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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이 Dec 26. 2021

일상속의 예술

야나기 무네요시와 이우환의 예술세계를 통해 알아본 일상에서의 아름다움이란

          이우환과 야나기 무네요시는 같은 시대의 사람은 아니지만 그 둘의 예술세계를 관통하는 주제가 있다. 불완전에서 오는 완전함의 미학이 그것이다. 완전함이라는 것은 더하기나 곱하기의 개념이 아니다. 아무리 더해나간다고 할 지라도 완전에는 도달 할 수 없다. 비워냄을 통해 더하기로는 도달할 수 없는 자연스러움에 도달하는 것이 최고의 아름다움이라 야나기는 그의 저서에서 수차례 강조하곤 한다. 이우환 역시 이런 비워냄에서 오는 아름다움을 논한다. 본 고에서는 일본의 미학사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야나기 무네요시와 한국을 대표하는 추상화가 및 설치예술가인 이우환의 예술관을 비교하여 살펴보는 것을 통해 일상생활에서의 아름다움을 찾는 법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야나기의 아름다움에 대한 관점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생각하는 미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그가 상찬하는 미란 게테모노(下手物, げてもの)의 미로서, 사전에서 게테모노의 미를 찾아보면 ➀보통의 물건 및 고가의 정교한 물건에 대하여, 일상 이용하는 대중적·향토적이어서 소박한 물품. ↔上手物(じょうてもの). ➁일반과 색다르다고 보여지는 것. 예)-趣味색다른 취미.(広辞苑 第六版 일한사전,어문학사, 2012, p.1125)로 나와 있다. 日本国 語大辞典第二版에 의하면, 게테모노(下手物げてもの)1.인공을 그다지 더하 지 않은 조잡한 싼 물건. 게테.↔죠테 죠테모노(上手物, じょうてもの).➁일반 으로부터 사도(邪道, 도리에 어긋나는 부정한 방법 또는 사악한 가르침, 정 식이 아닌 방법), 색다르다고 보이는 것. 기묘한 것.(日本国語大辞典第二版 小学館,2003, p.1402)으로 설명 되어 있다. 이 중 야나기가 의도한 게테모노의 의미는 일상 이용하는 대중적 향토적인 물건이라는 의미로서 이 게테모노의 미라는 개념은 야나기가 작성한 일본민예미술관설립취의서.( 水尾比呂志 ,日本民芸美術館設立趣意書,日本民族文化大系6柳宗悦,講談社, 1973, p.260)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그는 취의서 첫머리에서 ‘자연이 낳은 건강하고, 소박하고, 생생한미를 구한다면 민예의 셰계로 돌아와야 한다고 쓴 다음 아래와 같이 잇는다.


                   



                     “우리의 선택은 전적인 미를 목표로 한다. 그러므로 가장 생명이 충만하다고 믿는 것만을 수집한다. (중략) 이 미술관은 잡다한 작품의 취집이 아니라 새로 운 미의 표적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바이다. (중략) 대개 죠테(上手)라고 불리 는것은 섬약함으로 흐르고 기교에 빠져 병에 걸린다. 이에 반하여 이름 없는 공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게테(下手)에는 추한 것이 거의 없다”





                   “그[러스킨]는 항상 중세기의 찬미자였다. 그 시대에는 미가 가장 돈 독하게 실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그 시대의 작품을 미술 적이라고 봄으로서, 그는 그 시대가 순수공예의 시대였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그 세기에는 공예만이 있었지 미술은 없었다고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날 미술적인 작품이라고 간주되는 그 시대의 일체의 것은, 용(用) 에서 발생한 것으로서 미 때문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이 성질 이 작품을 그렇게까지 아름답게 했던 것이다.”

                                                                                                                            - 공예의 길, 1927년 10월,8p


 



                  “본질적이고 치명적인 원인은, 그[모리스]가 아름다운 공예의 미를 알 지 못했다고 하는 것에 귀착한다. 그 자신이 시도하고, 그가 타인에게도 권 했던 것은 공예가 아니라 미술이었다. 말하자면 미의식에 기인한 공예이다. 우리들이 탈각(脱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그것을, 그는 시도하려고 했던 것이다. ‘라파엘 전파’라고 칭하고 있으나, 아직 충분히 고딕에 귀의하지는 않고 있다. 이것은 그 파에 속하는 사람들이 주로 미술가여서, 공예가는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남은 그의 작품을 보면, 그가 공예의 본 질적인 미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이것이 그의 길드 가 실패한 주원인이다.”

