 10년 정도 전에 그런 시간을 보냈다”고 돌아봤다.
이번 대회에 참가하기 전 나아름은 운영하는 블로그에 특별한 도전에 나서겠다고 적었다. 25km의 독주 동안 속도계, 심박계, 출력을 측정하는 파워미터와 같은 장비상 데이터를 보지 않기로 한 것이다. 37분46초778의 기록으로 3번째로 결승선을 통과한 나아름은 경기 직후 통화에서 거듭 고통스러웠다는 말을 반복했다. 데이터를 보지 않다가 페이스를 잃었기 때문이다. “원래 독주에서는 아무 생각이 안 들어요. 그런데 이번 경기에서 페이스 조절을 못하니까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경기 운영이 안 되니까 마음이 급해진 거죠.” 나아름은 계속 가야 해, 더 밟아야 해, 라는 강박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고 했다. “37, 38분간 그냥 빨리 가야한다는 압박에 처음으로 독주가 고통스러웠어요.” 도로 독주 종목은 함께 달리는 동료나 경쟁자가 없다. 한 명씩 출전해 기록을 겨룬다. 오직 선수 자신의 주력으로만 결과가 정해져 영어로는 ‘진실의 경주’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 만큼 스스로의 경주 운영이 더 중요해진다. 선수들은 최선 장비로 최적의 경기 운영 방법을 마련해 데이터를 통해 경주 중 구현하려 한다. 그런데 대뜸 나아름은 이런 일반적 운영을 포기하겠다고 한 것이다. 이유가 궁금해 대한자전거연맹 측에 한 번만 통화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경주 직후 나눈 첫 번째 통화에서 나아름은 왜 이런 도전을 했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숨이 가빴고, 경주 직후 감정과 흥분이 잔뜩 올라온 듯했다. 계속 후회 없는 경주였다고만 해서 문답이 핵심을 겉도는 듯했다.
다음날 이뤄진 두 번째 통화에서는 나아름의 목소리가 한층 차분해져 있었다. “초심으로 돌아가려 했어요.” 나아름은 과거의 자신을 되찾고 싶어했다. 과거의 나아름에게는 특유의 경주 감각이 있었다. 장비에 의존할 필요가 없이 25km를 그대로 내달렸다. 나아름은 이런 주법을 ‘느낌대로 주법’이라고 불렀다. “본래 과학적으로 데이터를 분석하고 활용하는 스타일이 아니었어요. 그냥 느낌대로 자전거를 탔는데, 지금은 그때의 날카로웠던 경주 감각이 많이 떨어진 상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고 하자 “독주 선수는 자신만의 감각이 있다. 쓸 힘의 총량을 어느 정도로 나눠야 할지, 얼마나 버틸 수 있고 언제 출력을 내야 하는지 안다”고 답했다. 대부분 사람은 자신의 왕년을 그리워하며 산다. 나아름 같은 정상급 선수들도 나이가 들자 요령 없이 내달리고도 좋은 성적을 냈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게 된 걸까 하는 생각이 들어 물었다. “예전에는 얼마나 그 감각이 날카로웠는데요?” 나아름은 “예전에는 대단했죠. 어느 정도 거리를 온 후 ‘몇 초’라고 몸이 느끼면 정말 기록도 그렇게 나올 정도였다”고 설명해줬다.
