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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점빵 뿅원장 Dec 21. 2023

익숙한 것들과 안녕하기.

- 원장실을 정리하면서  

  콧구멍만 한 원장실은 매우 지저분하다(지저분하다기보다는 너저분하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책상 위에는 노트북 두 대, 며칠 동안의 예약표, 치과 신문, 각종 서류 등등이 쌓여있고, 책상 위 책장에는 다양한 책들을 비롯하여 여러 잡동사니와 문구류들이 차곡차곡 놓여있다. 그 책장의 위 공간에는 만화책과 각종 피규어들이 서 있다. 의자 뒤 책장에는 전공서적과 관련 잡지들이 빼곡히 꽂혀 있고, 그 옆에는 캡슐커피 머신과 업체에서 샘플로 준 치약들이 박스 째로 놓여있다. (아이고... 생각만 해도 너저분한데 실제로 보면 더 너저분하다.) 맨날 치워야겠다고 마음을 먹지만 일도 바쁘고 귀찮아서 그냥 그렇게 둔 지 오래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뭔가 변화가 생기면 익숙하게 놓여있던 물건들의 위치가 바뀌면서 필요할 때 다시 찾는 번거로움이 생긴다는 핑계로 정리를 미루고 있었다.


  어제 점심을 먹고 들어왔는데 방을 보니 갑자기 한숨이 나왔다. 펼쳐보지도 않는 서류들이 산같이 쌓여있고 각종 물건들에는 뽀얗게 먼지가 쌓여가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도 모를 만큼 어지럽게 널려있는 자질구레한 책들과 문구류들은 꼭 지금의 내 마음 같았다. 버려야지, 정리해야지라는 말만 하고 쌓아두는 사이에 더 많아진 짐들이 이제는 원장실에서 뭔가를 하기 싫을 만큼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그래서 쓰레기봉투를 하나 가져다 놓고 필요하지 않은 물건이나 오래된 서류들을 버리기 시작했다. 참 많기도 많다. 서류 중에는 5년이 넘도록 펼쳐보지 않고 쌓여있는 것들도 있었고,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 위생과 실습생 위탁서류도 있었다. 서랍 구석구석에는 언제 받았는지 모를 유효기간을 훨씬 지난 샘플 재료들을 비롯하여 각종 업체에서 나누어 준 포스트잇과 볼펜도 꽤나 많았다. 치과 장비 중에 부품을 갈고 나서 버리지 못한 고장 난 부속들도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버리고, 또 버리니 20리터 쓰레기봉투가 순식간에 차 버렸다. 아무래도 하나로는 안될 것 같다.


  일하는 중간중간 방에 들어와 서랍 속을 비우고 서류를 파쇄하면서 한참을 버리다 보니, 버려야 되나 말아야 되나 망설여지는 것들이 방 한쪽에 또 쌓인다. 오래전에 누군가 고맙다고 준 것. 먹어보려 애썼지만 매일 먹지 못했던 유효기간이 애매하게 남은 영양제, 버리기는 아깝고 쓰기에는 낡고 지저분해진 물건들이 대부분이었다. 고민하다 그냥 마음만 기억하고 비우기로 했다. 이렇게 둔다고 쓸 물건들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얼추 다 비웠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 사진에 있는 텀블러가 보였다. 개원 초에 직원들이 고맙다며 돈을 모아 사준 텀블러였다. 개원한 지 9년쯤 되어가니까 저것도 9년 정도 된 텀블러이다. 겉으로는 깨끗하고 괜찮아 보였지만 내부는 솔로 닦아서 생긴 스크래치와 커피 묵은 때가 껴 있어서 사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직원들이 준 선물에 대한 고마운 마음에 어쩌지 못하고 한 구석에 세워두기만 했더니 부옇게 먼지가 쌓여있다. 버려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결국 고마운 마음만 오랫동안 기억하자며 안녕을 말했다. 뭔가 미안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지만 그래도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짐이 없어지는 기분이다.  


  버리고 나니 뭔가 홀가분하다. 왜 그렇게 많은 것을 안고 살았나 싶다. 익숙하다는 이유로 그동안도 안 썼지만 앞으로도 안쓸 물건들, 결국에는 다시 찾지 않을 물건들인데 아까워서, 준 사람이 고마워서, 왠지 나중에 쓸 것 같아서 버리지 못하고 쌓아둔 것들에 조금씩 내가 깔리고 눌렸던 것은 아니었나 싶다. 틈이 나는 대로 더 버려야겠다. 그리고 안 채워도 되는 것은 굳이 채우지 말고 비워 놓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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