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헷갈리는 사회문제 깊이 들여다보기> 수업 쪽글
우리 삶에 스며든 기후위기
4월에 눈이 오고, 개나리와 벚꽃이 같은 시기에 핀다. 이뿐이랴, 4~5월이 제철인 딸기는 겨울 과일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모기가 우리의 밤잠을 방해하는 시기는 점점 앞당겨지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환경에서 살아가기 위해 적응해야 하는가?
적응과 비적응의 문제를 떠나서, 앞에서 말한 환경 변화가 기후변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이제는 기후변화라는 말보다는 ‘기후위기’, ‘기후재난’이라는 말이 더 잘 맞을지도 모르겠다. 기후가 바뀌어감에 따라 우리의 생활 방식이 점차 달라지고 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을 텐데, 인간이 보다 편안한 생활을 누릴수록 우리가 살아가는 생태계는 죽어간다는 걸 당신은 자각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푸르른 하늘, 맑은 공기, 청량한 물을 보고 느꼈던 게 언제였는가. 이제 이 세 가지 환경적 요소들이 머지않아 우리의 삶 속에서 없어질 수 있다는 사실에 절로 몸서리 칠 수밖에 없는 지금, 수많은 생명체들이 날마다 우리 곁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것을 목도할 때면, 미래가 불확실한 이 생태계에 희망이 있는지 자문하게 된다. 원초적 본능에 기인하여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동물이 지금의 자신은 괜찮을지 모르나, 자신의 후손들이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여 출산을 꺼리는 지금의 상황은 예견된 상황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지금의 세상은 인간이 살아가기 편리할 수는 있어도, 인간답게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라고 보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간다는 건 과연 무엇인가? 나는 모두가 서로 돕고 함께 살아가며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지 않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지금의 사회는 산업혁명이 시작됨에 따라, 다시 말해 공공의 재산이 사유재산으로 바뀌어 감에 따라 근대가 도래하고부터 ‘모두’에서 ‘개인’으로 바뀌었다. 이제 사람들은 서로를 위하지 않으며,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조세희 작가는 지섭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사랑이 없는 욕망만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 한 사람도 남을 위해 눈물 흘릴 줄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만 사는 땅은 죽은 땅입니다(조세희. 1978).” 우리는 인간성이 실종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인간성의 실종은 산업문명과, 그것에서 비롯된 자본주의, 기후위기가 낳은 폐해다.
우리가 원래 밟고 살아왔던 흙은 아스팔트로 바뀌었고, 이 땅의 생명체들과 교류할 수 없어진 인간은 점차 마음의 문을 닫으며 개인화되어갔다. 우리 삶에 스며든 건 기후위기라고 제목에서 언급한 바 있으나, 인간은 기후위기가 삶에 스며듦과 동시에 보다 광적으로 기술에 의존하게 된 것 같다는 생각도 한다. 기술로 기후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거라는 거만한 착각은 인간이 더욱더 서로를 밀어내게끔 하는, 인간다운 삶에서 멀어지는 후퇴의 서막을 알릴뿐이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기후위기와 산업문명
상술하였듯, 기후위기에 잇따른 재난은 산업문명이 주원인이라는 것은 부정 못할 사실이다. 인간은 더 안락하고 편리한 삶을 위해 4번에 이른 산업혁명으로 기술을 발전해 왔고, 이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 결과 인간은 안락하고 편리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으나 기술은 그 자체로 생태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공장에서 내뿜는 연기, 인터넷의 여러 정보를 저장하는 곳의 열기, 무엇보다 생태계를 무시한 채 행해지는 무분별한 개발과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이동수단은 우리 삶을 편리하게 만들었을지 몰라도 마음은 불편한 환경을 끊임없이 조성해 왔다.
조금 더 깊이 파고들어 보면, 기후위기는 이윤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에서 만들어진 사회 구조적인 문제라고 봐도 무방하다. 산업화 이후 이루어진 폭발적인 경제성장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체제를 만들어 냈고, 그 동력으로 화석연료가 사용된 건 더 이상 놀랍지 않은 사실이다. 이윤을 모든 것의 앞에 둔 결과, 외부에 미치는 환경적 영향과 안전하지 못한 노동환경, 불평등과 빈곤 문제는 부차적으로 취급되기 일쑤였으며, 자본주의는 본질상 무한히 팽창하려고 하지만, 지구는 유한하다. 이 시스템은 끊임없이 채굴하고, 생산하고, 소비하고, 폐기하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의 의사결정은 소수의 기업과, 자본을 소유한 자들에게 있으므로 기후위기는 이러한 비민주적인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에 의해서 발생한 문제라는 주장이 낯설게 느껴지지만은 않을 것이다. 우리 삶에 스며든 기후위기 문제가 계속해서 악화되는 것은 비민주적인 정치 제도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으로 접근해 보면,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를 살아간다고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다수에 해당하는 빈곤하고 권력이 없는 존재들은 정치적인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되어 있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지금의 정치는 소수의 가진 자들만을 대변한다. 소수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서, 다수의 삶과 지구 환경을 희생시키는 사회는 지섭이 말한 것처럼 사랑이 없는 죽은 땅이다.
