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이 거들다

by 최미옥

노인을 만난 건 동네목욕탕에서였다. 물소리와 아이들 소리에 아낙네들의 수다까지 뒤섞인 소음 사이로 묘한 소리가 귀를 당겼다. 나지막이 부는 휘파람 혹은 문풍지를 스치는 삭풍 비슷한 소리가 그쳤나 싶으면 다시 이어졌다. 서둘러 머리를 헹군 후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보았다. 건너편에 앉은 왜소한 노인이 몸을 씻으면서 입으로 연신 휘이, 쉐에 소리를 내고 있었다.

순간 외할머니가 생각났다. 묘한 소리에 긴장하듯 끌린 것은 무의식 속의 할머니 때문이었을까. 나도 모르게 다가갔다. 마침 등을 씻으려고 애쓰는 어른의 때수건을 빼앗다시피 받아들었다. 왜 그런 소리를 낼까, 궁금했다.

“힘등께 그라지라. 하도 힘들게 살았응께 나도 모르게 얄궂은 소리가 배어 버렸능갑소. 나는 잘 모르는디 우리 아그들도 우습다고 해싸아.”

하도 힘들게 살아서 얄궂은 소리가 몸에 배었다는 말은, 열탕과 냉탕을 오갈 때처럼 온몸에 소름을 돋구었다. 소리를 내면 덜 힘들까, 내친김에 또 여쭈었다.

“입이 거들어중께.”

성가시다는 듯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니들이 게 맛을 아느냐’는 광고처럼 네가 힘듦의 의미를 아느냐고 나무라는 것 같았다. 호기심에 다가갔다가 무안해진 나는 입 다물고 노인의 등을 공손하게 밀기 시작했다. 나뭇가지 같은 척추뼈 주위로 탄력 잃은 피부가 이리저리 쏠렸다. 한때 탄탄하게 척추를 싸안고 있던 근육과 지방은 어디로 가고 얇은 피부만 바람 빠진 풍선처럼 허술하게 노인의 몸을 싸고 있었다. 앙상한 등을 조심스레 헹구어 드린 후 내 자리로 돌아왔다. 입이 거들어준다는, 함축된 시구 같은 말이 물음표를 만들며 따라왔다.

외할머니도 그랬을까. 몸을 움직일 때마다 휘이, 쉐에, 소리가 나던 할머니. 마치 새 한 마리를 품고 있는 듯했다. 어린 나는 그저 신기했을 뿐 이유를 여쭈어보지 못한 채 돌아가셨는데 노인의 대답은 세월을 휘돌아 온 외할머니의 목소리 같았다.

할 일이 태산이라 마음은 급한데 힘에 부쳤으리라. 할머니는 황무지를 개간해서 끝이 보이지 않은 밭을 일구어낸 여장부셨다. 어둑발과 함께 들어오시어 머리수건을 벗어 옷을 털 때면 새도 기진한 듯 낮게 울었다. 휘이 쉐에.

유약한 성품인 어머니와는 정반대였다. 어머니의 꾸지람은 딱히 떠오르지 않은데 할머니의 꾸중은 매서웠다. 내가 혼이 날 땐, 현장에 있지도 않은 어머니까지 불려 나와 야단맞아야 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할머니의 걱정이 컸기 때문이리라. 억척스레 살아도 마음이 놓이지 않을 텐데 어머니는, 할머니 표현에 의하면 ‘물러터지기만’ 했다.

어머니에게서 느낄 수 없던 강한 에너지에 끌렸을까. 아무도 기다리지 않은 외가에 가고 싶어 방학을 손꼽아 기다렸다. 열두어 살 무렵이었지 싶다. 어느 날 할머니가 들에 나가면서 밥을 해놓으라고 하셨다. 할 줄 모른다고 당당하게 말했을 때도 엄마와 나는 함께 묶여 혼쭐이 났다. ‘다 큰 딸년을 저래 포시랍게 키워서 우짤라카노, 나이가 몇인데 밥도 할 줄 모르노.’ 할머니는 간단명료하게 밥 짓는 법을 일러준 후 바가지에 쌀을 담아 부뚜막에 놓고 나가셨다. 휘이 쉐에 추임새 넣던 새도 바쁘게 따라갔다.

가마솥에 불을 때서 밥을 짓는데 밥물이 부글부글 끓어 넘쳤다. 할머니 말로는 조금 끓다가 그친다고 했는데 자꾸 넘치는 바람에 시쳇말로 멘붕이 왔다. 밥은 질다 못해 죽이 되었지만 할머니는 개의치 않고 ‘사람은 사대육신 멀쩡하믄 지 밥값은 해야 하는 벱‘ 이라며 칭찬하셨다. 난생처음 내 밥값을 한 뿌듯함은 각인되었을까. 초등생도 밥값을 해야 하는 사람으로 격상시킨 살벌한 정의가 지금도 생생하다.

들에 가실 때면 새참을 들리고 앞장세우기도 했다. 할머니가 예닐곱 이랑을 차지하고 앉아서 밭을 맬 때, 나는 한 이랑을 꿰고 앉았다. 내키는 대로 호미질하다 싫증이 나면 산비탈 그늘에 주저앉았다. 여름 한낮이라 사람도 없었다. 끝없는 녹색 물결 위로 머리에 수건을 쓴 할머니 혼자 동동 떠다녔다. 망망대해에 아슬하게 뜬 작은 쪽배 같던 할머니.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소리도 쉼 없이 따라다녔다. 휘이, 쉐에.

입이 거들어주는 소리였을까. 혼자 감당해야 했기에 더 고달팠을 세월, 할머니의 땀과 눈물은 밥이 되고 도회지에서 공부하던 외삼촌의 학비가 되었겠다. 스스로 거름이 되었지만 누구의 위로도 받지 못했다. 보다 못한 당신의 입이 거들고 나섰으리라.

휘이, 쉐에.

목욕탕에서 만난 노인이나 외할머니가 내던 ‘얄궂은 소리’는 고단한 시절의 상흔이었을까. 스스로를 위로하던 중얼거림은 시나브로 새가 되었고 새는 가슴 속에 둥지 틀고 이윽고 텃새가 되었으리라. 어디선가 할머니의 새소리가 들리는 듯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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