                                                                                        

                                                                                        -  공예의 협단에 관한 한 제안, 1927년 2월, 55~56p.



          즉 야나기는 쓰임보다 꾸밈에 치중한 물건들이 일견 화려해 보이고 명품으로 보일 수는 있어도 용도에 맞게 만들어진 물건인 게테모노에서야 말로 자연스럽고, 그 자연스러움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더하기나 곱하기 빼기로는 완전한 완벽에 다다를 수 없다는 그의 완벽에 대한 정의에 입각한 주장이다. 타인으로부터도 그리고 자기자신으로부터 역시 자유로운 무아의 경지에 다다를때, 즉 자기자신마저 사라질때야 진정한 아름다움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빈의 경지를 내포하지 않는 한 아름다움은 절대성에 이를 수 없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미완성의 것이 완성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함축하는 성질을 지니는 것 역시 게테모노가 상찬의 대상이 되는 이유기도 하다..아름다움이란 보는 사람을 상상속으로 끌어들이는 성질을 지니게 되는데, 미완성 혹은 불완전성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게테모노의 경우 그 미완성 혹은 불완전한 점이 함축성을 제한하지 않기에 아름다움의 큰 요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게테모노의 미에 대한 야나기 무네요시의 관점은 후술할 이우환의 그림에 대한 관점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




          먼저, 그림이란 일찍이 마티스가 간파 했듯이 무엇을 그린다고 할 지라도 그림 일 수밖에 없다. 뛰어난 재능이 있는 화가가 대상을 그대로 정확하게 묘사해서 그린다면 어떨지 한번 상상을 해보자. 아무리 정교한 화가의 솜씨가 곁들여진다 할 지라도 묘사 대상이 놓여진 공간의 시간의 흐름과 공간 그 자체를 묘사할 수는 없다. 오히려 자세히 묘사 할 수록 묘사 대상의 본질에서 역설적 이게도 멀어지게 되는 것 이다. 즉, 그림이란 자연답게가 아니라 그림 답게 그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그림은 그림일 수 밖에 없기에 모든 것에 우선하여 그림이어야 한다. 그렇기에 화면은 사물의 표현이라기 보다는 화면 형성의 기호일 것이 더 중요하다. 마티스의 그림이 아름다운 이유는 회화의 의미의 벽을 추방해버리고 싱그러운 그림 앞에 자유롭게 서서 감상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묘사의 역설에서 벗어나 정확한 그림을 위해 여백의 미를 중시할 것을 촉구한다. 작가의 개입을 최소화 하고, 캔버스라는 정해진 틀 속에서 신체를 이용하여 반복 작업을 수행함으로서, 반복 속의 부정형태를 나타나게 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아이디어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면 아이디어 그 자체가 한계로서 작용하여 보는 것이 발견이나 감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 동의 혹은 비동의를 구하는 일이 되어버리지만, 신체란 메를로 퐁티가 간파했듯이 나에게만 귀속된 것이 아닌 외계와도 연결된 양의적인 것이기에 이에 유의 하여 신체적 행위를 되풀이 하는 외중에 아이디어의 변용 혹은 변질이 이루어 진다. 외부성이 끌여지는 몫만큼 명감이 흐려져 미지성이 나타남과 동시에 작품은 함축성을 지니고 암시적인 것이 되어간다. 반복속에서 자기자신을 비워나감으로서 무한과 닿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점은 새로운 점을 부르고 그리하여 선으로 이어간다. 모든것은 점과 선의 집합과 산란의 광경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점이며 산다는 것은 선이므로, 나또한 점이며 선이다. 삼라만상이 나의 재생산이 아닌 것처럼 내가 표현하는 점 또한 늘 새로운 생명체가 되리라”

