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의 끝자락에서 다시 모일 수 있었음에 감사
이 이야기를 할지 말지 고민하다가 결국 쓰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어떤 삶을 살아갈지는 몰라도,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안다. 그 안에는 야구가 있었다. 스쳐 지나가는 순간의 기억이 아니라, 세월과 함께 서서히 잊혀가다 어느 날 문득 가슴 찌르는 아픔이 되어 되살아날 추억으로 남아 있는. 그게 야구였다. 그 작은 공 하나가 뭐라고 나를 다시 움직이게 했을까.
다시
2024년의 10월 말, 리틀야구팀 동기들이 모인 카톡방에 대진표 사진과 글 하나가 올라왔다. 리틀야구팀에서 우릴 지도해 주셨던 코치님이 창단한 팀에 잠시 들어가 11월 말부터 12월 초에 열리는 대회에 참가하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그 순간 카톡방 속에서 눈치 싸움이 시작됐다. 그도 그럴 것이 초등학생 시절 야구만 바라보고 달려왔던 우리는 저마다의 이유로 야구를 그만두었고 간간히 연락 정도만 하고 지냈다. 그런 와중 주장이었던 친구가 대회에 참가해 보자는 말을 꺼낸 것이다. 주장이 보낸 사진과 글을 살펴보니 19살까지 대회에 참가할 수 있었고, 우리는 선수등록비 정도만 내면 됐다. 한 명이 참여하겠다고 포문을 연 순간 실기고사나 논술 시험을 앞두고 있는 친구들(아예 잠수를 하는 친구도 있었다.)을 제외하고 6명이 모였다. 부족한 인원은 코치님의 팀에서 뛰고 있는 중2~ 고1 정도 되는 동생들이 뛰어주기로 했고, 경기장은 강원도 횡성에 있어 조금 멀었지만, 코치님 차로 다 같이 타고 갈 수 있었다. 우리 6명은 한때의 전부였던 야구를 다시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벅찼지만, 10대의 끝자락에서 다시 모여 뛸 수 있다는 게 실감 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자신이 있었다. 비록 풀멤버가 아니라고 해도 코치님 팀에서 뛰는 동생들의 실력이 괜찮다고 들었고, 우리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각자의 색깔이 확실한 선수들이었으니 말이다. 과장 좀 보태면, 모두가 각자의 포지션과 타순에서 이름값 좀 하던 선수들이었다. 대회에 참가하는 상대팀들의 실력이 어떤지는 상관없었다. 다시 야구공을 잡는다는 것 자체로 좋았다. 그 대회가 아마추어 야구의 시즌 마지막을 장식하는 대회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땐 어떻게든 이기겠다는 마음뿐이었다. 따지고 보면 10대의 전부였던 야구를 10대에서 떠나보내는 고별식이었던 셈이다.
준비
대회에 참가하겠다는 우리의 의사가 코치님께 전달되자, 코치님은 우리가 연습할 수 있도록 훈련 일정과 장소를 조정해 주셨다. 그 덕분에 우리는 잊고 있던 감각들을 조금씩 되살릴 수 있었다. 10월 말부터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연습장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신 코치님 덕분에 우리는 5년 만에 한 자리에 모였다. 간간히 연락하고 가끔씩 얼굴을 보긴 했지만, 야구를 하러 모이니 한편으로는 어색하고, 반가웠던 기억이 난다.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아 각자 시간이 되는 요일만 나오긴 했지만, 그 시간을 굉장히 알차게 썼다. 경기를 뛸 수 있는 몸을 만들고, 5년 전과 달라진 체형에 맞게 스윙 폼을 교정했다. 5년 전만 해도 내 키가 제일 컸는데, 나머지 5명이 다 나보다 커 있었다.
우리는 베팅센터에서 하루에 100개가 넘는 공을 치며 감각을 찾기 위해 애썼다. 공을 치지 않을 땐 스윙을 계속 돌리면서 시뮬레이션을 하고, 스스로의 스윙 메커니즘을 교정하며 다가올 대회를 준비했다. 나는 잠깐 쉬면 몸이 굳는 스타일이라 처음에 훈련장에 와서 배팅을 칠 땐 3개 중 2개가 파울이었다. 그걸 보고 진짜 악착 같이 연습했다. 위에서 말한 훈련은 물론이거니와 예전과는 다르게 몸에 근육도 조금씩 붙어서 더 무거운 배트를 들기 시작했고, 배트가 손에 맞을 수 있게 스윙을 계속 돌리곤 했다. 그런데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내 옆에 있는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예전과는 달랐다.
