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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찬 Jul 20. 2023

A.I를 어디까지 바라봐야 하는가

A.I 비판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A.I가 우리의 삶에 스며들었다. 여러 포털사이트에 A.I가 그린 그림이 올라오기 시작했고 A.I가 써준 글이라며 놀라워하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게다가 궁금한 것을 물으면 자동으로 대답을 해주는 A.I도 생겼다. 인간밖에 할 수 없다고 여겼던 일들을 이제는 A.I가 하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A.I의 세상에 살고 있다. 하지만 나는 A.I를 좋게 볼 수가 없다.


A.I가 대중들에게 알려지게 된 계기는 그림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러 포털 사이트에 A.I의 그림이 올라왔으며 심지어 자신의 성적 판타지를 A.I를 통해 해소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여기에 티비 광고에서도 A.I가 그린 그림이 사용되며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는데, 이것을 마냥 좋게만 바라볼 수는 없다. 그림, 미술은 모두 예술의 범주에 들어가며 예술은 자기 철학의 표현이다. 그러나 A.I는 철학을 가지고 있지 않다. 윤리적 판단을 할 수 없을뿐더러 아무런 영혼과 노력이 담기지 않은 그림을 그린다. 아니 찍어낸다. 일차원적으로 작품 그 자체로만 봤을 때 감탄할 수는 있어도 A.I가 그린 그림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갑자기 팍 식는다. 인간만이 제대로 된 예술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다. A.I의 그림은 자기 철학을 인공지능으로 나타낸 게 아니라 그저 자기만족일 뿐이다. 


조금 더 나아가면 A.I가 대신 글을 써주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건 인간과 A.I의 결과물을 점점 구분할 수 없어진다는 사실이다. 그림을 그려서 생계를 유지하는 디자이너나, 문학 작품을 쓰는 작가들이 설 자리가 없어진다. 인간은 편리를 위해서 A.I 기술을 발전시켰지만, A.I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마저 앗아가 버렸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왜 A.I를 나쁘게 바라보지 않을까. 왜냐하면 편리하고 결과물이 눈에 띌 정도로 좋아서다. 입력만 하면 글과 그림을 뚝딱 만들어준다. 사람들은 편리함을 택했다. 자신과 같은 사람들의 생계는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하지만 이 사람들을 탓할 수가 없다. 바쁘고 바쁜 사회에서 편리함을 택하는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인공지능 챗봇에게 궁금한 걸 물어보면 체계화된 정보를 알기 쉽게 정리해 주는데, 누가 편리함을 안 느낄까. 


편리해서, 정확해서 더 무섭다. 인간에게는 원초적인 생각이 있다. 이건 하면 안 된다는 생각, 선을 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 말이다. 예컨대, 우리는 사람이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고 법으로 규정돼 있지 않아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본능적으로 말이다. 표현이 공격적이긴 했으나 이렇듯 인간에게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원초적인 생각이 있다. 그러나 A.I는 이러한 윤리적인 판단을 하지 못한다. 감정이 없고 입력돼 있는 것만 할 뿐이다. 그저 묵묵히 한다. 그렇지만, 이 모습은 우리가 사회적으로 좋지 않게 바라보는 사이코패스와 다를 게 없다. 만약 그 뜻이 결코 좋지 않은 프로그램이 입력됐다면 자신의 잘못됨을 인지하지 못하고 계속 그 일을 해나간다.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원초적인 생각을 하지 못한 채 그른 일을 하는 A.I를 편리와 결과만을 보고 내버려 둘 수 있을까? 


무엇보다 우리가 책을 읽거나 작품을 보고 글을 쓰는 까닭은 이 사회에 스며들어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다.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는 존재이기에 사회에 녹아들어 살아가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 독서를 하고 예술작품을 보며 글을 쓴다. 저번 글에서도 말했지만, 독서는 다른 사람의 철학이나 행동을 자신의 삶에 반영하는 것이다. 사람이 한 경험을 다른 사람이 간접적으로 함으로써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것이다.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경험을 사람이 다뤘기에 독서가 의미 있는 것이다. 만약 A.I가 쓴 책을 읽는다고 가정해 보자.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결과물일 게 분명하다. 문장 배열, 내용이 잘 짜여 있어 잘 읽힐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A.I의 글은 새롭지가 않다. 인공지능은 새로운 걸 학습하지 못한다. A.I가 쓴 글이 아무리 뛰어나도 발전이 없다면 읽을 의미가 없다. 계속해서 인공지능이 쓴 글만을 읽으면 인간 사회에 섞여 살아가겠다는 생각은 물거품이 된다. 왜? 발전이 없으니까. 새로운 걸 전혀 습득하지 못한 인간은 삶을 꾸려나가는 데 어려움을 겪기 마련이다. 새로운 걸 해보며 삶의 가치를 정립하는 게 삶의 본질이라서 그렇다. 


예술작품도 마찬가지다. 예술은 자기 철학의 표현이라고 앞에서 말했다. 말 그대로 사람은 예술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한다. 그것을 진리라고도 표현하곤 하는데, 다시 말해 예술은 진리가 작품 속에서 스스로를 정립하고 있는 것이다. 진리를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는 없으나 예술에서의 진리는 인간이 인간에게 전하는 자신의 철학이다. 우리가 예술 작품을 보고 감탄하는 이유는 눈으로 보이는 것에 대한 감탄도 있지만, 예술가가 이 작품을 통해서 어떤 말을 하고 싶었는지 깨닫고 숨겨진 의미를 찾는 것에서 탁월함을 느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A.I가 그린 그림의 작품성은 인간보다 좋을 수밖에 없고 오로지 상품적으로만 가치가 매겨질 뿐이다. 인간의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A.I를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의 원초적 생각과 가장 밀접한 연관이 있는 범죄 때문이다. 지금의 기술은 고도로 발전했다. 유명 가수의 목소리로 다른 노래를 커버할 수 있으며, 인기 연예인의 얼굴을 그림에 집어넣어 성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자신이 현실에서 하지 못하거나 어려운 일을 A.I를 통해 해소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면 안 되는 일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장벽이 점점 허물어지고 있다. 누구나 손쉽게 언제 어디서든 A.I와 같은 인공지능을 접할 수 있으며 딴 세상의 일로만 여겨졌던 일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함으로써 가치판단력이 흐려진다. 이렇게 가치판단을 할 수 없으면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잘못된 것인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 없으며 이는 곧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 


나는 A.I의 발전을 마냥 좋게만 바라볼 수 없다. 인간의 일을 대신해 준다는 편리함은 부정할 수 없지만,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앗아가 인간의 비판적 사고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정신을 헤집어 놓는 A.I는 자신의 잘못을 느끼지 못한다. 이대로 인공지능의 발전을 모른 채 한다면 머지않아 인공지능은 우리 사회에 큰 파장을 안길 것이다. 그래서 무섭다. 그동안의 사례를 보면 사회의 문제는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생겼다. 자동차가 발전해 교통사고가 생겼고 카메라가 발달해 불법촬영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었다. 게다가 기술을 개발하며 환경오염이 극심해졌고 무엇보다 미디어의 발달로 우리 사회는 생각할 힘을 잃어버렸다. 당연하게도 인공지능이 더 발전해 나간다면 더 많은 문제가 생길 것이다. 인간이 이것을 모두 감당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이게 바로 우리가 인공지능(A.I)을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하는 이유다. 한 면의 달콤함에 사로잡혀 어두운 면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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