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헷갈리는 사회문제 깊이 들여다보기> 수업 쪽글
아픔은 어디서부터 오는가?
작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프면 병원에 가는 게 당연하다. 사실 병원에 가지 않는 게 이상해 보일지도 모른다. 의료 시스템이 나날이 발전해 가는 와중에, 혜택을 누리려 하지 않는 사람들은 멍청한 사람으로 보일 게 분명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들은 아픔을 낫게끔 하는 것에만 주안점을 두고, 무엇이 자신을 아프게 하는지, 본질적인 건강을 위한 방법이 무엇인지 사유하지 않으려 한다. 하기야, 의료기술이 발전하고 있으니 이러한 고민은 필요 없는 것으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더 나은 인간 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아픔이 어디서 오는지를 탐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감기, 코로나 바이러스와 같은 질병의 발병은 기본적으로 면역력과 깊은 연관이 있다. 면역력이 높으면 높을수록 질병에 걸릴 확률이 낮아지고, 면역력이 낮다면, 질병에 걸릴 확률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우리들은 흔히 면역력이라는 것을 몸의 건강, 즉 꾸준한 운동, 건강한 식습관, 규칙적인 생활 습관을 통해 높이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인간의 경우, 면역력은 정신적인 요인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 2022. 김종철).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지난 2020년, 코로나가 창궐했을 때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가장 큰 원인은 미지의 바이러스가 주는 두려움 때문이었을 수도 있지만, 자신이 얼마나 건강한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따지고 보면, 산업문명이 지구를 삼켜버린 이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맑은 공기, 푸르른 대지, 청량한 물과 함께 살아갈 수 없어졌다. 산업문명이 가져다 준 혜택은 우리가 보다 풍요롭고,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주었지만, 역설적으로 우리가 밟고 있어야 할 흙이라는 중요한 가치를 파괴해 버렸다. 모든 생명체들의 어머니인 흙 위에는 아스팔트가 깔리고, 아스팔트는 매캐한 연기를 내뿜고, 흙의 아이들인 강과 나무, 하늘을 오염시켰다. 아스팔트가 깔리고 인간은 더 빨리 이동할 수 있게 되었으나, 인간은 인간의 향토적인 생활조차 오염시켜 버렸다.
인간은 원초적 본능에 기인한 동물이라고 바라보는 관점에서, 산업문명이 들어섬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의 경쟁을 추구하게 된 인간들이 자신이 가진 체력과 에너지를 같은 인간과의 경쟁에 쏟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공동체가 개인으로 바뀌던 근대의 서막은 인간들 스스로가 고립되게 만들었다. 서로를 밀쳐야 하고, 자신만이 살아남아야 하는 이 시대에, 어떻게 인간이 강인한 체력과 높은 면역력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아픔은 낮은 면역력에서 기인한다고 바라볼 수 있어도, 보다 깊이 파고들어보면 낮은 면역력의 원천은 인간 된 삶의 기본적인 가치인 ‘흙’을 덮어버린 산업 문명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생태계가 건강하지 못하면, 인간도 건강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의료 시스템의 폐해
산업 문명의 발전은 의료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아니, 산업화의 목적이 인간의 영생이라는 기만하고 탐욕스러운 지향은 이미 드러났다. 흙으로 돌아가기를 포기하고 영원히 아스팔트 위에 발붙여 살려는 일부 인간들의 거만한 정복욕은 사회를 병들게 했고, 인간을 병들게 했다. 만약 인간이 죽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면 영생의 가치는 오로지 자본으로 매겨질 것이다. 기술이 지향하는 바는 영생이라고 말한 바 있지만, 조금 더 살을 붙여본다면 영생을 위한 기술을 돈으로 사고 파는, 다시 말해 자본이 산업 문명의 탐욕을 제대로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자본논리에 입각한 우리들의 사회는 인간이 삶을 살기 위해 누려야 할 보편적인 가치 역시 돈으로 치부하기 시작했다. 의사라는, 사람을 살리는 귀중하고, 그 자체로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을 언제부턴가 돈을 잘 버는 직업으로 인식하기 시작했고, 자라나는 아이들의 일부(어쩌면 전부일지도 모른다.)는 의사라는 직업을 강요받기 시작했다. 의사가 되어 돈을 더 잘 벌기 위해, 혹은 자본논리에 찌든 현실에 빨리 적응한 사람들이 재빨리 자신의 아이가 의대로 진학할 수 있게끔 ‘투자’하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서 인간도 결국 돈이 되는 것 같다. 그게 열 달을 배불려 낳은 자신의 아이라도 예외는 아니다. 어려서부터 의사가 되기 위해 학업에만 매진한 아이들이 의대에 진학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우리에게 필요한 덕목은 국영수와 같은 교과목이 아닌, 인간이 서로를 위하고, 공생하기 위한 밑바탕을 다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경쟁에 익숙해진 이들은 서로를 헐뜯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바쁘다. 끊이지 않는 의사의 성폭행, 병원 내 비리가 과연 우연으로 보이는가?