잠깐 지난 이야기를 하자면 초등학생 때의 우리는 누구보다 야구를 좋아해서 모인 아이들이었지만, 야구를 잘하기 위한 훈련은 하기 싫었다. 하루하루 훈련하는 게 힘들었고, 집에 돌아오면 녹초가 돼서 잠들었다. 그런 하루가 반복되었고 기계적으로 운동을 하곤 했다. 야구를 좋아했지만, 야구 그 자체를 즐기면서 할 수 없었다. 각자가 야구를 그만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선수가 되면 야구를 ‘무조건’ 해야 했기 때문이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고된 훈련을 버틸 수는 있어도, 버틴다고 야구가 즐거워지지는 않았다. 어떤 것을 좋아한다고 해서 무조건 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때 느꼈다.
그랬던 우리가 야구를 즐기면서 할 수 있었다. 야구를 하지 않는 5년 동안에도 다 같이 야구장에 가거나 메이저리그 경기를 보기도 하며 야구를 보는 시선이 넓어졌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은데, 경기장 안에만 있다가 경기장 밖에서 선수들이 플레이하는 것을 지켜보니 그동안 야구를 보는 시선이 굉장히 좁았다는 것을 느꼈다. 확장된 시선과 경험이 합쳐지니 이것을 왜 하는지, 자신의 플레이 스타일은 어떤지 정립하고 훈련을 할 수 있었다.
훈련을 하다 보니 내가 많이 바뀌었다는 걸 은연중에 느끼게 됐는데, 몸에 힘이 붙어서 예전보다 더 멀리, 강하게 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예전에는 장타를 노리는 타자는 아니었으나, 이제는 노리고 장타를 칠 수 있는 중장거리 타자가 되어 있었다. 여기에 야구를 보는 눈과, 그동안 함께했던 친구들과의 신뢰까지 더해지니 자신감이 확 붙었다. 자신감도 붙었겠다, 경기가 열리는 11월 말까지 매주 이틀마다 훈련을 거듭하며 감을 잡았다. 아니, 실력을 향상시켰다.
첫 경기
경기를 앞둔 마지막 훈련일. 우리는 각자의 배번이 적인 유니폼을 받았다. 예전에 23번을 등에 달고 뛰었던 나는 이번에 14번을 달고 뛰겠다고 마음먹었다. 비록 지금은 졸업했지만, 나는 학교의 14번째 기수의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14번이 남아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이건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냉큼 집어왔다. 14기 친구들과 함께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경기에 임하고자 했다. 사실 대회 전에 코치님께서 살짝 겁을 주셨다. 상대도 고등학생들이고, 프로에 못 간 애들도 나온다는 이야기였는데, 여기에 더해서 가장 빠른 공이 140KM/h까지는 나온다고 하셨다. 그래도 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선수 때는 각자의 위치에서 이름을 날리던 녀석들이 모인 게 우리 팀이었으니까 말이다.
경기를 앞두고 코치님께서 라인업을 불러주셨다. 나는 5년 전에도, 지금도 늘 같은 위치에 있었다. “박민찬 1번 센터(중견수)” 몇 년 동안 지켜오고 자부해 온 내 자리다. 1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서면 야구는 시작되지 않는다는 자부심으로 타석에 들어간 게, 광활한 외야 한가운데 서서 코너 외야수들과 캐치볼을 하던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을까. 괜히 가슴이 벅찼다. 설렘도 잠시, 경기장에 들어가는 순간은 그동안 연습한 것을 오로지 쏟아내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경기 내용도 간략하게 풀자면, 첫 타석은 유격수 앞 내야안타로 출루했고 곧바로 2루 도루에 성공해 2번 타자였던 주장의 적시타 때 홈을 밟았다. 두 번째 타석에서는 좌중간을 가르는 3루타로 주자를 한 명 불러들였고, 3번 타자이자 포수를 맡았던 친구 덕분에 또 한 번 득점에 성공했다. 세 번째 타석에서는 우중간 쪽 홈런을 날렸고, 이 타석이 1차전 마지막 타석이 되었다. 최종 스코어는 8:0으로 콜드게임 승. 기록은 3타수 3안타 1홈런.
