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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게 가난한 사회를 위하여

<헷갈리는 사회문제 깊이 들여다보기> 수업 쪽글

by 박민찬

나날이 발전하는 기술과 사라지는 인간상


4차 산업 혁명 시대에 접어든 현재, 거대기술이 주는 효율성과 편리함은 인간들의 삶에 깊숙이 스며들었다. 스마트폰이 보편화된 지금, 누구나 손바닥만 한 크기의 기계를 통해 연락, 오락, 심지어는 재산관리까지 손쉽게 할 수 있고,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병원에서 진단을 받고 삶을 연장할 수도 있다. 최근에는 인공지능에게 정보를 얻고 다시 그 정보를 정리하게끔 명령할 수도 있게 되었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거대기술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 글을 통해 미약하게나마, 거대기술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기술이 주는 편리와 안락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의 이유를 찾길 바란다.


스마트폰이 언제부터 보편화되었는지 아는지 묻고 싶다. 내가 고등학생이 될 무렵, 집 앞 초등학교에서 나오는 초등학생들은 모두 스마트폰을 들고 있었다. 비교적 어린 나이임에도 능숙하게 화면을 움직였으며, 그중에는 신형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 아이도 있었다. 거의 모든 걸 다 할 수 있는 손바닥만 한 기계가 거의 모든 것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는 아이들의 손에 들려있었다. 그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유행하는 게임을 하는 게 즐거운 듯했고, 친구들과 유튜브 영상을 보며 순수하게 웃곤 했다. 스마트폰이 보편화되고부터 아이들은 손쉽게 여가를 즐길 수 있었고, 집 안에서도 많은 친구들과 화면 너머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가 본 기억이 한 번씩 있을 것이다. 가벼운 찰과상부터 여러 질병까지, 거대기술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있어 의료시설은 삶을 연장하기 위한 도구가 되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병원을 찾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가만히 두어도 금방 나을 가벼운 부상임에도 병원에 오는 사람이 생겼고, 조금이라도 아프면 잠시 기다리는 게 아니라 병원에 찾아오곤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양한 의료기술이 개발됨에 따라 사람들은 삶을 ‘연장’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보다 정확하고 빠른.” 우리가 인공지능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닐까 조심스레 넘겨짚어 본다. 우리 삶에 인공지능이 들어왔다. 개인의 정신노동을 컴퓨터로 대체하던 3차 산업혁명 시대와는 다르게, 4차 산업혁명에 이른 현재는 개인의 사고를 인공지능에게 맡길 수 있게 되었다. 인공지능이 학습함에 따라 특정 주제의 내용을 정리해 주고, 사용자의 인터넷 사용기록을 읽어내 ‘사용자 맞춤’ 콘텐츠를 제공해 준다. 인공지능 기술이 계속해서 발전해 감에 따라 인간은 움직이지 않아도 됐고,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어졌다. 여기에 가장 어울리는 단어는 단언컨대, ‘안락’일 것이다.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우리의 삶이 풍족해지고, 편리해진 건 부정할 수 없다. 앞에서 말했듯, 거의 모든 걸 할 수 있는 스마트폰의 보편화, ‘믿을’ 수 있는 의료기술의 발전으로 늘어난 삶, 게다가 인간의 생각을 대신해 주고, 인간의 행동을 학습해 비슷한 걸 추천해 주는 AI까지. 인간은 기술에 의존하여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 그리 이상하진 않아 보인다. 그 몇 년 사이에 우리 곁에 스며든 거대기술이 우리의 인간성을 앗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당신은 느낄 수 있는가?


SF 애니메이션 <월 E>에는 폐허가 된 지구를 떠나 우주여행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온다. 안락한 의자에 앉아 움직임이 거의 없는 똑같이 생긴 사람들. 손발은 짧게 퇴화하고 몸은 비대해졌으며, 운동능력을 거의 상실한 사람들이 스크린 장치가 있는 의자에 앉아 버둥거린다. 모든 서비스가 자동화된 시스템으로 되어 있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온갖 편의를 누릴 수 있다. 자신의 활동을 포기한 대가로 얻은 안락과 편의. 우주선 내부의 상점과 편의시설을 떠돌며 그저 먹고 소비하는 것이 일상인 사람들. 그들은 바로 옆에 있는 사람과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스크린으로만 대화를 나눈다. SF가 대개 그렇듯이 극단적 설정이지만, 사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현실적인 상징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은 어쩌면 미래의 우리 모습일 수도 있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경험했던 비대면 상황을 빗대어 보면 아주 먼 미래의 모습이라 잘라 말하기도 어렵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스크린을 앞에 두고 의자에 앉아 하루 종일 배달음식을 시켜 먹고 시간을 보내던 사람들의 모습이 우주선 사람들과 어딘지 닮아 있다(녹색평론. 2024. 185호. 정형철).



