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헷갈리는 사회문제 깊이 들여다보기> 수업 쪽글
산란한 무감각의 세계
오늘날의 아이들이 어떤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이때 바로 떠오른 건 친구들을 만나며 다시 오지 않을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아닌, 입시체제에 발이 묶여 책상 앞에만 앉아 있는, 타인과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고 경쟁의 두려움으로 인해 극도로 긴장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의 구조를 자각하지 못한다. 자신들이 받는 교육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할 겨를도 없이 이 체제 안에 던져졌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꾸리지 않고, 사회가 정한 규격에 맞춰 스스로를 상품화하는 모습을 바라볼 때면 괜히 서글퍼진다. 이 체제 안에 던져진 아이들은 산란한 무감각의 세계에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꾸려나가지 못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주어진 길을 따라 질주하는 데 있어 방해되거나 경쟁하는 이를 제치고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아간다는 걸 뜻하는 게 아닐까? 조금 더 살을 붙이면 인간의 원초적 덕성인 우애, 의협심, 사람과 사물 간의 상호성 등을(후지타 소죠. 1998)을 유린하는 것이 당연한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들이 이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굉장히 끔찍하게 다가온다. 인간은 항상 무리 지어 관계 맺으며 자신의 세계를 넓히는 데에서 기쁨을 누리며 살아왔음에도 이러한 가치들을 철저히 배제당한 채 수동적인 생활양식을 고집하게 되는 삶의 모습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그리고 이러한 가치들을 배제당하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을 넘어 인간의 원초적 덕성을 유린하는 것에 열심인 이들을 후지타 소죠의 표현을 빌려 ‘우등생’이라고 부르고 싶다. 자신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고민하지 않고 그저 체제에 발맞춰 순응하고자 하는 우등생들의 밀고자 정신은 자신을 상품화하는 걸 증명하는 동시에 자신이 수동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무의지적 존재라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는 것이다.
그러나 우등생들을 마냥 탓할 수는 없다. 그들 역시 원초적 본능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이었으니 말이다. 이들이 이렇게 바뀐 데에는 현대의 권력•감시체제와 깊은 연관이 있는데, 현대의 권력이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미세하게 각자의 행동을 통제하고 규제하고 있다는 것을 조금만 신경 쓰면 발견할 수 있다. 그 방법은 바로 ‘규율과 지도’이며, 그 사례로 우리는 학교의 암묵적 규율에 따라 수업 시간의 예절, 복장, 태도 등을 지적받는다. 그리고 이 내용들이 기록되고, 교사들 사이에서 공유된다. 정보사회의 폐해인 감시권력은 모든 행동을 세밀하게 규정된 규칙에 따라 나누기 때문에 우리는 어느새 권력에 복종하도록 길들여진다. 즉, 권력은 저항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정도의 강도로 개인을 서서히 통제해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섬뜩한 감시사회에서 살고 있다. 여기서 ‘우등생’이라 칭하는 이들은 결국 사회구조를 빨리 인식하고, 자신 외에 다른 이를 도태해야 살아남을 거라는 본능 하에 인간의 덕성을 저버린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전태일 평전』에서 조영래 변호사는 “우리 사회는 ‘똑똑한 사람’을 바란다. 똑똑한 사람이란 남의 등을 밟고 올라가는 사람, 남의 피땀의 성과를 가로채는 사람, 남을 속이지만 남에게 속지 않으며 돈을 벌든지, 권력을 잡아서 세상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아 명예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잘나고 똑똑한 사람이다. 그게 아니라면 ‘현명한 사람’을 원한다. ‘약은 사람’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현실과 타협할 줄 알고, 현실에 적응할 줄 아는 사람. 강자에게 저항하지 않고, 약자에게는 강한 전형적인 강약약강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다(조영래. 2009).”라고 말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남을 밟고 올라서며, 남의 약점을 파헤치려 하는, 인간의 덕성을 철저히 배제한 사회라고 이야기하는 게 무리는 아닐 듯하다.
인간을 기계로 여기는 시대, 인간다운 삶을 묻는다.
산란한 무감각의 세계에서 우리는 내면에 살아 있는 감각을 깨워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바로 위에서 이야기 한 인간의 기본적인 덕성이다. 우정, 공동체 정신, 서로의 관계 속에서 넘나들고자 하는 시적인 마음가짐은 얼핏 보면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보일 수 있으면서도, 우리가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전태일 열사는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쳤다. 하루 16시간 노동, 이틀 휴식, 낙후된 작업환경과 같은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일하는 평화시장의 여공들을 위해 외친 그의 목소리는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닿았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왜 인간이 사회의 틀에 욱여넣어져 획일화되어야 하는지, 도대체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싶다.
인간이 흙에 발붙인 이래, 공동체를 이루어 상부상조해 왔음은 몇 번을 강조해도 모자라며, 이는 곧 인간다운 삶이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정신에 있다는 걸 나타낸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폭넓게 이해해야 하고, 자신이 배운 것의 의미와 가치를 구축하는 주체를 만들어 가야 할 필요가 있다(우치다 타츠루. 2013). 이 과정을 나는 ‘배움’이라고 이야기하려 하는데, 사상가 이반 일리치는 브라운과의 담화에서 “우리 사회는 인공적인 물건들만 생산해 내는 것이 아니라 인공적인 사람들도 생산해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커리큘럼의 내용에 의해서가 아니라 학교교육이라는 과정 자체의 의식(儀式)을 통과함으로써 배움이라는 것은 학교교육의 결과로써 일어난다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배움은 여러 가지의 분리된 일로 나뉘고, 측량 가능한 것이 되고, 시장에서 팔 수 있는 물건 가치를 제공해 주는 것으로 여겨지게 된 것입니다(이반 일리치. 1996).”라고 말했다. 즉, 오늘날 학교의 교육과정은 앞에서 이야기한 바 있는, 인간을 획일화되게 길러내며, 사회의 규격에 맞게끔 재단함으로써 스스로를 ‘제품화’하게끔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를 제품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사회가 정해 놓은 틀에서 벗어나게 되면 스스로를 ‘불량’이라고 낙인찍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 ‘불량’이라는 단어를 통해 인간다운 삶을 바라볼 수 있을 듯하다.
