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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vemetender Jul 18. 2024

[영화 후기] 인사이드아웃 1, 2 몰아 본 후기

아동 청소년 심리상담사의 사적인 이야기

"우리는 장점에 대한 감탄이 아니라 약점에 대한 동정, 즉 인류 모든 구성원에게 공통으로 존재하고 

한때 나 자신의 것이었고 결국 나 자신의 것으로 되돌아오는 그 취약성을 동정하는 사랑으로 인도된다." 


-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알랭 드 보통



[출처] 네이버 영화 '인사이드아웃 2' 포토


이 이름을 기억의 저편에서 끄집어낸 것이 나의 기쁨이었으면 좋겠다. '꿈을 먹는 맥' 말이다. 아빠는 회식 때문에 늦고, 엄마는 동생들을 데리고 외출했던 늦여름의 밤. 그 창백한 형광등 아래서 혼자 그림 동화를 넘겼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 서늘한 바람. 빛바랜 청록색 싱크대와 송송 뚫린 방충망 너머로 들려오던 풀벌레 소리. 그 어리고 새파란 감각들 속에서 나의 기쁨도 슬픔도 두려움도 무럭무럭 자랐다. 



나는 가끔 허벅지 살에 붙어 끈적이던 얇은 장판 위에서 잠을 설쳤다. 잠에서 깨면 어두컴컴한 머리맡에서 '맥'의 얼굴을 찾았다. 표지에 그려진 '맥'의 주황색 눈동자와 눈맞춤을 하면 다시 잠에 들었다. 잠들 수 있었던 건 '맥'을 통해 내가 기뻐져서도, 혼자 남은 슬픔이 줄어서도 아니다, 두려움이 잠시 달래졌기 때문이다. 



[출처] 네이버 블로그 '순환에너지'


두려움, 또는 공포는 사람이 가지고 태어나는 여러 가지 핵심적인 정서들 중 생존이나 안전감과 관련된 것이다. 내면의 혼재하는 감정들 속에서 이 두려움을 해결해 가는 경험이나 방식들을 기반으로 초기 성격이 형성된다. 그리고 이 두려움의 크기라든지 깊이, 빈도는 생애 초기 보호자의 양육태도에 따라 달라진다. '안전기지'라는 말도 그렇게 지어진 것이다.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나를 안전하게 지켜줄 보호자의 존재를 더러 '안전기지'라 부른다.



든든한 안전기지가 있으므로 어린 라일리의 감정엔 두려움이나 공포감이 크지 않고, 단지 '소심' 정도의 캐릭터로 표현되었다. 내 해석이 틀릴지라도 그러한 디테일들이 난 참 좋았다. 커다란 두려움을 극복해 본 경험이 없는 라일리이기 때문에, 청소년기 새로운 환경에서 활개 치는 불안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설정도 참 좋았다. 무엇보다, 가정을 벗어나 새롭고 복잡한 환경 속에서 자신의 불안과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모난 점은 부끄러워도 하며 새로운 자아를 복합적으로 구축해 간다는 스토리텔링이 사랑스러웠다. 



심리학자는 아니나 그와 맞먹는 수준으로 내면을 통찰해 온 철학 박사 알랭 드 보통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저서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장점에 대한 감탄이 아니라 약점에 대한 동정, 즉 인류 모든 구성원에게 공통으로 존재하고 한때 나 자신의 것이었고 결국 나 자신의 것으로 되돌아오는 그 취약성을 동정하는 사랑으로 인도된다."라고. 



실제로 어린아이를 보면 이유 모를 측은함이 든다. 온화한 미소 하나라도 건네주고 싶고, 설령 그 아이가 만화 속 캐릭터일지라도 그의 혼란에 공감하며 안아주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도의적인 차원이기도 하겠지만, 그 아이에게서 한때 나에게 있었던 취약성을 발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취약성을 두려움, 불안, 외로움, 수치심, 나아가 비겁함, 찌질함과 같은 감정들로 놓고 알랭 드 보통의 말을 다시 본다. 언젠가 내가 버린 줄 알았던 그 취약성이 결국 여전히 내 것이었음을 알게 되고, 또한 역설적이게도 그 취약성을 보이는 대상에게 사랑을 느끼게 된다는 뜻이 된다. 



라일리와 나는 주어진 환경도, 외모도, 경험도, 성격도 다르지만, 내가 그녀의 이야기에 사랑스럽다 느낀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보편적인 취약성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라일리의 장기 기억 뒤에서 외롭게 놀고 있던 빙봉을 보며 문득 나도 기억의 저편에 내다 버렸던 '맥'을 떠올렸고, 대조적으로는 서늘하고 외로웠던 여름밤이 상기되기도 했으며, 불안에 잠식된 상황 속에서 타인의 반응을 살피며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는 그 혼란한 모습 또한 아주 낯설지 않았으니까. 



감정은 죽일 수 있는 부류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죽이거나, 버리거나, 외면하기보다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내가 '맥'과 함께 기억의 저편에 묻어둔 감정이 두려움이었을지, 외로움이었을지, 그것도 아니면 억울함이었을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다만 문득 떠올린 그 이름에 동반되는 감각이 공연히 서늘하기도 하고 섬짓하기도 해서 아무래도 두려움 같다. 그때 나는 무서웠구나. 내 기쁨과 슬픔과 분노, 불안과 무심함들이 날 위해 힘을 키워왔고 '맥'과 합심하여 두려움을 저 멀리 치워주었구나, 짐작할 뿐이다. 



불안했던 라일리가 또래 관계를 회복하고 패닉을 극복한 후 경기를 재개한다. 이때 햇살을 느끼고, 손 끝으로 나무 벤치의 감촉을 더듬고, 하키 채가 공을 탁, 탁 치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현재의 순간에 충실한 모습이 참 인상 깊었다. 마음 챙김 기반의 치료 기법을 노리고 연출한 장면인지는 모르겠지만 거의 완벽한 결말이라고 볼 수 있다. 처음에는 고작 청소년이 공황 상태에서 내면의 성찰만을 통해 새로운 자아를 구축하는 과정이 조금 낙관적이라고 느껴졌는데, 자아정체감을 형성하는 주체는 오로지 자기 자신밖에 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라면 그도 좋은 개연성 같다.



내가 원래 글을 오래 쓰면 즐거움을 느낀다. 물론 양과 질은 형편없지만 이 행위 자체를 통해 쉼을 느낀다. 기억의 저편에서 '맥'을 처음 끄집어낸 주체가 기쁨인지 슬픔일지 아니면 우연일지도 모르겠으나, 지금 글을 쓰며 '맥'을 대하고 있는 내 감정은 소소하나 기쁨에 가깝다. 이것은 내가 구축해 낸 자아의 일부이기도 하고 때로는 문제를 대처하는 방식이 되어주기도 한다. 라일리의 이야기를 통해 모두가 지난날을 떠올리며 행복해하고 위로를 받았다면 좋겠지만 어딘가 쓸쓸해진 관객들이 더 많았을 수도 있다. 나는 다시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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