기술이 지향하는 바는 무엇인가


기술은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다. 도대체, 왜, 무엇을 위한 개발이란 말인가. 거대기술이 우리의 삶을 구속한 현재, 우리는 기술이 지향하는 바를 물어야 한다. 기술 발전에 따른 공해로 인해 푸른 들판과 강산이 사라지고,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기 어려워진 지금, 본질적인 담론을 시작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희망이 남아 있을 리 없다.


부유층에서 떠드는 기술 발전의 목적은 경제 성장을 통한 만인의 부다(C. 더글라스 러미스. 레디컬 데모크라시. 2024). 풀어서 이야기하면 발전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는 은유다. 발전이라는 은유 덕에 발전 이데올로기 아래 실행되는 계획들이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것으로 보이게 되고, 본질적으로 내재된 실체를 발전시켜 그것의 본래 예정된 미래를 실현시킬 수 있을 거란 인상을 준다는 사실이다. 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것을 대신하는 효용성, 그리고 인간의 능률을 위한 편리함을 통해 궁극적으로 경제와 이어지는데, 경제발전의 종착지는 만인이 부를 누리는 것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 역시 ‘부’라는 말을 낱낱이 파헤쳐 보면, ‘부’의 본질이 재산으로 사람을 지배한다는 뜻이란 걸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부자의 부유함은 가난한 사람의 빈곤으로 인해 두드러진다. 조금 거칠게 표현하면 부자들의 재산은 가난한 사람들이다. 재산으로 사람을 부리며 그를 통해 자신의 부를 훨씬 돋보이게 만들곤 한다. 나라로 범위를 넓혀 봐도 마찬가지다. 선진국의 부의 원천이 무엇인가. 우리가 후진국이라 칭하곤 하는 가난한 나라의 재산(자원)과 인력(이주노동자)이다. 빈익빈부익부라는 말만큼 경제를 잘 나타내는 말은 없다. 경제를 발전시키면 발전시킬수록 가난한 사람, 가난한 나라는 부유한 사람과 나라의 독점으로 인해 더욱 가난해지고, 그 반대로 부유한 사람, 부유한 나라는 더욱 잘 살게 된다. 세계경제체제는 불평등을 조장하고 불평등을 원료로 작동한다는 이야기가 딱 맞아떨어진다.


사상가 리 호이나키는 저서 <正義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에서 “모든 생명은 흙에서 나와 흙으로 되돌아간다.”라고 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흙이란, 테크놀로지(기술)의 편리함에 기대지 않고 다 함께 농사를 지으며 빈곤한 삶을 영위하는 게 필요하다는 의미다. 우리 인간들은 포장된 아스팔트 도로가 아닌 흙을 밟고 있어야 하며, 나의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야 한다. 이러한 흙의 본질을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은 알지 못한다. 아니 알려하지도 않는다. 현재의 거대기술 문명은 흙으로 돌아가길 거부한다. 계속해서 기술을 발전시키고 건물을 높이 세우며 편리, 효율, 합리라는 말로 사람들을 매료시키지만, 결국의 목표는 영생, 그리고 자본이다. 다소 극단적으로 들릴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인간은 죽어야 한다. 때가 되면 인간은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 인간이 영원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면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구축하지 못한 영혼들이 넘쳐나는 죽은 자들의 세상이 될 것이다.


기술은 영생을 위해 달려간다는 건 이제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영생이라는 생명질서에 위배되는 행위를 자본을 통해 거래하여, 부유한 자는 더 부유해지고, 빈곤한 자는 더 빈곤해지는 사회시스템이 심화•고착화될 게 틀림없다.