‘후회 없다’, ‘후련하다’고 했던 하루 전과 달리 목소리에는 아쉬움도 섞여 있었다. 동메달이라는 결과가 아쉽다는 건 아니었다. 나아름은 이번 경주를 통해 원했던 ‘왕년’을 충분히 되찾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훈련을 정말 열심히 했거든요? 그런데 실전에서는 몸이 내 생각대로 따라주지 않는 거예요.” 원했던 감각이 올라오지 않자 베테랑 중의 베테랑인 나아름도 경주 중 당황했다. 마음은 급해졌고, 무작정 속도를 올린 채 최고 출력으로 완주하다보니 몸이 비명을 질렀다. 나아름이 경주 직후 호소한 고통이 그 방증이었다. 이는 신체의 비명이자 나침반을 잃고 당장의 위치를 알 수 없게 됐을 때 겪는 심적인 고통이기도 했다. 나아름은 “그래도 금메달보다 값진 동메달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경기 당일로부터 열흘 후인 10월 21일 나아름은 블로그에 이 경주의 후기를 올렸다. 이 후기에서는 언뜻 내비쳤던 그 아쉬움이 사라져 있었다. 나아름은 블로그에 이렇게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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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무모한 도전은 후회 없이 해피엔딩으로 끝이 났습니다. '내년에 또 독주를 타야지!' 지금 저는 이 생각뿐입니다. 무모한 도전은 고통으로 가득했지만, 그 고통을 통해 저는 예전의 제 모습과 감각을 되찾았습니다. 다시 꿈을 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아름은 네이버 공식 스포츠 스토리텔러다. 기자, 선수 등 스포츠 종사자들이 블로그로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개별 블로그 포스팅이 네이버 스포츠 뉴스 코너에 게재되는 식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원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다른 기사보다 우선적으로 네이버 모바일 메인 페이지에 걸린다. 나아름의 이름을 네이버에 검색해 인물 정보를 찾아보면 스포츠 인플루언서 나루미라는 페이지로 이동할 수 있다. 그 페이지에는 ‘나루미’라는 나아름의 블로그 닉네임 밑으로 팬의 수가 나와 있다. 298명이다. “그분들의 응원 덕분에 지금 여기까지 온 거예요.” 경기 직후 여러 감정이 몰아쳤는지 다소 횡설수설했던 나아름은 이 ‘팬들’을 언급할 때는 목소리에 힘이 붙었다. 나아름은 “제 블로그에 댓글을 남겨주시고 인사해주시고 응원해주시는 분들. 그 말들이 되게 힘이 됐다”고 했다. “‘블로그 잘 보고 있어요’, ‘응원할게요’, ‘힘내세요’ 이런 말들이 그 분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그냥 툭 던진 한마디인데 그런 것들이 모여서 지금의 자리까지 올 수 있도록 해줬어요.”
사실 이 선수들을 인터뷰하면서 곤혹스러웠던 게 이 팬들의 존재였다. 손흥민이 기자 간담회를 하거나 내한해 취재진을 만나면 으레 나오는 질문이 ‘팬들에게 한 마디 해주세요’다. 프로 스포츠 선수들에게는 그들을 사랑하는 팬들이 있어 이렇게 물어보면 뭐라도 상투적인 한 마디라도 들을 수 있다. 대개 답변은 이렇다. 항상 감사드리고... 어쩌구저쩌구. 전국체전에서 선수들을 인터뷰할 때도 그 질문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입을 열기 전에 앞서 ‘이 선수에게도 팬이 있을까’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 말이 이상하게 꼬였다. “팬... 응원해주는 분들에게 한 말씀해주세요.” 최소한 나아름에게는 확실히 팬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298명은 있다. 나아름은 한국 사이클에서 가장 유명한 선수다. 그렇지만 ‘입증된’ 팬은 딱 298명이 있는 나아름은 스타라고 할 수 있을까. 사이클 여제, 사이클 간판이라는 표현은 쓰지만 사이클 스타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을까. 스타가 나올 뻔 했다는 한탄을 나오게 했던 김채연이 고등부 7관왕이 됐으면 정말 스타가 됐을까. 이런 질문들 앞에서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이들에게는 팬이 없거나 너무 적다.
