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화양연화
축구에 별 관심 없는 나도
구구단처럼 자동으로 말하게 되는 축구 전설 펠레
내년이면 떠날 우리 집 막내는
나를 잠 못 들게 하는 끝없는 걱정의 대상이지만
어릴 땐 참 귀엽고 사랑스럽고 마음을 충만하게 하는 그런 아이였다.
24개월이 갓 지나 처음 한국에 오던 날
공항에서 시댁으로 가는 차 안에서
이름으로만 준성이를 알고 계시던 기사 아저씨가 물었다.
"준성이는 뭐 좋아하니"
"펠레요"
"뭐어?"
"축구왕 펠레요."
뽀로로, 토마스 기차, 아니면 마이쮸
이런 답을 기대했을 아저씨는 다시 물었다.
"펠레? 허허 뭐 때문에 축구왕 펠레가 좋아?"
"펠레는 축구 천재예요. 골을 천 개도 넘게 넣었어요."
뚱뚱한 기저귀도 채 떼지 못한 아이는
또박또박 펠레가 좋은 이유를 말했다.
차 안에서의 이 짧은 대화는 금세 아버님, 어머님의 귀에 들어갔고
두 분은 준성이가 영재가 아니냐며 반복 플레이 버튼을 누르는 것처럼
같은 질문을 뒤풀이하고 준성이 대답에 껄껄 웃으며 흐뭇해하셨다.
지금은 그 시절 총기와 귀여움의 흔적조차 찾기 어렵지만
매일 저녁 침대에서 목이 잠기도록 수십 권의 책을 읽어주고 나서야
겨우 잠드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살금살금 방을 빠져나오던 날들
손바닥에 느껴지는 통통하고 부드럽고 조그만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작은 보폭에 맞추어 천천히 공원을 걷다 뛰어다니는 다람쥐에 즐거워하던 날들
그때는 몰랐다.
그 짧았던 날들이 내 인생의 화양연화였음을
그 시간들을 뒤로하고
뭐 하나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의 무게를, 하염없이 깊어지는 겸손을,
씁쓸한 좌절감을, 굴욕감을 꿀꺽 삼킬 줄 아는 담대함을
배우며 살아간다.
내년 아들의 미래는 어디서 어떻게 펼쳐질까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지금
덕분에 짜릿한 스릴에 부드럽게 몸을 맡기는 여유를 배우고 있다.
두 돌 아이의 첫 영웅 펠레,
내 화양연화 속 선물 같은 기억을 선물해 주신 분,
세상의 고단한 짐 모두 내려놓고 부디 영면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