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연가

by 최미옥

추석날이었다.

큰딸의 남자친구가 불쑥 찾아왔다. 잘 깎은 알밤 같은 얼굴에 말쑥하니 양복을 차려입은 앳된 청년이 어색하게 웃으며 떡보따리를 내밀었다. 떡집 자제라더니 명절을 빌미 삼아 마음먹고 찾아온 모양이었다. 예고 없는 방문에 당황했지만 외려 마음 편케 귀한 손님을 보기는 했다.

문제는 들고 온 떡이었다. 혼자 먹자니 너무 많고 나누자니 참으로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떡을 돌릴 만큼 마음 트고 지내는 이웃이 없다. 별수 없이 한주먹씩 묶어 냉동실에 넣으면서 나는 또 사라져버린 우리 동네가 그리워진다. 실핏줄처럼 뻗어 있는 골목길, 그 골목골목에 있는 얼굴들이면 떡 한 상자쯤은 금방 동이 날 터이다.

지금은 사라진 서울 마포구 공덕동 74-8번지, 그곳은 가난한 남자와 가난한 여자가 만나 가정을 이루고 처음으로 장만한 집이었다. 그때가 오월 중순께였는데 집 앞 골목에 찔레꽃이 만개해 있었다. 구름처럼 피어있는 꽃과 난만한 향 그리고 미로 같은 골목길은 고향마을을 연상케 했고 나는 단박에 마음을 무장 해제시켜버렸다. 덕분에 정작 꼼꼼히 살펴야 할 집은 대충 봐 버리는 우를 범했다. 愚를 범했다고 했지만 실은 우리가 가진 돈으로 집 장만이 가능했기에 무엇보다 반가웠다.

서둘러 집을 계약하고 이사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살던 사람이 이사 가고 도배를 하기 위해 집에 들어서는데 당혹스러웠다. 마치 화장을 지운 신부의 민낯에 악하고 놀랐다는 첫날밤 어느 신랑의 고백처럼 찔레꽃이 져버린 집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결혼을 무르고 싶은 신랑의 심정이 된 우리는 어이없는 표정을 서로 숨기려고 애썼다.

그렇게 닻을 내린 그곳에서의 세월은 잠시 머물리라던 애초 계획과 달리 한없이 늘어졌다. 고만고만하게 살던 이웃들이 분당으로 일산으로 꿈을 싣고 골목길을 빠져나갈 때 나는 돌아서서 눈물을 훔쳤다. 잘 가시라 손만 흔들 뿐 내 짐을 꾸리지는 못했다. 사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통장은 좀체 키가 자라지 않았고 예기치 않던 일은 곳곳에 복병처럼 숨어있었다. 남대문시장이 일터인 남편은 교통이 편한 것만을 줄기차게 구호처럼 외쳤고 그 남편을 미워하는 일도 내 주변머리 없음을 자책하는 일도 제풀에 지쳐 주저앉았다. 이런저런 이유로 달동네에서의 세월은 탄력 잃은 고무줄처럼 늘어지기만 했다.

개발의 바람이 전국을 휘몰아칠 때도 태풍의 눈처럼 고요하던 동네였지만 결국 사라졌다. 고만고만한 이웃들이 서로 기대며 살던 그곳은 서울역 근처여서 마부들이 많이 살았다고 했다. 골목마다 말똥이 떼굴떼굴 굴러다녔다는 이야기를 즐겨 들려주던 성도약국 할아버지 약사의 전설 같은 이야기 위에 내가 살던 시절이 또 하나의 전설이 되어 얹혔다. 골목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말똥처럼 굴러다니던 우리 동네는 이제 흔적조차 없다. 지금은 대단지 아파트가 자리하고 있다.

사월의 신부처럼 눈부신 꽃을 피워 연탄 공장을 환한 집으로 잠시 위로해 주던 목련도, 골목골목 향훈을 풀어놓던 라일락도 사라졌다. 목발을 짚고 다니던 철물점 네 시동생이 골목 어귀에 앉아 목청껏 부르던 노래도 더는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가 즐겨 부르던 노래는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하는 군가였다. 특히 저물녘엔 어김없이 그의 노래가 들렸는데 소리 없이 다가오는 어스름 그림자와 노래가 쓸쓸한 동무가 되어 이 골목 저 골목을 기웃거리고 다녔다.

신체검사를 받던 청년이 보이지 않는 시력검사표를 외우면서 ‘꼭 가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던 모 제약회사 광고가 있었다. 나는 그 장면을 볼 적마다 그 시동생을 떠올리곤 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오갈 데가 없어진 시동생은 동갑내기 형수와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 남편의 선택을 따를 수밖에 없었던 그녀는 이따금 그늘진 얼굴을 만들었지만, 그들은 함께 길 건너 어디론가 이사했다. 가끔 그 형수의 근황과 함께 그가 궁금해진다. 그는 지금도 못다 부른 노래를 부르고 있을까. 그에게 허락된 골목을 찾기는 했을까.

