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남자의 오늘날-1]모든 것을 내려놓을 자유
지금 여기서 돌아보니 나는 없구나
퇴근시간이다. 이미 오늘 일과는 마쳤는데, 나는 원장실 자리에서 일어날 힘조차 없다. 수많은 기억들이, 사건들이, 오늘의 감정 소모로 나는 지칠 만큼 지친 상태이다. 그냥 멍하니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바라보는 것도 아닌데, 구석에 시선을 두고 있다. 물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멍 때린다'라고 표현하는 그것인가?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숨만 쉬고 있다. 매일 일을 마치고 나면, 의자에 앉아 이런 시간을 가진 뒤에야 일어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행동들이 얼마나 되었는지 본인은 알지도 못할 만큼 습관처럼 몸에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바쁘게 살아온 나의 일상에 쉼일까? 아니면 이것조차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일까? 나조차도 알지 못하지만, 이 시간이 없이는 퇴근을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문득 정신을 차리면 30분 이상이 흘러버린다.
'내가 뭘 한 거지?'
시계를 보려고 폰화면을 열었는데, 미래은행으로 돈을 4시까지 보내줘야 한다는 아버지의 메시지가 먼저 눈에 들어와 얼른 폰을 덮었다.
주섬 주섬 챙겨 넣은 가방엔, 오늘 하지도 못할 만큼의 양의 일거리와, 읽을 전공서적, 그리고 노트북과 태블릿이 들어 있다.
'끄응'
한번 신음 소리를 내면서 들어 올려야 짊어질 수 있는데, 이것을 한 번 짊어지면, 어쩔 수 없이 척추가 받쳐 들게 되니, 내가 쉽게 들 수 있는 무게인 양 착각하고 매일 들고 다니고 있다. 불이 꺼진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탄다. 한동안 아무도 타지 않아서 그런지, 엘리베이터의 불이 나를 반기며, 켜진다. 1층으로 내려온 뒤 한발 내디딘 바깥세상은 너무나 태연하게 나를 맞이한다. 시끌벅적한 시내 한복판에 자리 잡은 치과의원이 내가 일궈놓은 삶의 터전이다. 퇴근할 때 만나는 세상은 시끌벅적한 번화가 거리에, 술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들과 한 껏 멋을 부린 남녀들로 가라앉은 내 마음을 휘저어 버린다.
시청의 옆길을 따라 쭈욱 늘어선 포장마차 거리에 번쩍이는 불빛들 속에, 한 무리가 시끄럽게 모여 있었다. 옷차림으로 보나, 큰언니, 동생, 막내등의 호칭으로 미뤄 짐작 건데, 시청의 한부서에서 같이 일하는 직장동료라 생각되어진다. 막내가 큰언니에게 혼나는 장면에서 내가 퇴근한 것인데,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막내가 큰언니에게 뺨을 맞게 되었고, 그 뒤엔 막내가 달려가 포장마차 이모님이 쓰시는 식칼을 빼들었다. 칼부림이 몰아치며, 수많은 사상자를 내는 일련의 사건들이 여러 번 연이어 터지는 걸 미디어를 통해 접한 사람들이 저마다 긴장을 하며,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물러섰다. 큰언니도, 다른 두 명의 언니들도 얼어붙은 상황에 포장마차 이모님이 긴장한 채 천천히 다가가서, 칼 든 손님의 눈을 보며, 타일렀다. 칼로 사람 찔러본 사람이야 찌를 수 있겠지만, 순간적으로 집어든 호기에는 살기조차 서리지 않는 법인지, 자기가 잡은 칼을 본인이 더 무서워했다. 칼이 빼앗기자마자, 순간적인 두려움에 얼어붙은 큰언니를 제외한 두 명의 언니들이 선 넘은 막내에게 욕을 퍼부으며, 머리채를 잡고 흔들었다. 치마 입은 막내가 이리 넘어지고 저리 넘어지는 통에, 술기운 잔뜩 오른 구경꾼 들은 속옷을 보는 재미로 더욱 모여들었다.
나는 그 순간 싸움구경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떠올린 생각이 무서워 쉽게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내가 왜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되었을까? '저 여자가 나를 찔러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낯선 여자의 손에 길거리에서 칼에 찔려 죽는 것은 얼마나 비참하겠냐만, 내가 스스로 죽을 려고 시도를 하지도 않은 것이고, 나를 둘러싼 수많은 책임감을 회피한 겁쟁이도 아닌 채로 생을 마감하게 되겠지. 얼마나 한심한 생각인지 알기에 스스로 헛웃음이 나왔다. 나락 속에 허우적거리는 나를 나는 조소하며 집으로 간다는 전화를 아내에게 하며 지하철을 타기 위해 힘없이 걸음을 옮겼다.
집에 가면 나를 반겨주는 포근함이 있을까? 쉼이 존재하는 곳이 어딘가에 있으면 좋겠다. 학원가 있는 딸아이를 데리러 가야 하고, 한참 사춘기인지 반항하는 아들내미를 달래 가며, 혹은 윽박질러가며 공부시켜야 하는 것이 자기 전까지 내가 해야 하는 또 하나의 삶의 단편이다. 하루종일 받은 스트레스를 조금을 풀고 싶지만, 나에겐 그마저도 허락되지 않는다. 땀을 흘리며, 소리치듯 내뱉는 숨소리를 들으며, 달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