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젠더를 두려워하랴>- 주디스 버틀러
상상적 공포를 만들어낸 권력
『누가 젠더를 두려워하랴』를 펼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나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권력이 대중을 농락하며 얼마나 혼란스럽게 만드는지, 그로 말미암아 제도에 굴종하여 사유할 수 없게 인간을 ‘인적자원’이라는 명칭 하에 산업사회의 예비군으로 만드는 것에 대한 우려를 갖고 있었다. 이는 지금도 다르지 않다. 그중에서도 ‘젠더’는 우리에게 있어 굉장히 첨예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젠더를 공포의 대상으로 낙인찍은 권력은 그것을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는 주범으로 여긴 채 대중을 공포와 혼란으로 밀어 넣고 있었으니 말이다. 버틀러에 따르면 젠더라는 개념은 충분히 사유하고, 계속해서 고민해 나가며 사회적•문화적 맥락으로 바라봐야 하지만, 대중을 혼란의 도가니로 밀어 넣은 권력은 그것조차 하지 않은 채 젠더라는 개념을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조장하고 있었다. 문명의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우려가 그리 멀게 느껴지지만은 않는다.
그래서일까. 버틀러는 책에서 그것을 판타즘, 즉 상상적 공포라고 칭하며 젠더에 대한 반대와 혐오를 내뱉는 목소리들이 과연 어디서 나왔는지를 샅샅이 들여다본다. 흔히 정상이라고 칭해지는 가족, 이성애, 국가와 같은 ‘안락한’ 규범들에 있어서 젠더라는 논의는 하나의 불편함, 혹은 마주하고 싶지 않은 빨간약일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있어 젠더는 삶의 토대를 망가트리는 주범이며, 젠더로 인해 자신의 특별함이라고 여겨졌던 정상성이 망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젠더를 판타즘화하여 오직 정상만이 사회의 핵심이라고 하는 권력의 구조를 알아보지 않으면 안 된다. 버틀러에 따르면 그것은 모두를 동일시하는 현대의 파시즘인데, 우리가 역사적 맥락을 통해 바라본 파시즘은 다른 삶을 상상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한 채 생각의 틀을 점점 앗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견지해야 할 필요가 있겠다.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버틀러는 판타즘의 조장이야말로 권력이 대중을 선동하는 방식이라고 역설한다. 젠더가 인류의 삶을 위협하는 요소라 보고, 그것에 대한 두려움을 조장하며 사람들의 시선을 환경위기, 산업화로 인한 빈곤, 인간소외가 아닌 젠더에 가져다 놓으며 불안을 부추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있어 젠더란 모호함에서 오는 상상된 공포로서 기인하며 정상성을 어질러 놓는 해악이 되어버린다. 이러한 판타즘은 결국 인간다운 삶의 생태계를 파괴해 버렸고, 지금의 사람들은 현대의 파시즘에 사로잡힌 채 자율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잃어버렸다. 이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권력과 제도에 굴종하게 됨에 따라 권력과 제도가 해주지 않는 것은 떠올리지 못하는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뿐만이 아니다. 젠더라는 판타즘으로 대중을 정상이데올로기 안에 사로잡은 권력은 ‘정상’이 아닌 몸들과 관계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고 있었다. 대중뿐만이 아니다. 함께 연대하는 것 같았던 페미니즘의 일부도 여성우월주의라는 명목 하에 ‘젠더’라는 담론을 배제하였고, 남성도 여성도 아닌 오로지 자신만의 성을 찾아 분투하는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들은 자신도 모르는 채 – 혹은 의도적으로- 권력의 구조에 포섭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간성, 트랜스젠더는 사회적 위험을 조장하는 경계대상이 되었고, 자신으로 살 수 없어지게 되었다. 트랜스젠더의 사례가 시사하는 바는 권력이 젠더라는 틀을 정상사회 이데올로기에 편입시켰고, 이것에 잠식된 이들은 자신과 다른 삶의 형태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삶의 형태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든 권력구조와 포섭된 대중들, 그들이 ‘젠더’를 두려워하고 피하려 한다. 상상적 공포는 말 그대로 상상만 해온 것이기에 얼마든지 그 갈래가 뻗어나갈 수 있다는 점을 무시해선 안 된다. 심지어 국가와 같은 거대한 구조가 그러한 상상과 혼란을 마치 있는 것처럼 부추긴다면 이것은 파시즘의 전조증상이라 칭해야 마땅할 것이다.
안락을 향한 전체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후지타 소죠는 그의 저서 『전체주의의 시대경험』에서 ‘안락을 향한 전체주의’라는 개념을 말한다. 그가 말하는 ‘안락’이란 고통과 고민, 취약성, 즉 인간의 원초적 덕성들을 악으로 간주해 그것을 없애버리겠다는 맥락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기술발전, 혹은 정상적이라 칭해져 더 고민할 필요가 없데 만드는 사회의 흐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역설한다. 후지타 소죠의 저서 『전체주의의 시대경험』 안에 실린 <불량정신의 찬란함>이라는 에세이에서 그는 “안락에 맞서는 불량정신이야말로 우리가 잊어선 안 되는 가치”라고 말하는데, 그의 말을 버틀러와 엮어보면 젠더라는 공포의 대상을 오히려 깊게 들여다보고 사유함으로써 판타즘에 맞설 수 있는 것이다. 후지타 소죠, 주디스 버틀러 두 지식인은 정상(안락)에 맞서는 젠더(불량정신)라는 틀을 제시했다는 생각을 넓혀보면 좋을 듯하다.