첫 경기가 끝나고 횡성에서 안양까지 올라가는 길에 우리는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들을 하며 올라갔다. 코치님과 함께 말이다. 여기에 모든 이야기를 다 적을 수는 없겠지만, 5년이 지나도록 우리를 잊지 않고 아껴주신 코치님에 대한 감사, 그리고 시간이 지나 야구와 세상을 바라본 눈이 생긴 우리의 이야기였다. 첫 경기를 기분 좋게 가져간 우리는 깊은 이야기뿐 아닌 야구할 때의 추억을 이야기하며 기분 좋게 올라갔다. 공식 업체에서 집계한 첫 경기 MVP는 나의 몫이었다.
마지막 경기
11월 말, 엄청난 폭설 때문에 경기가 한 주 뒤로 밀렸고, 준비할 시간이 더 있었다. 반대로 말하면 더 추워진 환경에서 경기를 치러야 했다. 우리는 변함없이 운동을 하며 감각을 유지해 두고자 했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노력에 차등을 매길 수 없다는 건 알지만, 진짜 미치도록 임했다. 저녁 8시 30분까지 훈련장에 가서 11시에 훈련을 마치는 루틴을 고수했다. 대회에 참가한 팀들끼리 오가는 이야기를 코치님이 전달해 주셨는데, 실전감각 이슈가 있었던 우리가 첫 경기 보여준 파괴력이 굉장했고, 단숨에 우승후보까지 올랐다는 것이다. 우리는 두 경기를 더 이기면 결승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우리 주장이 운동을 하다가 왼팔을 다친 것이다. 유격수를 맡고 있던 주장이 갑자기 카톡방에 올린 “나 없이 이길 수 있지?”라는 말에 머리가 새하얘졌다. 단순히 유격수, 2번 타자의 공백이 아니다. 그 친구가 같이 그라운드에 서 있고 없고의 공기가 확실히 다르다. 솔직히 말하면 2번 타자, 유격수의 공백은 다 같이 메울 수 있었다. 그런데, 그라운드에 없는 주장의 공백은 조금 벅차다. 그 친구는 동기들의 생일과 음식 취향까지 모두 외우고 있는 녀석이다. 다른 말로 하면 야구뿐 아니라 우리를 보는 눈이 있고 각자의 스타일에 맞게 플레이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줄 아는, 내가 본 최고의 주장이다. 그 공백을 어떻게 메우느냐가 우리의 고민이었다(코치님은 이걸 어쩌나 하고 고민하시면서 머리카락이 빠지셨다고 한다.). 그나마 주장이 우리와 동행하는 것에서 위안을 얻었다.