                                                                                                                                                           -  이우환




                  “점에서 시작하여 점으로 돌아간다. 점의 이합집산이 삼라만상의 양상이고 그 반복이 우주의 무한을 가리킨다. 회화에 있어서 무한개념을 나타내는 것은, 그림새를 반복시키는 것이다. 태어나서는 사라지고 사라져서는 태어나는 생명현상 같은 반복성은 한순간 한순간을 일회성으로서 비연속으로 이어 가지 않으면 안된다. 일필일획이 독립되어 있으면서 연결되어가는 유기적 짜임새는 화면에 긴장감을 부여한다. (중략) 한정된 일필 일획은 점차 나로부터 해방되어 거기 있는 공간을 깊숙이 호흡하면서 더 큰 생명력을 획득 한 것으로 생각된다. 곧 무한이란 나의 아이디어나 일반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개념의 밖, 장의 무한정성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  이우환




          이렇게 비움에서 잉태되는 완벽함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것을 추구하는 점에서 이우환과 야나기는 교차점을 지닌다. 그렇다면, 일상속의 아름다움을 느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이우환과 야나기는 반복을 통한 선의 수행에서 아름다움을 찾으라 조언한다. 야나기는 형식의 아름다움을 강조한다. 하나의 목적을 완수하기 위해 행해지는 반복작업들은 불필요한 부분은 점점 탈락되어 필수적인 부분만 결정화 되어 남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을 거쳐 형식이 탄생하게 된다. 이 형식을 형식의 목적에 맞는 마음가짐을 갖추고 자유로이 행하는 것에서 오는 자유로움과 자연스러움에서 야나기는 아름다움을 찾았다. 이우환 역시 작가가 캔버스에 개입하는 부분을 철저하게 규정해놓고 그것을 인간의 내면과 외면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신체를 통해 반복수행 함으로서 본인의 예술세계를 이루었다 즉, 행위의 대상이 한 잔의 차를 내는 것인지, 그림을 그리는 것인지의 차이일뿐 아름다움의 수행이라는 점은 같은 것이다. 상기했듯이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인간이 의도할 수 없는 자연스러움에서

자연스래 나오는 것이기에 일상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서는 주변을 바로 보아 행위 혹은 물체의 본질을 보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바로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보기 위해서 야나기는 곧바로 보는 방법을 조언 하고 있다. 가격, 희귀함등의 위명에서 벗어나 물건 혹은 행위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에서부터 바로보기가 성립된다고 본것이다. 이우환 역시 그림을 감상하는 데에 비슷한 조언을 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세계란 자아를 넘어서서 존재하며 불투명하기에 세계를 대면하는 것은 곧 타자로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에게 있어 작품이란 자기자신을 최소한으로 한정시켜 최대한으로 세계와 관계를 맺는일이므로 작품의 소재 선택이라던가 구성 제작 행위를 최대한으로 한정하는 동시에 무규정한 소재를 그대로 쓰는 점 그로 인해 일견에는 까다로워 보이기쉽다. 작품 보다는 작품이 놓인 공간과 세계가 생생하게 살아주기를 바라는 바의 그의 방법이다.그렇기에 그는 작품이란 기호화된 텍스트가 아니라 주장하며, 작품보다는 작품이 놓임으로서 변화하는 공간의 생동감을 작품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이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논한다. 즉 위의 야나기의 말을 빌려서 말하자면, 무엇에 얽메이지 않고 본질을 곧바로 보는 것의 중요성을 얘기하는 것이다.


          이처럼 두 거장이 강조하는 반복을 통해 자기를 비움에서 오는 완전성 그리고 그에 따른 자유로움이 일으키는 아름다움과 바로보는 것을 통해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의식하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쉬이 가능 하다. 십수년간 김밥을 썰어온 아주머니의 손놀림에서 부터, 야나기가 아름다움의 결정체라 극찬한 차 문화, 숱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설계되고 사용자의 편의성을 위해 곡선 하나까지 신경 쓴 라이터등 우리의 일상속에는 수많은 아름다움이 내재되어있다. 야나기가 논하였듯이, 과거의 대명물이나 명물이 만들어지던 시절보다 기술과 교통이 훨씬 발전했으니 아직 발견되지 않은 아름다움은 숱할 것이며, 야나기가 그런 말을 남겼던 시대보다도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은 잠자고 있는 대명물이나 명물이 더욱 많을 것이다. 이제는 그 아름다움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는 우리몫이 남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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