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한때는 삼단같은 검은 머리였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
나이 들어 가는과정을 현실감 있게 들어낸 말이다
덕분에 백발은 노화의 상징이 되었다
성장에 개인차가 있듯 흰머리에도 개인차가 있기 마련인데 흰 머리카락은 노인의 징표가 되고 말았다
시댁은 30대 초반부터 흰머리가 나기 시작하는 유전자였다
유난히 외모에 집착하던 남편이 가장 콤플렉스로 여긴 게 흰머리였으니
외모지상주의 남편으로서는 용납되지 못하는 흠이었다
거의 20일 단위로 흰머리가 나타나기 전부터 남편은 염색을 했다
눈썰미 없는 나는 결혼 전까지 전혀 남편의 흰머리를 눈치채지 못하였다
다행히 대머리 유전자는 아니어서 흰머리나마 풍성한 머리칼의 소유자였으니
유난히 까만 머리색에 감탄하던 청맹과니였다
더구나 이미 콩꺼풀이 쓰여진 상태,
대부분의 노총각들이 배 나온 대머리였으니 까만 머리털과 늘씬한 체격만으로도
아저씨 같은 노총각들에게 식상한 노처녀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결혼 후 가장 먼저 벗겨진 콩꺼플이 머리카락이었다
편은 잦은 염색으로 인한 후유증을 겪고 있었다
80년대 염색약의 수준은 자금과 많이 달랐다
머리 피부밑이 헐어 통증과 가려움증에 시달리고 알레르기 약을 복용해야 했었다
염색을 한 직후 후유증에 시달리며 남편은 다시는 염색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하곤 했다
염색 직후 남편이 사용한 수건과 베갯잇에는 검은 염색약이 묻어났다
남편 투정과 염색약의 폐해를 생생하게 경험한 나는 그럴 때마다
은발의 멋을 강조하며 염색하지 못하게 부추겼다
당시는 유명 정치인이 은발이 회자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품위 있는 중후한 멋이라는 말에 솔깃한 남편이 염색을 미뤄 보기는 했다
백발을 휘날리며 외출한 어느 날 돌아온 남편의 머리는 검은색이었다
"왜요? 은발 멋있지 않아, 당신한테 잘 어울리는데 ···"
"놀이터 지나가는데 동네 아이들이 할아버지 공 좀 보내주세요, 하잖아,"
볼 멘 소리의 대답을 들은 후 어떤 감언이설도 남편의 염색을 막을 수는 없었다
"눈이 침침해지는 거 같아, 알레르기 약은 소화도 안돼, 머리 밑에 피가 난거 같아"
남편의 불만은 그칠 날이 없었다
'나는 가능한 한 염색은 안 해야지' 괴로워하는 남편을 보고 수없이 다짐했다
'흰 머리카락은 뽑아야 한다'고 다짐했다
다행히 우리 친정은 흰머리가 늦는 편이다
60대 초반부터 흰머리칼이 나기 시작했지만 듬성듬성 나는 편이지 빨리 확산되지는 않았다
하나 둘 흰 머리카락을 발견하며 남편이 받던 고통이 떠올라 흰머리가 공공의 적 같았다
애초에 뿌리 뽑아야 할 것만 같았다
처음 한두 개쯤이야 신기하기도 하고 전투 의욕도 살아 있고 무리 없이 발견하고 뽑아낼 수 있었다
문제는 여기저기 숨어서 돋아나는 흰머리였다
겉은 멀쩡한데 조금만 들춰보면 흰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서 있곤 한다
내 머리카락을 내가 볼 수 없으니 거울을 통해서 발견하고 뽑아야 한다
거울을 통해서 조준하고 흰머리칼이 잘 보이게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족집게로 집어 뽑아낸다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된다
거울 속과 현실의 거리를 가늠해야 하며 검은 머리카락이 섞이지 않게 한 올만 끄집어 내어
흰 머리카락을 족집게로 집어 내는 작업은 숨을 멈출 만큼 고도의 집중이 요구되니
꼴깍 침이 넘어가기도 한다
따끔한 고통이 따르지만 흰 머리카락이 뽑히는 순간의 희열이 크다,
숲속을 헤치며 삼을 찾는 심마니처럼 눈을 번득이며 흰 머리카락을 찾아 나선다
" 뽑지 마, 뽑으면 머리카락 안 난다니까 대머리 돼 날 보라, 정수리가 훤하지 너처럼 뽑아서 그래
나처럼 안되려면 더 이상 뽑지 마 흰머리라도 있는 게 낫다니까"
선배의 말이다
"뽑지 마세요, 저도 뽑았거든요, 이것 보세요 원형 탈모증 같지요, 뽑았더니 더 이상 안 나요"
단골 미장원 원장도 한마디 한다.
다른 것같으면 약한 내 성정상 웬만하면 겁먹고하니않을 것 같은데 머리칼 만은 다르다
"아니, 자기들은 다 뽑아 놓고 왜 나더러 뽑지 말래, 난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을 걸
아직 머리카락이 이렇게 많은데 뭐" 하며 속으로 큰소리치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앞부분 얼굴 윤곽선을 따라 흰머리가 머리띠처럼 드리워졌다
다행히 아직은 머리카락을 내리면 깜쪽같이 가려지기는 한다'
'눈 가리고 아웅'이라는 말을 쑬 수밖에 없다
인해전술이 무섭다 하더니 앞에 난 흰머리를 다 뽑았다가는 머리 밑이 무사하지 못할 듯하다
애꿎게 보이지도 않는 뒤에 난 흰 머리카락을 조준한다
한 손으로 머리카락 정리하며 거울을 통해서 뒤에 있는 흰 머리카락을 찾기가 쉽지는 않다
어려운 만큼 뽑았을 때의 성취감은 크다
혼자 의기양양, 포로 다루듯 뽑힌 흰 머리카락을 일렬횡대로 세워 본다
섬세하지 못한 손이 흰머리 뽑을 때같이 뽑혀 나온 검은 머리가 더 많다
검은 머리는 뭉쳐 놓는다
흰 머리카락은 은빛으로 반짝이고 마치 낚싯줄처럼 강하고 굵다
검은 머리카락은 요즘 들어 많이 가늘어진다
머리숱이 줄어들 때 머리카락이 가늘어진다더니 그 수순을 밟고 있는 듯하다
좀 있으면 번거롭게 많았던 머리숱도 후줄근하게 줄어든다는 뜻이다
흰 머리카락이 양분을 다 뺏어간 건 아닐까? 흰 머리카락에 대한 적개심이 다시 불타오른다
삼단 같던 검은 머리가 흰머리에 잠식 당하고 말 것 같다,
어쩌다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검은 머리카락을 보면 겁이 덜컥 난다
정수리 휑한 선배의 머리카락이 떠오른다
나도 곧 그렇게 될 것만 같다
어쩌다 머리카락이 방바닥에 굴러 다니면 어떻게든 제거해야만 마음이 놓인다
'있을 때 잘해'
인생이 유행가 가사라더니
검은 머리카락에 연연해 하고 있는 내 모습이 꼭 유행가 가사 같다
있을 때 잘할 걸 그랬다
경험자의 모습을 눈앞에서 보고도 깨닫지 못한 우매함이니 탓해서 무엇하랴,
이제부터라도 있을 때 잘해의 교훈을 실천해 보려 한다
흰머리 검은 머리 다 소중한 내 머리카락이다.
흰머리 검은 머리 구분 말고 있을 때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
인생도 그렇다,
젊건 나이 들었건 있을 때 잘하는 게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