두 번째 경기도 횡성에서 열렸고, 우리는 아침 일찍 모여 경기장으로 향했다. 그때 코치님께 장난 반 진심 반으로 한 말이 기억난다. “코치님, 저희가 꼭 우승감독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횡성까지 가는 길은 역시 시끌벅적했다. 나의 농담 따먹기부터, 전지훈련 갔을 때의 여러 이야기들, 3타수 1안타의 안타가 행운의 안타인 우리 팀 4번 타자 놀리기 등등 경기 걱정은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나를 포함한 친구들의 마음속 한 구석에는 주장의 공백을 메워 이기겠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목차에서 보듯 2차전은 졌다. 그것도 1점 차이로. 1회 초에 4점을 냈지만, 1회 말에 무려 6점을 헌납했다. 6개의 사사구와 3개의 실책이 겹쳤다. 사사구는 그러려니 했다. 선발투수는 코치님 팀의 선수고, 당시 중2였으니 우리에 비해 어리다. 함께했던 시간도 많지 않아서 낯설고 긴장했을 거다. 오히려 실책이 문제였다. 투수가 흔들리면 수비가 도와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물론 이유야 있다. 유격수였던 주장이 경기에 나오지 못하게 돼서 내야수들이 익숙하지 않은 포지션으로 수비위치를 옮겨야 했다. 코치님 팀에서 대체선수를 구해 1루에 세웠고, 이에 따라 1루수였던 친구가 3루로, 포수였던 친구가 유격수로 자리를 옮겼다. 야구가 참 묘한 스포츠인 이유가 여기서 나왔다. 하필 1루에서 견제구 미스가 나오고, 3루에서 포구 실책이, 그리고 좌익수와 유격수 사이 떨어지는 애매한 공은 콜플레이 미스가 났다. 각각 1점씩은 헌납한 실책이었고 결과적으로 유격수 하나 빠진 게 나비효과가 되어 돌아왔다. 나도 아쉬운 게 있었다. 타자가 친 공이 날아왔고 타구는 우중간 쪽으로 빠질 듯했다. 힘껏 달렸으나 그 타구는 글러브 끝을 스쳐 지나갔다. 친구들은 쫓아갔던 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이야기했으나 내 생각은 달랐다. ‘그것만 잡았어도 이겼을 텐데.’, 그리고 한편으로는 수비위치를 디테일하게 잡아주는 주장의 빈자리가 너무나 컸다. 외야에서는 타자가 잘 보이지 않아 대략적인 감과 배트를 휘두르는 타이밍을 보고 수비위치를 맞추지만, 내야에서는 타자가 더 잘 보이니 조금 더 확실한 수비위치를 이야기해주곤 한다. 반걸음, 딱 그 차이였다. 지금 생각해도 아쉬움이 짙게 남는다.
실책 하나하나가 아쉬운 경기였다. 타선도 1회를 제외하면 그렇다 할 힘을 내지 못했다. 글에서는 아쉬움과 후회가 묻어나지만, 경기하는 그 순간에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역전을 꿈꾸고 있었다. 마지막 공격이 시작될 때 5:6으로 지고 있었고, 선두타자가 아웃됐지만, 9번 타자였던 동생이 볼넷을 얻어 출루했다. 그리고 대주자로 주장이 1루에 들어섰다. 1번 타자였던 내가 타석에 들어섰고 포수가 공을 잠깐 잃어버린 틈을 타서 주장이 2루로 들어갔다. 득점권, 그리고 대회에서 4타수 4안타를 기록하고 있는 나였다. 투수가 던진 공이 바깥쪽 낮게 오자 연습한 것처럼 방망이를 돌렸고, 좌중간을 가르는 2루타가 되어 6:6을 만들었다. 2루 베이스를 밟고 우리 팀 더그아웃을 보며 포효했다. 친구들과 동생들도 환호했다. 이어서 3루 도루에 성공했으나 후속타 불발로 득점하진 못한 채 수비로 들어갔다.
상대가 말 공격이라 1점이라도 헌납하면 안 되는 상황. 여기서 실점하지 않으면 추첨으로 승패가 결정 난다. 우리는 역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추첨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에이스를 마운드에 올렸다. 수비에 나가기 전, 우리는 모두 더그아웃 앞에 모여 이겨서 돌아가자는 이야기를 했다. 둥그렇게 모여 있는 친구들의 눈빛을 보며 느꼈다. 5년 전과 똑같은 눈빛이었다. 어떻게든 이기겠다는 눈빛, 야구를 향한 순수한 즐거움이 묻어 있는 눈빛이었다. 아마 다른 친구들 눈에 보이는 나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첫 타자를 아웃처리하고 두 번째 타자에게 안타를 허용. 폭투로 인해 2루까지 주자가 나갔다. 타자는 3, 4번. 코치님은 타격감이 좋은 이 둘을 고의사구로 거르는 전략을 택했고 주자는 만루가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일이 터졌다. 투수의 공이 포수의 미트를 맞고 뒤로 빠져버렸다. 그 사이 3루 주자가 홈을 밟았고 경기는 끝났다. 최종 스코어는 6:7.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굳은 표정으로 더그아웃에 들어가 짐을 싸며 분루를 삼켰다. 각자 아쉬운 상황이 많았을 거다. 실책 3개만 아쉬운 게 아니다. 우리 팀의 총합 안타는 3개였고, 보이지 않는 타석에서의 실수도 있었다. 아쉬움으로 가득해도 누구를 원망할 수는 없었다. 나는 이 대회를 통해 우리가 팀이라는 걸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서로를 믿고, 어떻게든 이기려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야구를 진정으로 사랑했다. 10대를 함께 보낸 친구들이 다시 뭉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우리를 다시 모아주신 코치님께도 너무나 감사하고 죄송했다. 우리의 10대는 이렇게 끝났다.