기후위기는 세계 부유층들의 삶을 위한 온실가스 배출, 다시 말해 인류의 편의를 자본화하는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피해는 기후위기에 책임이 없는 세계 빈곤층들의 삶부터 파괴시킨다. 고도화 기술발전시대에 이른 현재, 모두가 자신의 필요를 충족할 수 있음에도 역사상 가장 높은 생산력으로 다수의 인간들을 빈곤과, 힘겨운 삶에 시달리게 하고 있는 사회가 아직도 정의로워 보이는가? 소수에 해당하는 부유층 인간들은 자신이 평생 쓰고도 남을 부를 축적하고 있다. 자본주의에 따른 산업문명은 불평등을 끊임없이 양산해내고, 정의롭지 못한 상황을 해결하지 않으며, 기후재난을 앞당기는 부정의 그 자체다.
사상가 이반 일리치는 브라운과의 담화에서 “현대기술은 필연적으로 사회를 양극화하였습니다. 현대기술은 환경을 오염시켰습니다. 현대기술은 아주 단순한 토착적 능력들을 못 쓰게 만들었고 사람들로 하여금 물건에 의존하게 만들었습니다.”라고 이야기했다. 이반 일리치의 말에서 짐작해보건대, 현대기술은 우리 사회를 부와 빈곤으로 나누었으며, 모두를 위해야 할 기술의 보편적 가치는 자본에 의해 오염되어 인간 된 삶의 근간인 자립성을 파괴하는 원천인 것으로 보인다. 이제 우리는 산업문명에서 벗어나 어떤 삶을 영위해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영위해야 할 삶은 생태주의적 삶이다.- 영화 비평을 중심으로
마침 이와 관련해서 우리에게 묵직한 메시지를 던지는 애니메이션이 두 가지 있다. 아마 우리에게 굉장히 친숙할 것 같은데, 미야자키 하야오의 『미래소년 코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다. 이번 목차에서는 두 작품을 비평해 보며 우리가 영위해야 할 삶의 형태가 무엇인지 탐구해 보고자 한다.
우선 『미래소년 코난』은 범지구적 대전쟁으로 인해 사람이 살아갈 수 없게 된 지구에서 펼쳐지는 아포칼립스 장르이며, 같은 실수(기술 문명 발전 및 세계 정복)를 반복하려는 인더스트리아의 레프카와 기술의 영광을 뒤로 한 채 마을,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하이하버 마을의 대비가 인상적인 작품이다. 물론 주인공인 코난과 라나가 찾아간 작은 하이하버 마을에서도 오로와 같은 공동체 의식을 흐리는 이는 있었다. 이 부분은 해석에 따라 갈리겠지만, 그런 오로조차 받아들이는 하이하버 마을의 주민들은 서로 나누고 함께할 줄 아는 진정한 공동체의 모습이었다. 공동의 행복을, 빈곤된 삶을 영위하는 하이하버 마을 공동체의 모습을 보면 아름답다는 말 외에는 설명하기 어렵다.
개인적으로는 코난과 라나의 아가페적 사랑, 지무시와 코난의 우정, 인간의 원초적 이념을 추구한 채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라오 박사의 모습이 정말로 인상적이었다. 악역으로 등장했던 몬스키와 그 부하들도 빼놓을 수가 없다. 마을공동체에 녹아들어 살아가는 모습과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반성하는 모습이 눈에 밟힐 수밖에 없었는데, 다이슨 선장 역시 기회주의자의 모습이 보이지만, 적어도 어떤 것이 인류에 해가 되는지 깨닫고 코난 일행과 협력하는 모습을 보면 그는 소시민이자, 대중의 모습, 그러니까 원초적 본능에 기인한 인간을 상징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는 게 어렵지 않다.