인간 된 삶에 대하여


무분별한 기술발전을 멈추기 위해서는 인간이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인간은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자신이 속한 사회 속에 스며들기 위해 끊임없이 학습하고, 타인을 이해하며, 함께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공동체 정신이 깃든 하나의 사회를 이룬 동물이 바로 인간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은 흙을 밟고 자신의 것을 다른 이와 나누는 존재다.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다. 자신이 사회 속에서 존재하는 이유를 알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사유한다. 그러나 지금의 인간은 인공지능에게 의존하여 자신의 사유할 자유를 빼앗기고 있다. 자신만의 치열한 생각에서 우러나오는 진실된 언어를 보기 힘들어진 게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다시 리 호이나키를 언급해 보면, 그는 인간 된 삶의 조건으로 시, 언어, 농사를 강조한 바 있다. 이것을 내 관점대로 재해석해 보면, 시의 경우 그것이 주는 특별한 생태적 감수성이 있는데, 시는 직접적인 표현을 하기보다는 은유적인 표현으로 인간상의 모습을 언어로써 표현한다. 리 호이나키는 이것을 보고 “시인은 신의 언어를 번역하는 자”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생태적인 감수성을 드러내는 언어를 신만큼 드높게 바라본다는 것이다. 언어를 독서, 소통과 연관 지어보면, 독서는 타인의 생각을 전해 들을 수 있는 오래된 대화수단이다. ‘독서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자는 타인과의 대화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라는 구절로 보았을 때 리 호이나키 역시 읽고, 쓰고, 말하는 행위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내 시선으로 보면, 무비판적으로 거대기술문명을 비판하고 부정하기보다는 시, 언어를 통한 건강한 의사표현을 통해 주변의 사람들과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의미 있다는 것을 표현하려는 리 호이나키의 메시지라고 짐작해 본다. 농사의 경우 인간이 오래전부터 해왔던 먹고살기 위한 수단이며 그러기 위해 부지런히 일을 하며 살아가야 할 이유를 상기시킨다. 농사야 말로 생태, 공동체주의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 가장 필요한 일이지 않은가. 이것이 진정한 인간 된 삶 아닌가.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서 지섭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사랑이 없는 욕망만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 한 사람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릴 줄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만 사는 땅은 죽은 땅입니다.”라고. 기술이 생활 속으로 스며들며 인간은 점차 공동체에서 개인으로 바뀌었고,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하겠다는 욕망만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인간은 서로 사랑하며 부대껴 살 수 없다. ‘죽은 땅’에서 인간이 온전히 살아 있을 수 있는가?



빈곤을 영위하며


고르게 가난한 사회가 곧 진리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우리 삶에 기술이 스며들고부터 인간은 없어지고, 자본만 남아 있다. 다소 급진적으로 보일 수 있어도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삶은 농사를 기반으로 하는 마을공동체여야 할 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기술과 경제발전에만 기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필요한 기술은 거대기술이 아닌 고대의 기술임을 인지하고 살아가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고대의 기술은 밥 짓기, 집짓기 같은 자립의 기술을 뜻하는데, 이를 실천하기 위해 공동체를 만들어낸다면 우리는 서로 토론하고 행동하며 자립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곧 민중이 권력을 잡는 것을 뜻한다. 부유한 이들, 혹은 정치세력에게 경제적, 기술적으로 자립을 이룬 농부들의 나라는 가장 끔찍한 악몽이다.


이제는 돌아가야 한다. 민중들이 연대하고 목소리를 내던 시기로. 풀뿌리 민초들이 흙을 밟고 일어서는 그때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처럼 편리한 사회가 아닐지 모른다. 지금처럼 안락한 사회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따뜻함이 있다. 빈곤하지만, 마음만은 풍요롭다. 자신의 곁에 있는 사람들과 배움의 공동체를 만들어 인간 된 삶을 위한 여정을 비틀거리며 떠난다면 그걸로 됐다. 우리에게 필요한 기술은 거대기술이 아닌 고대의 기술, 우리가 빈곤한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 필요한 기술뿐이다. 인간의 자주성을 빼앗는 기술은 자본을 바탕으로 하지만,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데 있어 필요한 기술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우정과 사랑을 바탕으로 한다. 안락에서 벗어나자. 이보다 더 풍요로우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참고문헌

리 호이나키. 2007. 『正義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녹색평론사

앤드루 스탠튼. 2008. 『월 E』

정형철. 2024. “지금 왜 우리는 필요 없는 존재가 되려 하는가.”, 『녹색평론 185호』

조세희. 1978.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이성과 힘

c. 더글러스 러미스. 2024. 『레디컬 데모크라시』. 한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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