골목 입구에 있던 오토바이 가게의 개는 새끼를 다섯 마리나 낳고도 찬 우유에 빵 한 덩어리를 얻어먹고 있었다. 탈진한 개가 너무 가여워서 두어 번 미역국을 끓여주었다. 소고기 넣고 뭉근하게 끓인 미역국을 너무도 맛나게 먹는 산모를 외면할 수 없었다. 나는 산구완(?) 덕분에 새끼를 맘껏 만져보는 특권을 따냈다. 주먹만 한 생명이 눈도 뜨지 못한 채 어미젖을 물고 있는 모습이며 겨우 눈 뜬 고것이 배를 땅에 붙인 채 엉금엉금 기는 모양새는 보기만 해도 절로 웃음이 났다. 새끼들은 여기저기 입양이 되고 어미를 가장 많이 빼닮은 한 마리는 어느새 또 한 마리의 얼룩이가 되어서 모자가 사이좋게 골목을 지키다가 어디론가 갔다.

너른 옥상을 밭으로 만들어 온갖 채소들을 가꾸던 형주네 마당은 동네 아낙들의 공동 작업장이었다. 나처럼 손재주가 없는 이는 실밥을 뜯고 손끝이 야문 이는 옷을 꿰매었다. 때로는 머리핀을 만들거나 전자부품 조립 같은 것도 했다. 수고비를 받는 날은 늘 먹던 국수나 비빔밥 대신 삼겹살 파티가 벌어졌다. 일감을 한켠으로 밀어놓고 삼겹살에 소주 한잔을 마신 젊은 아낙들이 어설프게 스텝이란 것을 밟으며 터트리던 웃음소리는 건강한 삶의 에너지원이었다. 햇살은 푸지게 쏟아졌고 우리는 젊었다. 젊고 건강한 몸이 재산일 뿐이던 우리는 서로에게 비빌 언덕이 되어주었다. 모양도 향도 다른 나물이 한데 어우러져 맛을 내는 비빔밥처럼 우리는 잘 어울려서 척박한 도심 한 귀퉁이에 힘차게 뿌리 내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엄마들이 수다 떨며 일하는 한켠에서 저희끼리 자랐다. 미로 같은 골목이 놀이터였다. 골목길을 따라 내닫고 휘돌고 때론 도움닫기도 하며 스스로 자랐다. 산처럼 쌓이곤 하던 연탄재를 온통 부숴 놓은 동네 꼬맹이들이 먼지를 허옇게 뒤집어쓴 채 단체로 손 들고 벌서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난다. 벌을 세우던 이는 윤태 엄마였다. 그녀의 목소리가 골목을 따라 우렁우렁 퍼져나가면 개구쟁이들은 인기척에 놀라 튀어 달아나는 메뚜기처럼 이 골목 저 골목 숨기 바빴다.

생애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시기인 삼십 대와 사십 대 초반을 고스란히 보냈던 동네, 내 발자국으로 보도블록이 닳아도 닳았을 우리 동네 골목길이 눈에 선하다. 은미네를 지나 종혁이네 준영이네……. 그 골목 끝에는 흰머리가 유난히 눈부시던 지연이 할머니가 해종일 집 앞에 나와 앉아 있었다. 토란대며 들깨 부추 등이 크고 작은 플라스틱 화분에 심어진 채 무질서하게 놓여있던 골목 끝에 노인은 또 하나의 화분에 담긴 식물처럼 동그랗게 앉아 있었다. 한번은 다니러 오신 시어머니께서 노인의 손을 덥석 잡으며, 아이고 우예 죽을랑교, 라고 하셔서 내가 기절할 뻔한 적도 있었다. 어머니의 사투리를 노인이 못 알아들으신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내 아이들의 유년의 그림자가 골목골목 숨어서 언젠가 나타날 술래를 기다리던 우리 동네는 이제 없다. 고단함도 즐거움도 증폭되던 젊은 시절의 흔적도 전설이 되었다. 나는 비로소 실핏줄 같은 골목길이 내 정신의 피돌기를 원활하게 해 준 근간이었음을 깨닫는다. 미워라하던 조강지처가 막상 가고 나면 그제사 비로소 소중함을 깨닫는 철 덜 든 홀아비의 심정이 이와 비슷할까.

누가 어떤 잣대로 누군가의 삶을 시시하다 할 수 있으랴. 빈한한 삶을 살았던 우리 동네 사람들은 누구도 세인의 눈길을 끌만큼 화려한 꽃을 피우지는 못했다. 그러나 무리 지어 피어서 비로소 은은한 아름다움을 발하는 들꽃처럼 팍팍한 세상을 그래도 살 만한 곳으로 만들어 가며 살았다.


있는 떡을 나누어 먹을 이웃 하나 만들지 못한 채 살아가는 나는 혹시 모세혈관경화에 걸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맥경화만 심각한 게 아니다. 모세혈관이 힘차게 피돌기를 해야 동맥도 정맥도 활발하게 움직일 터. 이웃 간의 교류는 모세혈관의 피돌기일 테고, 이야말로 원활한 사회 건강한 국가를 만드는 근간이리라.

수확의 계절이다. 이 가을이 가기 전에 겨우 눈인사만 하는 이웃들과 커피 한 잔 나누는 자리를 만들어야겠다. 냉동실에 쟁여둔 떡을 말랑하게 녹여서 함께 내놓으며 이웃사촌이라는 실한 수확을 꿈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