요즘 병원에 가보면 의사들은 환자의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환자의 증상을 넘겨짚는 게 대부분이고, 절대 을이 된 환자는 의사가 툭툭 던지는 몇 마디를 듣기 위해 오랜 시간을 기다린다. 원하든 원치 않든 의사는 환자를 돈으로 보고, 돈을 벌기 위해 증상을 넘겨짚고 몇 마디만 건네는 게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은지 한번 물어보고 싶다.
의료기술이 아무리 발전했다고 해도 그것이 추구하는 바가 자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과거, 기술이 개발되지 않고 농사를 짓던 시절엔 이웃과의 왕래가 특별한 일이 아니었을 뿐더러 노화나 병으로 몸을 가누기 어려운 이들을 도우며 살아가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오늘날 돌봄과 보살핌은 철저히 제도, 자본화되어 서비스된다. 오래전 인간이 당연히 해왔던 것을 제도적으로 규정해 ‘서비스’라는 이름으로 다시 인간에게 선심 쓰듯 베푼다. 이전부터 인간이 당연히 해왔던 것을 철저히 자본화시킨 사회는 인간을 날 때부터 소비주체로 전락하게 만든다(하류지향. 2013. 우치다 타츠루). 이렇게 소비주체가 되어 길러진 인간들은 주고받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게 되며 모든 것을 물질적으로만 바라보게 된다. 단편적인 예시를 들었으나, 실제로 근대문명이 들어오고부터 인간은 소비주체로 길러지기 시작했으며 원초적 가치인 덕성조차도 잊은 채 살아가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영혼이 죽은 채 기술을 개발시키며 영생을 위해 달려가기 시작한 것이다(인간 된 삶에 대하여. 2024. 박민찬). 인간을 자본화해 바라보는 시대, 지금의 의료는 죽었다.
서로를 넘나드는 살아 있는 의료
의료를 살려야 한다. 인간과 인간이 서로 넘나드는, 인간다움이 살아 있는 의료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여기서 나는 쿠바의 사례를 들어보고자 한다. 쿠바의 의사들은 왕진, 즉 환자의 집을 방문하여 환자를 ‘만난’다. 이들은 환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슴으로 공감하고, 그에게 맞는 치료법으로 환자를 치료해 준다. 우리나라의 의료시스템과 다른 건 방문을 통한 만남이다. 나는 앞에서 인간의 면역력이 떨어진 데에는 정신적인 요인을 부정할 수 없다고 말했고, 그 정신적인 요인의 대부분은 산업화로 인한 경쟁과 고립에서 온다. 이쯤에서 경쟁사회에서 살아가며 고립된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서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뜬구름 잡는 이야기인지 묻고 싶다. 우리가 진정으로 살아 있음을 느낀다는 것은 타인과 내가 서로 연결되어 나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선물이 되는 걸 경험할 때다. 의료와 관계가 없어보일지 몰라도 우리에게 필요한 건 공생윤리의 삶이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렇게 서로의 삶을 넘나드는 의료는 환자에게 심적으로 안정감을 주기도 하지만, 자신을 자본으로 보지 않고 오로지 인간으로 바라보고, 또 돌봐주는 살아 있는 실체를 느낄 수 있다. 이처럼 인간성이 살아 있는 의료를 통해 몸이 좋아질 때는 온 세계가 살아 있다는 생각과 함께 자신은 고립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살아 있는 의료는 ‘대화’ 속에서 발생한다. 의료라는 권리를 우리들이 마땅히 누리기 위해서는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가는, 그리고 흙을 밟고 서 있는, 진정한 인간의 삶을 살아야 하고, 그 시작은 경쟁이 아닌 대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발전이 아닌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한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공동체 생활임은 수만 번 이야기해도 모자랄 따름이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덕목은 빈곤을 영위하고, 풍요롭지 않은 삶을 살아가려는 마음가짐일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의 이유가 되고, 함께 살아가는 가치를 추구하는 세상이 이상만으로 존재하지 않기를 바란다. 故김종철 선생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바이러스는, 공생의 윤리를 부정하는, 그리하여 우리 모두의 면역력을 끊임없이 갉아먹는 ‘탐욕’이라는 바이러스다(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 2022. 김종철).”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듯,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건 질병과 바이러스가 아니다. 언제부턴가 우리의 삶에 스며든 자본에 대한 욕망과, 발전이라는 은유에 깃든 탐욕이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들이다.
살아 있는 의료체제가 확립되려면, 우리는 대화를 통해, 그리고 빈곤한 삶을 영위하는 정신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찾으며 흙을 밟고 서 있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 모두가 서로의 삶에 스며들어 관계 맺고, 흙에 단단히 뿌리내린 나무가 되어 숲을 이루길 바란다.
참고문헌
김종철. 2022. 『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 녹색평론사
우치다 타츠루. 2013. 『하류지향』. 민들레
박민찬. 2024. 『인간 된 삶에 대하여』. 브런치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