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제자가 말했다. 자신은 2년을 만났던 연인과 헤어질 때도 마음이 복잡했는데 20년을 학교에 있다 떠나는 선생님의 마음은 어떨지 가늠이 안된다고. 나는 이별한 날보다 이별한 다음의 나날들이 더 중요하다고 말해주었다. "우리의 만남은 우리 각자에게 무엇을 남길 것인가?", "그리고 그것들은 어떤 모습으로 앞으로 내 삶과 함께 갈 것인가?" 학교가 나에게 남긴 것과 내가 앞으로 가지고 가게 될 것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보기로 한다.
2.
할머니는 오래전에 돌아가셨다. 지금은 서해의 바람이 불어오는 꽝꽝나무 언덕에 잠들어 계신다. 할머니는 치매로 고생하셨다. 하지만 손에서 일을 놓지 않으셨다. 설거지와 청소, 베란다의 화분을 옮기거나 분리수거도 하셨다. 위험한 순간도 많아서 가족들을 힘들게 하기도 했지만 할머니는 계속 무언가를 열심히 하셨다. 내가 할머니에 대해 기억하는 거의 모든 순간 할머니는 언제나 일을 하고 계셨다.
할머니를 그 작은 언덕에 묻고 영정을 안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나는 생각했다. 왜 그렇게 쉬지 않고 평생 일만 하시다 가셨을까? 할머니는 너무 어이없고 슬프고 서러운 자신의 삶을 몸을 혹사시키는 방식으로 견디려고 하셨던 것 같다. 잠시라도 쉬면 슬픈 마음이 들까 봐 할머니는 허리가 휘고 손과 발이 닳도록 일만 하셨다. 할머니의 노동은 할머니의 슬픔을 잊기 위한 것이었다.
할머니는 내게 수수께끼 같은 인간의 삶을 마음대로 판단하지 말고 더 깊이 이해하고 탐구하기 위해 노력하라고 가르쳐 주신 셈이다. 삶의 이면과 모순, 불가해하고 미묘하며 애틋하기까지 한 우리의 삶에 대해 더 오래 생각하고 느껴보라고 이야기해 주신 셈이다. 할머니는 이제 이 세상에 없지만 나에게 그것을 남겼고 나는 지금도 그것과 함께 가고 있다.
모든 이별 뒤에도 우리는 각자의 삶을 아름답게 살아내야 한다. 그것이 삶에 대한 우리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3.
지난주에는 고등학교 총학생회 아이들과 만났다. 왜 학교를 그만두는지 이야기 나누는 자리였다. 이야기를 마치고 한 아이가 내게 질문했다. "선생님이 떠나고 나면 우리는 선생님이 많이 그리울 것 같은데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는 떠나고 없는데 내가 떠나고 나서 자신이 겪을 그리움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이는 묻고 있었다. 누군가, 무엇인가가 그리워질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나는 교사나 어른으로 답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나도 너희들이 무척 그리울 거고 그럴 땐 그것을 잊기 위해 애쓰기보다 그냥 온전히 그리워하고만 싶다."라고 답했다.
이 아이들과 헤어지고 나면 오랫동안 어떤 그리움이 남을 것만 같다. 나는 그 그리움이 찾아오는순간을 잘 기억하고 싶고 기록해두고 싶다.
4.
고등학교 총학생회 아이들은 내게 전체 아이들과도 이런 이야기를 나누어 주길 부탁했다. 아이들이 전해준 글을 나는 가끔 꺼내어 읽곤 한다.
'선생님께 이 자리를 무리하게 부탁하고 싶지는 않아요. 하지만 선생님의 아주 많은 부분이 학교와 학생들에게 기울어져 있음을 느껴서 이렇게 요청합니다. 선생님을 항상 존중하고 존경해요.', '선생님께 받은 다정함을 이렇게 끝낼 수 없어요. 선생님과의 시간을 회상하고, 함께 울고, 다시 선생님께 저희의 다정함을 전하고 싶습니다.', '선생님께서 저희의 곁을 지켜주셨듯이 우리가 함께 얼굴 보고 작별한다면 이 헤어짐이 더 건강하고 따뜻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선생님 수업도 못 듣고 따로 찾아뵌 적이 없었는데도 가신다는 말씀 듣고 저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나네요. 선생님의 마지막 인사겸 학생 모두가 선생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들은 나와 정말 잘 헤어지고 싶어 했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만남의 조심스러움과 설렘보다 이별의 예의와 따뜻함이 더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또 나에게 그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5.
일요일 아침, 나는 시창작 수업 때 아이들이 쓴 글과 시를 꺼내어 읽다가 갑자기 헤어질 때 아이들에게 해줄 이야기를 종이 위에 적고 있다. 가장 아름다운 말을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