인간다운 삶은 다시 말해 기계 같지 않은 삶이다. 쳇바퀴 구르듯 살아가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폭넓게 관계 맺고 연대하며, 희로애락을 느끼는 삶. 이때 우리는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인식하기 시작한다. 기계는 의지가 없으므로 기계적인 삶을 사는 인간도 기계와 다를 바 없다. 자신의 삶이 온전히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온전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기계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제시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여기서 불량정신을 떠올릴 수 있겠다. 즉 불량정신은 사회의 규범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모색하는 과정이며 이것은 곧 인간적인 삶의 양식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샅샅이 파헤쳐 보았을 때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반인간적 사회다. 인간을 도구로 취급하고, 사회의 입맛에 맞는 인간을 생산하는, 인간을 물질화하는 시대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전태일 열사가 이야기한 ‘인간을 물질화하는 시대’는 세월이 흘러 겉모습이 바뀌었을지언정, 그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다운 삶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틀에서 벗어나려는 불량정신이 필요하며, 불량정신을 함양하고, 일탈을 경험해 본 이들은 새로운 세계와 만나 시선을 넓힐 수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인간다운 삶, 그것은 다른 이와 함께 살아가기 위한 덕목을 함양하여 살아가는 삶이다. 거듭해서 이야기한 우애, 의협심 등의 덕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회는 산업문명이 가져다준 기계화의 부산물이 아니라, 사람냄새가 스며들어 있는 공동체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사회다. 그리고 이곳은 인간을 기계로 바라보지 않고, 인간의 존재 자체를 인정해 주는, 다시 말해 자본이 사람을 재단하는 곳이 아닐 것이다.
인간의 삶에는 불량정신이 깃들어 있다.
후지타 소죠는 『전체주의의 시대경험』 안에 실린 에세이 <불량정신의 찬란함>에서 “먼저 청소년 여러분에게는 불량정신을 잊지 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불량정신이란 단순히 불향의 미학일 뿐만 아니라 불량의 윤리학을 그 핵심에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최고의 윤리학이란 항상 불량의 윤리학을 그 근저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있을 때 비로소 권력 및 그 밖의 것에 대한 비판과, 비판의 자유를 어느 때에나 허용하는 자유로운 관용과 타인에 대한 공감을 감수성의 밑바탕에 기초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후지타 소죠. 1998).”라고 말했다.
이 글에서 후지타 소죠는 스스로를 상품화하여 가치를 증명하고자 하는 경쟁 사회를 꼬집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불량정신의 본질이 의지를 가지고 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아채기 어렵지 않을 텐데, 다시 한번 정리하면 주체적인 삶을 살려는 의지를 가져야만 나오는 게 바로 불량정신이다. 의지를 가진다 함은, 스스로가 사유하고 능동적으로 움직이며 삶을 살아가는 것을 뜻하며,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까지 가져와 보면 인간은 의식을 통해 존재한다는 말이 된다. 즉 인간은 의지 안에서 존재한다. 이 이론을 후지타 소죠가 말하는 불량정신과 연결하면, 사유할 수 있는 의지를 가진 존재자(인간)가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한 방법 중 하나가 바로 불량정신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불량정신을 어감에 따라 해석하지 말고 본질에 따라 해석해야 마땅하다. 불량정신은 틀에서 벗어나 살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담긴 순결한 정신이라고 보는 게 맞겠다. 더 이상 무감각해져서는 안 된다. 산란한 무감각의 세계에서 벗어나 통증을 느낄 때 비로소 우리는 불량정신이 깃든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기계적인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무감각하고, 무감각한 사회의 경쟁체제서 살아남으려면 인간의 원초적 덕성을 유린하는 ‘우등생’이 되어야 하는 세상에서 자라날 아이들은 불량한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정해진 체계에 따르지 않고,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인간의 덕성을 다른 이와 관계 맺으며 깨닫기 바란다. 그리고 자신의 배움을 온전한 언어로 나타내는 순간을 희망해 본다.
스스로 생각하며 존재하기, 그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불량하게, 적어도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경험이 필요해진 세계에서 배움의 공동체를 만들어 연대하며 작은 균열을 내었으면 좋겠다. 인간의 삶은 누군가에 의해 따르는 게 아닌, 오로지 본인이 결정해야 하므로, 스스로 자립하여 타인과 연대하고자 하는 불량정신이 우리 사회에 꼭 들어왔으면 한다. 인간다운 삶에는 자기주도적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불량정신이 깃들어 있으니 말이다. 불량정신을 가슴에 품고 정의를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의 정착지가 정의(正義)의 길이길 기대해 본다.
참고문헌
우치다 타츠루. 2013. 『하류지향』. 민들레
이반 일리치. 1996. 『우정에 대하여』
조영래. 2009. 『전태일 평전』. 아름다운 전태일
후지타 소죠. 1998. 『전체주의의 시대경험』. 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