이 와중에도 버틀러는 책 속에서 젠더를 판타즘화하는 가부장제와 극우의 보호담론을 언급하는 걸 잊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보호담론’이야말로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사회에 대중을 귀속시킴으로써 그들을 지켜주겠다고 말하겠다는 규범적 언어로 사회를 제도화하는 걸 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 헤게모닉한 남성성, 그리고 강제적 이성애와도 연결될 수밖에 없는데,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안에서 돈을 벌어 결혼을 하고 여성을 보호해 주며 정상적인 삶을 이루어야 하는 그들의 바람과 다르게 권력을 위시한 남성성으로 점철된 사회는 점차 개인의 불안을 가속화하여 정상이라 하는 삶을 어렵게 만든다. 이런 측면에서 폭주하는 남성성은 정상사회 이데올로기에 들어가겠다는 욕망에 귀속되어 약자를 배제하고 신자유주의의 좁은 구멍으로 들어가려 하는 것이다. 그들은 남성이 여성과 약자를 보호한다는 핑계로 규범적으로 제도화된 사회를 만드는 걸 빼먹지 않고 강조하기 때문에, 반대로 우리는 지금의 사회가 더 낫고 안락하다는 걸 이유랍시고 내세우는 ‘안락을 향한 전체주의’에 잠식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에서 불안이 커져갈 때 사람들은 단단하고 안전한 걸 추구하는 경향이 있는데, 여기서 젠더를 부정하는 판타즘이 작용하여 그 안에 있는 공동체, 연대와 같은 가치들을 철저히 무시한 채 판타즘이 만들어낸 거대한 체제에 귀속되어 가는 대중의 삶에 대해 버틀러는 우려의 목소리를 표한다.
이뿐이랴, 판타즘이 만들어낸 거대한 체제에 힘없이 순응하는 대중들을 볼 때마다 나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멋진 신세계’야말로 안락을 향한 전체주의가 극한으로 치달은 인간들의 모습이며 그 안에서 안락(쾌락)만을 추구하는 ‘멋진 신세계’의 대중은 반지성주의에 길들여진 이들의 모습과 굉장히 흡사하다. 그들에게 있어 한 사람과의 사랑은 흉물스러운 것이고, 힘든 일이 있을 땐 소마를 즐기면 된다. 이 말은 결국 『멋진 신세계』의 사회를 우리에게 끌고 왔을 때 젠더를 흉물화시키고, 젠더에 관한 담론과 자신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을 안락한 소마 속으로 도피시키는 것이라 볼 수 있겠다. 버틀러가 헉슬리의 소설을 바탕으로 글을 쓴 것이 아님에도, 연결되는 까닭은 우리가 사는 세계가 점차 ‘안락을 향한 전체주의’를 ‘멋진 신세계’로 표방하여 그것에 방해되므로 필히 두려워해야 할 ‘젠더’ 담론을 배제하는 형국으로 치닫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민중의 상상력과 용기
나는 『누가 젠더를 두려워하랴』를 통해 버틀러가 우려를 표한 권력, 판타즘, 젠더 담론을 꺼려하는 일부 페미니즘 – 버틀러는 ‘젠더’ 담론을 이야기하지 않는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이 아니라 한 바 있다.- 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것이 어떻게 대중을 제도와 상투성에 몰아넣는지 이야기했다. 그러니 나에게는 또 다른 세계를 만나기 위해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을 먼저 들여다봐야 할 책무가 있는 듯하다.
버틀러를 비롯한 페미니즘 담론은 우리가 취약하다는 존재라는 걸 인지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상호 간의 연대와 돌봄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역시 우리가 또 다른 세계를 상상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 중 하나다. 그러나 이 담론을 조금 더 구체화시키는 과정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어떠한 인정투쟁이든 그것은 존중받아야 마땅하지만, 우리가 인정투쟁을 하려는 목적이 근원적으로 어디서 왔는지 인지하고 체제를 바꾸려는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는 뜻이다. 즉 우리에게 현대화된 빈곤을 안겨준 산업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기술전체주의 사회로 치달은 『멋진 신세계』의 야만인 ‘존’이 시(詩), 신, 자유, 진정한 위험,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했다는 것에서 희망을 품으면서도 이것은 개인의 실천으로는 힘들다는 사실을 마주하곤 한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페미니즘 담론은 연대를 소중한 가치로 내세우는데, 나는 조금 더 근본적으로 우리가 산업사회, 그러니까 근대문명을 생태문명으로 바꾸고자 하는 상상력과 용기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내세우려 한다. 이상으로 치부받기 쉽지만 이 길밖에는 없다. 슈마허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말했는데,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권력이 볼 때 한없이 작은 우리가 하나로 중앙집권화되어 있지 않고 곳곳에 풀뿌리 마을로 존재한다면 젠더를 판타즘화하여 우리를 전복시키려는 거대한 폭력의 구조는 우리를 일일이 상대할 수 없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라 봐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산업문명을 뒤집어엎으려는 급진적 전환을 상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때 필요한 것은 멀리 있지 않다. 『멋진 신세계』의 야만인 ‘존’은 안락에 맞서는 과정에 혼자였기 때문에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젠더를 두려워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산업사회 구조를 전복시키려는 상상력과 함께 손잡고 나아가고자 하는 용기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연대에서 더욱 확장된 개념인 풀뿌리 민중에게서 나오는 힘, 즉 급진적 민주주의로서의 전환이다. 젠더를 판타즘화하여 파시즘 체제를 이루려는 권력구조에 맞서는 ‘너무나 희미한 존재들’이 그 어느 순간보다도 소중하다. ‘너무나 희미한 존재들’을 줄이면 ‘너희들’이 아니던가. 문명의 소용돌이 바깥에서 ‘너희들’이라 불리며 소외되었던 이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세상, 우리는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