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린 일기 63.

화재경보기

by Ellen Yang


작년 5월. 우리 부부는 F1 그랑프리를 보겠다는 일념으로 모나코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왜 하필 그 많은 F1 그랑프리 중 모나코를 택했을까. 제일 큰 이유는 내가 연중 가장 긴 휴가를 낼 수 있는 시기가 그때뿐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5월의 F1그랑프리는 모나코에서만 있었다. 미친 물가로 여행자들에게 악명 높은 모나코, 이 여행이 우리의 통장을 텅장으로 이끌까 봐 불안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지였다.


F1 경기가 있는 시즌은 모나코의 극성수기여서 호텔방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이다. 특히나 우리가 갔던 시기에 저렴한 호텔이란, 그 물가 높기로 스위스 버금가게 악명 높은 모나코에서의 저렴한 호텔 찾기란 미션임파서블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환불불가로 예약하는 게 조금이나마 저렴했던 탓에 큰 맘먹고 (가지 않으면 그대로 숙박비를 날려버릴 수 있는 위험을 안고는) 하루에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럭셔리 호텔의 예약버튼을 누름으로써 우리의 여행은 달력에 쾅쾅 각인이 되었다.




모나코는 프랑스 남부도시인 니스와 지척에 있다. 차로 1시간 좀 넘게 이동하면 작지만 부내가 폴폴 나는 모나코의 도심으로 갈 수 있고 워낙 이 두 곳의 교통편이 잘 이어져 있기 때문에 모나코 그랑프리를 보러 오시는 분들이 니스에 숙소를 잡고 이동하는 경우가 많다는 정보를 고급(?) 정보를 입수했다.

어차피 모나코로의 직항 비행 편은 없었기 때문에 우리의 일정에도 여느 관광객들처럼 프랑스 남부도시 여행이 더해졌다. (사실 이 여행경로는 F1 그랑프리 관람보다 우리 부부에게 더 큰 낭만과 여유, 설렘을 주었다는 사실.)


일단 3일은 아름다운 프랑스 니스의 해변이 바로 눈앞에 펼쳐지는 멋진 오션뷰 호텔룸에서 바다를 만끽하고, (사실 니스보단 좀 감흥이 덜했지만) 운 좋게 모나코에서도 해변이 창밖을 수놓았던 높은 층의 룸을 받아서 체크인을 할 수 있었다.


프랑스 니스와 생 폴드방스, 그리고 모나코 도심과 F1 그랑프리 관람, 아주 잠깐의 이탈리아 해안가 맛보기투어로 바쁘게 돌아갔던 여행의 종지부를 찍던 날. 우리는 모나코의 호텔방에서, 호텔 창밖으로 보이는 모나코의 해안선, 선착장의 보트들을 바라보며 한국에서 챙겨간 마지막 컵라면을 뜯었다. 언젠가는 프랑스부터 모나코, 이탈리아의 남부까지 자동차여행을 해보면 좋겠다는 미래의 계획을 살포시 나누면서 라면에 햇반으로 마지막날 저녁식사를 야무지게 마친 우리는 다음날 귀국일정을 되새기며 잠을 청했다.




선잠이 살짝 들었을 무렵,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고막에 내리 꽂혔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오빠, 오빠... 이게 무슨 소리지...?"

"응..? 무슨 소리?"

엇, 꿈이었나... 라며 뒤척이는데 아까보다 더 세찬 사이렌 소리가 온 호텔에 울려 퍼졌다.


고막이 찢어질 듯 쉴 틈 없이 울려대는 사이렌 소리는 호텔의 화재경보기였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자 내 심장은 미친 듯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나 이렇게 아무 연고도 없는 낯선 타지에서 화재 사고를 당하는 건가? 에이... 설마 아니겠지?'


벌떡 일어나서 호텔문을 열었다. 하필 우리가 묵던 층에 숙박객이 많지 않은 건지, 아니면 아직 이른 밤이라 다들 놀러 나가서 방에 없는 건지 우리 쪽 복도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혹시나 해서 문에 신발을 끼워두고 좀 더 바깥으로 나오니 몇몇 방들의 문틈으로 나같이 놀란 이들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는 게 보였다. 국적이 달라 말이 통하지 않는대도 서로의 눈을 통해 이 상황에 모두 당혹스러움을 느끼고 있음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잠깐의 눈치게임을 깨트리며 어떤 부부가 방문을 열고 나와 비상계단으로 후다닥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 모습을 본 다른 방 투숙객들도 모두 비상계단으로 빠르게 이동을 시작했다. 난 재빨리 우리 방으로 가서 짝꿍을 흔들어 깨워서는 (아니 이런 상황에 잠을 자고 있는 거...?!!!) 급하게 비상계단으로 그의 손을 잡고 뛰어갔다. 우리가 묵은 층은 6층. 내려가는데 층마다 점점 사람들의 수가 늘어갔고 1층엔 제법 많은 이들이 이미 대피를 내려온 상태였다. 우리처럼 파자마 차림에 슬리퍼만 끌고 나온 이들, 이 와중에 가방을 챙겨 내려온 이들도 있었다. (순간, 여권이라도 챙겨 나올걸이라는 후회가 몰려왔다.) 마치 영화 '인턴'의 한 장면처럼 말이다.




그날의 요란했던 화재경보기는, 정말 다행히도 호텔 키친에서 조리 중에 수증기가 다량으로 발생하는 바람에 발생했던 시끄러운 해프닝이었음이 밝혀졌고 상황은 곧 마무리되었다.


다시 방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에 가운에 잠옷바람으로 민망함이 잔뜩 묻어있는 얼굴들이 옹기종기 모여 서로를 바라보다가 갑작스레 웃음이 터졌다. 누군가로부터 시작된, 다행히 큰 사고가 아닌 경보기 오작동의 해프닝이었다는 안도감이 더해진 이 웃음은 금세 엘리베이터에 퍼져나갔고, 처음 보는 낯선 이들은 서로에게 미소가 한가득 담긴 굿나잇을 전하며 헤어졌다.




다행히 무탈하게 마무리되었지만 그날의 잊지 못할 추억으로 여행을 가면 여권과 지갑이 든 가방은 최대한 나와 가까이, 아니면 방문 근처 테이블에 두는 버릇이 생겼다. 혹시 모를 상황에 다 놓고 가도 여권과 지갑은 챙겨나갈 수 있게 말이다.


인생에서 역대급으로 비싸게 예약했던 호텔은, 그간 어디에서도 경험해보지 못한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며 이렇게 인생에 또 하나의 큰 깨달음과 배울 거리를 남겨주었다.


그래서, 두 번째 프랑스 남부여행은 언제 가지?




2025.10.10.

Ellen Y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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