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어른

by 민제

작년엔 배추모종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였다. 늦은 더위로 배추 모종들이 무르고 녹아 몇십 년 농사짓는 동네 어르신들도 두세 번씩 다시 심어야 했기 때문이다. 올해는 남편이 있는 안동에서 겨울을 나기로 맘먹어서 가을농사는 마음을 접었는데 나눔 받은 배추모종을 말 그대로 심고는 던져놓았다.

일주 일이나 이주 일에 한번 들려서 벌레 잡고 물만 주었는데 아주 대풍인 셈이다.

2007년 서해안 기름유출 사고가 있었다. 온 국민이 기름 제거 작업에 참여했을 만큼 다시는 소금을 먹을 수 없을 줄 알았다. 그때 나는 살림에 진심인 편은 아니었지만 소금 스무 포대를 사두고 지금까지 쓰고 있다. 마지막 두 포 중에 한 포를 김장에 쓰면서 그 시절의 나를 칭찬한다. 18년 된 소금이라니.

소금을 좀 아껴볼 심산에 배추를 씻어서 소금에 절이는 것으로, 과정을 조금 바꾸어보았다. 절이면서 나온 배추의 단물을 양념하는데 섞을 수 있었고 소금도 절대적으로 아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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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하는 날 수육은 국룰이라지만 난 갓 지은 하얀 밥에 손으로 북북 찢은 김치면 충분하다.

혼자 사는 동갑내기 시누이와 친정 엄마께 한통씩 나누고 김치냉장고를 가득 채웠다.

작년에 처음으로 들깨터는 법을 엄마께 배우면서 다툰 적이 갑자기 떠올랐다. 엄마가 서서 들깨를 부으면 선풍기 바람에 쭉정이들은 날아가고 알곡들이 아래 바구니에 담기는 거였다. 내 눈에 그 쭉정이들이 알곡처럼 느껴져서 짜증을 섞어 소리쳤다.


-아니 엄마 이건 아니잖아. 저게 전부 못쓰는 쭉정이 맞나?

-아이고 야야 그라믄 니가 해라.


돈 주고 사먹던 들깨와 내가 땀 흘려 농사지은 들깨는 하늘과 땅차이였다. 마치 남의 자식과 내 자식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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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도 한 움큼 얻어온 것을 그늘진 곳에 여기저기 꾹꾹 심어두었는데 싹이 올라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길래 잊어버리고 있었다. 잡초들 사이에서 조금 다르게 생긴 이파리들이 쑥쑥 올라와서 혹시나 하는 생각에 지켜보았더니 생강이었다. 생육기간이 다른 것들에 비해 길었지만 심은 것에 비해 한 해 쓸만큼 양이 나와주었다. 껍질을 벗겨 생강청을 담고 편을 썰어 냉동실에도 쟁여두었다.



오래 전, 여러가지 채소며 생선들을 싣고 며칠에 한번씩 집앞을 지나는 트럭에서 계란이 왔어요~ 싱싱한 나물도 있어요~ 소리가 들리자 어머닌 내게 파를 한단 사오라셨던 적이 있다. 트럭이 지나갈새라 얼른 달려가 파 한단을 내밀었더니 어머니 웃음소리와 함께 내 등짝을 두꺼운 손바닥으로 내리치셨다.

-아이구 니는 풋마늘도 모리나?

풋마늘과 파도 구분 못하던 내가 이젠 배추농사까지 지어선 친정엄마와 시누이 김장까지 나누고 있으니 말이다.

아버님이 뇌졸중과 교모세포종으로 3년 투병 후 돌아가시고 딱 백일만에 어머닌 교통사고로 양팔을 잃으셨다. 왜 불행은 줄줄이 손을 잡고 오는 건지 정신 차릴 새도 없이 또다시 절망 앞에 서야했다. 일 년간 열 번이 넘는 전신마취 수술과 재활을 어머니와 함께 견디었다. 왼팔은 손목에서 절단을 했는데 예후가 좋지 않아 다시 한번 팔꿈치 아래서 절단을 했다. 오른쪽 팔은 피부이식과 여러번의 수술을 견디고도 인대가 전부 상하는 바람에 마네킹처럼 뻗뻗하게 굳어 숟가락 하나 잡을 수도 없었다. 상악과 하악은 모두 골절이 돼서 철사로 얽어맨 체 유동식만 마시며 지내야 했다. 봄에 사고가 나고 겨울을 지나 다음해 봄에야 퇴원을 해서 집으로 모셔올 수 있었다. 내 나이 서른하고도 아홉되던 해였다.

일년을 어머니 곁에서 수족처럼 살았더니 점점 더 아가처럼 되어가셨다. 식은 밥은 헌밥이라고 드시지도 않고 에어컨 바람은 뼈가 시리다며 부채질을 종일 시키고 여섯시 내고향에서 뭐가 어디에 좋다고 하면 다음날 꼭 모시고 가야했다. 대구에 3호선 지상철이 생긴 날도 무료로 시운전할 때 타야한다고 해서 한바퀴 돌았다.

너무나 큰 일을 겪은터라 어머니도 나머지 가족들도 그것들을 원망하거나 탓할 겨를이 없었다. 그저 세월이 가고 굳은살이 생길 때까지 견뎌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사고가 나고.. 또 얼마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가셨더랬다. 혼자 계실 엄마 생각을 하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여력이 없었다. 하루는 자정이 지난 시각에 엄마가 사는 아파트 앞을 지날 일이 있었다. 2층이라 불이 환하게 켜진 안방이 보여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주무시다 깬 목소리였다.

-엄마 잤구나. 왜 불을 켜 놓고 자?

-느그 아부지 가고 밤에 무서버서 불을 못끄겠다.


다음날 시누이에게 어머니를 부탁하고 친정으로 갔다. 벨을 눌러도 기척이 없어서 비번을 누르고 들어섰다.

벨소리가 묻힐만큼 티비소리가 컸고 엄만 침대 위에서 주무시고 계셨다. 안경 코에 하얀 두루마리 휴지를 접어 받혀놓고 틀니도 뺀체 영락없는 할머니처럼 누워계셨다. 깨울까하다가 조용히 나와서 집안을 둘러보았다.

냉장고엔 말리비틀어진 키위 몇알과 먹다남은 김치가 뚜껑도 없이 들어앉았다. 보온 43시간이라 벌겋게 켜진10인용 밥솥엔 누런밥이 여기저기 덜어먹은 흔적이 있었다.

그대로 집을 나왔다. 눈알이 뜨거워질만큼 눈물이 났다. 나를 낳아 키워주신 건 울엄만데 남의 엄마를 살뜰히 수발하고 산다는 게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근처 대형마트로 가서 3인용 작은 밥솥과 각종 1회용 물티슈, 행주, 키친타올 ..등 엄마의 일손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릴 수 있는 물건들과 과일들을 종류대로 사서 엄마집 거실에 밀어넣고 왔다.

수십만원 결제한 문자가 남편에게 갔을텐데 전화도 없었고 다음날도 물어오지 않았다.

아마도 그날 퉁퉁 부은 내 얼굴을 보고 물을 수도 없었을 거다.

그날 밤 난 잠이 오지 않았다. 왜 아무도 잘못한 사람이 없는데 나는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인지 깜깜한 주방 구석에 앉아 한없이 생각하다가 알았다.

내가 어머니랑 그리 살지 않았다면 울엄마에게도 살가운 딸이 되지 못했을 거라는 걸.

낳아 키운 건 분명 엄마지만 나를 사람 만든 건 어머니라는 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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