팬은 'fanatic'의 줄임말이다. 김형곤 동명대 교수가 2002년 쓴 논문을 보면 교회 속에 속해 있거나 헌신적인 봉사자를 의미하는 라틴어 'fanaticus'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체육과 운동이 미디어를 만나 스포츠라는 산업이 되면서 스포츠에서도 팬이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고, 스포츠에 열성적인 사람들, 스포츠 스타를 추종하는 사람을 뜻하게 됐다. 팬과 스타는 서로의 존재를 받쳐준다. 추종할 스타가 없으면 팬이라는 집단은 태어나지 않고, 추종해주는 팬이 없으면 스타라고 할 수가 없다. 스타와 팬 사이에 미디어가 있다. 언론은 스타를 위주로 보도하고, 팬들은 그 스타가 나오는 기사를 보고 기뻐한다. 꾸준히 송고되는 기사를 통해 스타는 팬들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각인시킨다. 스타-언론-팬이 이루는 순환의 구조로 스포츠라는 산업이 굴러간다. 스타는 몸값을 키우고 사랑과 존경을 받는다. 팬들은 사랑할 대상을 찾아 무료하고 지친 일상의 활력소로 삼는다. 거기서 삶의 의미를 찾기도 한다. 언론은 돈을 벌고, 산업은 파이를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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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구조를 더듬을수록 스타가 스스로 빛나는 별이라기보다는 거대한 대중문화 속에서 만들어지는 존재라는 사실이 와닿는다. 가끔은 그 존재감이 너무 커서 그들이 마치 도덕적으로 훌륭한 위인이자 영웅인 것 같은 착각을 들게 한다. 스포츠 스타들이 존경받아 마땅하다면 그 이유가 뭘까. 훌륭한 기량? 성공을 위한 노력과 수양, 정신력? 프로페셔널한 개인으로서 자기 분야에서 보여주는 탁월함 등은 대단한 게 맞다. 그렇다면 아시아 신기록 보유자 이관호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아시아 선수 최초로 득점왕을 차지한 손흥민이 탁월한 만큼 자기 종목에서 탁월하지 못했던 걸까. 새로운 도전에 나섰던 나아름의 정신력은 한국보다 한 수 위 기량의 선수들이 즐비한 메이저리그에서도 기어코 성공한 류현진보다 떨어지는 걸까. 많은 나이에도 기량을 유지해 ‘K리그의 레전드’라고 불렸던 축구선수 이동국보다 사실 다이빙 선수 김진용이 더 많은 나이에도 정상급 기량을 유지했다고 볼 수 있진 않을까. 전국체전에서 만난 순박한 운동선수들의 존재는 스타에게 돌아가는 '멋진 사람'이라는 영광이 과연 정당한가 하는 화두를 내게 던져줬다. 자본이 들어와서 사회의 유력한 오락 산업으로 자리 잡은 야구 축구 농구 외 선수들. 소위 비인기종목이라고 불리는 선수들에게도 충분히 존경받을 자격, ‘대단한 사람’이라고 인정받을 자격이 있지 않을까.
전국체전은 미디어를 통해 산업으로 진화하면서 동시에 변질되기 이전에 스포츠가 다른 무엇이었다는 것을 짐작케 했다. 그게 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지금 산업으로서 스포츠와는 이질적인 무엇이었다는 것만을 강하게 느낄 뿐이다. 사실 전국체전도 순수한 의미로 스포츠 제전은 아니다. 전국체전은 민족 저항의 상징이었던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가 그 시초라고 한다. 작고한 체육사 권위자인 하남길 전 경상대 교수의 저서를 보면 전국체전은 본래 일제강점기 민족정신을 고양하기 위한 수단으로 고안된 것이다. 광복 이후에는 대회에 출전하는 각 시도별 자존심 싸움으로 변질된 부분도 있다. 기원부터 최근 양상까지 전국체전은 항상 정치와 떨어질 수 없었던 행사라 얼마나 스포츠의 순수성을 간직하고 있냐고 묻는다면 쉽사리 대답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래도 내가 취재했던 울산 전국체전에는 그런 스타들을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질문하기 위해 다가가려면 소속 팀의 홍보 담당자와 사전 조율을 해야 하고, 입출국 일정을 에이전시에 사정사정해서 알아내야 하는 데다, 인스타그램에 사진 한 장 올리면 좋아요 수천 개가 박히는 그런 ‘별이 된 인간’들은 이런 작은 국내 대회는 찾지 않았다. 수영과 다이빙 경기가 있었던 울산문수실내수영장의 2층과 3층에는 출전을 앞둔 수영, 다이빙 선수들이 복도에 요가 매트를 깔아두고 스트레칭에 여념이 없었다. 폼롤러 위에서 근육을 풀면서 스마트폰만 보는 이도, 친구들과 무슨 얘기를 그렇게 깔깔대면서 하는지 대화 삼매경인 이도 있었다. 그냥 자신이 직업으로 삼은 일을 열심히 하려고 하는 이 ‘평범한 사람들’의 몸은 우람했고, 다부졌다. 세계 1등을 해본 선수도, 아시아 신기록을 세운 선수도, 5관왕을 한 선수도 모두 인터뷰와 마이크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 빈틈투성이 취재원들은 기자 앞에서 때론 허둥대고, 때론 싱겁게 웃었다. 미디어와 스타 비즈니스가 없는 과거 스포츠의 모습이 그러지 않았을까. 이제 내가 그 시대를 살아 볼 방법이 없기에 그렇게 짐작만 해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