그 후
대회가 끝나고도 우리는 연습장에 계속 나갔다. 이유는 단 하나. 다시 모인 김에 야구팀을 하나 만들기 위해서다. 코치님께서 독립야구팀을 하나 만드는 중에 있고 우리를 선수로 스카우트하셨는데, 일단은 거절했다. 야구를 재밌게 하고 싶었다. 다시 모여서 야구를 하는 순간의 기억이 너무나 아름답게 남아 있던 우리는 팀을 하나 만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준비하는 과정을 거쳤다. 중간중간 연습도 겸하다가 본격적으로 팀을 만들기 위해 야구를 좋아하는 주변 친구들에게 연락을 돌리고 리그 참가비도 걷었다. 유니폼도 꽤 예쁘게 맞췄다. 지출이 꽤 컸지만, 즐거웠다. 게다가 모두 내색하지는 않아도 2차전에서의 마음의 빚이 서로에게 있었다. 이런 아쉬움을 털어내고 우리가 좋아하는 야구를 야구 그 자체로 즐기기 위해 매일 같이 연습에 매진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친구들 몇 명과 함께 코치님 팀에 있는 초등학생들의 기본기를 가르치고 있다. 학교에서 맨몸운동 수업 지원교사를 하며 배우는 이의 시선에 맞춰 공감하고 알려주는 법을 어느 정도 터득한지라 이 아이들에게 어떤 걸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걸 누군가와 나누는 일이 참 보람차다는 걸 느끼는 요즘이다. 아직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에게 무리가 안 가게끔 자세를 잡아주고, 아이들에게 잘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항상 해주곤 한다. 예전에 썼던 글에 “나중에 여러분이 진로를 결정할 때 내가 잘할 수 있는지, 내가 하고 싶은 일인지, 그리고 의미 있는 일인지 이 세 가지를 고려해 보길 바랍니다.”라는 말을 인용한 적이 있다. 학창 시절 선생님께서 수업 시간에 해주신 말씀인데, 당장 야구가 내 진로가 되지 않더라도 나는 무언가를 나누고 함께하는 일에서 의미와 가치를 느낀다는 걸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코치님께서 대회에 참가하겠다는 제안을 하시지 않았으면 이런 보람도 느끼지 못했을 거다. 10대의 시작과 끝을 야구로 열고 닫았지만, 야구가 있었기에 더 찬란한 20대를 꿈꿀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故최동원 선수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젊음을 모두 쏟아부은 그라운드를 떠나 홀로 방에 들어와 문을 잠그고 벽에 기댔을 때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린다면 그 선수는 진정 야구를 사랑했노라고.”
나는 야구에서 등을 돌린 지난 5년 간 제자리에만 머물러 있었던 게 아닐까. 물론 그 시간 동안 다양한 배움을 행하고 견문도 넓히며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야구를 그만두고부터 야구가 주는 즐거움과 가치를 보지 않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야구에서 등을 돌리니 야구를 보는 눈은 더 넓어졌어도 야구가 주는 즐거움은 애써 외면했다. 그랬던 내가 친구들과 다시 모여 경기장을 누빌 수 있었다. 우리 팀의 첫 번째 타자로, 광활한 외야의 한가운데에 서서 말이다. 야구로 10대를 보내준 나는 막 시작한 20대에도 작은 공 하나를 손에 쥐고 있을 것이다. 30대, 40대가 돼서도 쥐고 있을지는 잘 모른다. 그렇지만, 이것만은 확실하다. 그 작은 공 하나가 지금의 나를 만들어줬다고. 그 선수는, 아니, 나는 진정 야구를 사랑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