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린 일기 0.

밀린 일기를 써보려는 ‘나‘는 누구인가

by Ellen Yang


이제 정말 에누리 없는 마흔을 맞이했다.




사실 서른 이후부터 누군가가 내 나이를 물어보면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내 나이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에는 같은 나이또래의 친구들이 내 주변을 장악하고 있었다면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는 너무나 다양한 나이대의 주변인이 많아진 탓에 내 나이가 헷갈리기 시작했을 수도 있다마는,

그보다는 내가 서른이라는 나이를 만나게 될 줄, 어릴 때의 막연한 기대와 상상처럼 특별히 뭐 하나 성취해 낸 것 없이 그렇게나 빨리 서른이라는 나이에 도달하게 될 줄 몰랐던 탓이 더 큰 것 같다.

현실을 부정하듯, 난 그렇게 내 나이를 헷갈려하기 시작했고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단순 명료한 '넌 몇 살이야?'에 답변하기 위해 꽤나 애를 써서 셈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서른 언저리에서 나이라는 숫자를 헷갈려하던 차에도 시간은 하릴없이 흐르고 흘러

작년 10월부로는 또다시 앞자리가 바뀌게 되었다.(오. 마이. 갓!)




좀처럼 멈추지 않는 시간을 따라 쉼 없이 흘러온 나의 인생.

그간의 나는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사람이 되어있는지 간단히 몇 줄의 글로 소개해보자면,


· 보통의 가정에서 초중고 학창 시절을 보냈고

· 선생님을 꿈꾸었으나 사범대를 가지 못한 채 수능 선택과목과 성적에 맞춰 인서울 대학교에 입학했으며

· 이것저것 호기심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 시작할 때의 동력이 끝까지 가지 못하는 성격 탓으로

· 흐지부지 마무리하지 못한 일들이 부지기수였던 대학생활을 마쳤고

· 대학원을 준비하며 어쩌다가 시작한 첫 직장, 대학교 행정실의 업무가 현재까지 이어져서

· 인서울 대학교에서 행정업무를 하고 있는 15년 차 직장인이다.

(생각해 보니, 선생님을 꿈꾸던 나는, 결국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들으며 일을 하고 있구나.)

· 그리고 직장생활 초기에 대학교 동아리 선배를 통해서 만났던 소개팅남과 2년 넘는 연애를 했고

· 이제는 서로에게 영혼의 단짝이 되어 12년째 좌충우돌 결혼생활을 이어가고 있다.(헉.. 벌써…?)




지금 돌이켜보면 내 삶이 평범했나 싶지만,

내 삶이 그 누구와도 같을 수 없기에 매 순간순간에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이라는 감정이 제각각의 비율로 뒤섞여 들어가 매일매일 단 하루도 지난 과거와 똑같지 않은 특별한 시간으로 채워진 것 같다.

그런데 문득 이 특별했던 인생의 순간순간들이 품고 있던, 그 당시에 강렬하게 뿜어내던 감정의 농도가 옅어지며 평범함이라는 장막을 쓴 채 기억의 뒤편으로 넘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아, 일기를 써야겠구나.

잊기 아까운 기억들을 남겨야 할, 한참이나 밀렸지만 일기를 써야 할 이유가 생긴 것이다.




어린이 시절의 나에게 일기 쓰기란 방학숙제 중에 해결해야 하는 최고의 난제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 당시 일기장에는 날씨를 적는 칸이 있었는지 아직도 의문이다.

매 방학마다 방학숙제 목록을 받아 든 순간에는 '일기장에 날씨라도 매일 적어놔야지!'라고 다짐에 다짐을 거듭하곤 했지만 단 한 번도 실행에 옮긴 적은 없었던 나는, 낭떠러지(방학 마지막날)에 도달할 즈음이면 초인적인 힘과 기억력, 순발력을 내뿜으며 근 한 달여간의 밀린 일기를 기어코 뚝딱 해내고 말았다.

(참고로, 지나가고 기억에서 지워진 날들의 날씨 친구들 일기의 날씨를 베끼거나 왠지 과거의 그날은 그랬을 것 같은 내 마음의 날씨를 기록하기도 했다.)




학창 시절에는 학교가 일기를 강제했다면, 이제는 내가 나에게 일기라는 숙제를 주려 한다.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시간의 제약을 두지 않을 거란 거다.

지난 40년은 물론, 앞으로도 계속 나를 거쳐 지나갈 과거를 돌아보면서 너무나 특별했거나 또는 그 무엇보다 평범했었던 기억들을 잡아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글로 남겨보겠다고 다짐해 본다.


자, 이제 시작해 볼까.




2025.08.01.

Ellen Y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