『미래소년 코난』이 주는 핵심적인 메시지는 미래 세대 아이들이 살아갈 시대는 어떤 시대여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작품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원로 운영위원들은 인더스트리아에 남은 채 최후를 맞이한다. 그들은 대변동에 반 이상 영향을 준 인물들이었으며 과학기술의 편리와 그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코난, 라나, 지무시가 살아갈 세상에 극도로 진보한 과학은 필요 없다는 사실을 인지한 채 자신들의 존재를 지운다. 인류가 같은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말이다. 『미래소년 코난』은 작품 전체의 흐름 속에서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류의 종속에 있어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나타내며 공동체적 삶과 생태주의적인 삶을 강조한다. 농사를 짓고 각자 나누며 사는 하이하버 마을처럼 인류는 살아가야 한다고 말이다. 기술이 지향하는 바를 묻지 않으면서 무분별하게 생태를 파괴하고 남들 위에서 군림하려는 사상을 가지는 순간 편리함을 추구하던 과학기술은 살상을 위한 가장 확실한 도구로 변한다. 그러나 미래 세대의 아이들(코난, 라나, 지무시)은 인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가치인 우정, 사랑을 갖고 있었다. 『미래소년 코난』은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보나 일반 시청자의 관점에서 보나 우리에게 묵직한 메시지를 던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같은 경우 『미래소년 코난』과 마찬가지로 과도한 개발에서 비롯된 지구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그려내고 있다. 인간들은 서로의 나라를 침략 및 정복하기 위해 거신병으로 세계를 불태운다. 그러나 여기서 그려지는 거신병을 핵무기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는데, 거신병의 공격으로 버섯구름이 일어나는 건 둘째 치고 거신병, 다시 말해 핵무기를 개발했음에도 자연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는 인간을 묘사한 작품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지만, 아무도 기술이 지향하는 바를 묻지 않는다. 기술 발전의 목적을 물어도 '편리함'이라는 단어로 얼버무려 버리는데, 인간은 편리함을 추구함에 따라 인간의 본질을 잊어 가고 있다. 우정, 사랑과 같은 원초적 본능이자 감정을 포기한 채 개발되어 서로를 떨어트려 놓는 기술은 지양해야 마땅하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을 생태주의적 시선으로 보자면 자연과 소통하는 나우시카의 모습(자연과 함께 살아가는)과 거신병을 부활시켜(핵무기를 만들어) 세계를 멸망시키려는 토르메키아의 모습을 주로 다루는 것으로 보이나,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자연과 함께 살아가려 하지만, 자신의 삶이 먼저인)을 보이는 도르크 역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나는 이걸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야 할지 잘 모르겠다. 자연을 무분별하게 개발하는 모습보다는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려는 인간의 모습이 먼저 보였기 때문이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시작과 끝에는 모두 오무가 나오는데, 나우시카가 오무를 달래며 전개가 시작되며, 후반부에서 오무가 나우시카의 뜻을 이해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이와 같은 전개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인 『미키17』과도 비슷하다. 처음 등장할 땐 허물과 함께 한 마리만 등장하는 오무지만, 후에는 오무가 무리를 지어 인간에게 다가온다. 이때, 오무 떼가 몰려오는 이유는 부해를 불태우려는 순간이라고 노파가 언급한 바 있는데, 노파의 말마따나 오무가 인간의 과오로 만들어진 부해를 제거하려는 순간 몰려 드는 것으로 보아 생태계 파괴의 원인을 제공한 건 인간이며, 자연은 그것을 알고 있다는 이야기를 영화로서 전달하는 예술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돌아와 앞에서 말한 거신병이 인간의 탐욕에 의해 개발된 핵무기라면, 오무는 자연이 산업문명 사회에 외치는 절규, 즉 자연재해라고 생각되는데, 오무 떼의 등장은 인간이 자연 앞에서 무기력하다는 것을 가장 잘 나타낸다. 다만, 거신병이 오무떼를 수백 마리 녹이는 장면에서 기술을 발전시키면 이러한 자연재해도 극복할 수 있을 거라 여기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나, 오무는 끊임없이 돌진한다. 우리 인간은 아무리 발버둥 쳐 봐야 자연을 거스를 수 없다는 걸 강하게 전달하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메시지를 몸으로 느끼는 동시에 자연과 관계 맺으며 흙을 밟고 서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흙을 밟고, 서로 사랑하며 도우며 살아가야 한다. 산업혁명의 핵심은 개인화와 효용성이다. 모두가 서로 돕고 살아가지 않는 사회가 찾아오자 기술은 자본을 위한 거만한 목표가 되었다. 나만 잘나서 돈을 벌고 떵떵거리며, 아랫사람을 밟고 살아가는 게 인간 된 삶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곁에 있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배움의 공동체를 만들어 ‘내’가 아닌 ‘우리’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인간 된 삶이라고 생각하는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또 다른 작품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 시타는 이렇게 말했다. “대지에 뿌리내려 바람과 함께 살아가자. 씨앗과 함께 겨울을 넘고 새들과 함께 봄을 노래하자. 아무리 강력한 무기를 갖고 있다 해도, 가여운 로봇을 수없이 많이 조종한다고 해도, 결국 인간은 대지를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어요.”
참고문헌
미야자키 하야오. 1978. 『미래소년코난』.
미야자키 하야오. 1984.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미야자키 하야오 1986. 『천공의 성 라퓨타』.
봉준호. 2025. 『미키 17』.
이반 일리치. 1996. 『우정에 대하여』.
조세희. 1978.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이성과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