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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 Nov 03. 2018

보수가 담대해져야 하는 시대

담대함은 더 이상 진보의 전유물이 아니다

태극기가 어느 순간부터 굉장히 부정적인 이미지로 바뀌었다. 적어도 태극기를 본다면 나라에 대한 자부심이나 호국 정신으로 나라를 지켜낸 조상에 대한 감사까지는 아니더라도 긍정적인 감정을 느꺼야하는데, 지금은 통칭 '태극기 부대'라고 불리는 집단이 떠오르고 태극기가 걸린 택시는 타기 전에 조심스러워진다. 태극기를 이용하여 국가주의를 보수주의와 결합시켜 정치적 마케팅을 시도한 건 누구의 발상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태극기에 대한 이미지 실추에는 아주 지대한 공헌을 했다. 뿐만 아니라 이는 현재 자칭 '보수정당'으로부터 국민들이 등을 돌리게끔 하는 촉진제 역할까지 했다. 보수인사 측에서 이를 선의를 가지고 시행한 것이라면 내부에서 징계를 받아 마땅하며, 진보인사가 이를 추진했다면 그는 훌륭한 책략가임에 틀림없다.

현재 태극기를 보고 순간적으로 드는 생각과 느낌은 무엇인가?

보수를 지탱하는 가치는 '도덕성', 그러나...

진보가 갖춰야 할 가지는 자유, 관용, 합리 등이 있겠지만 이러한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용맹하게 현 체재를 뒤흔들 수 있는 용기, 즉 담대함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보수가 담대함을 외쳐야 하는 시대가 돼버렸다. 보수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도덕성인데 자칭 보수라 일컫는 정당과 정치인들 덕택에 보수는 스스로의 정당성을 상실했다. 게다가 이명박근혜 정권의 부패로 인해 보수주의자들은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지키려면 수치를 감내해야 하는 상황에 까지 이르렀다. 국가를 마치 사적 기업인양 운영한 이명박 전 대통령과 무탄히 임기를 마치기는 고사하고 헌정 사상 최초로 탄핵 선고를 받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치부로 보수는 부도덕과 무능의 아이콘이 되었다. 전직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고 필수 코스로 재판을 거쳐가는 모습은 씁쓸함을 남긴다.

‘이명박 전 대통령 1심, 징역 15년, 벌금 130억 원 선고’, ‘박근혜 전 대통령 2심, 25년, 벌금 200억 원 선고’

정치인의 부패는 예전부터 있어왔고 지금도 있다. 그리고 미래에도 감히 없어질 거라 단언할 수 없다. 결국 그 놈이 그 놈이라는 생각에 사람들은 도덕성을 2순위로 미루고 경제 잘 살리는 대통령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이명박을 17대 대통령으로 뽑았다. BBK 주가조작 사건으로 인한 여론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전 대통령이 당선된 배경에는 그러한 국민들의 심리가 반영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임기 당시 세계 대공황으로 인한 글로벌 경기침체는 대한민국 역시 비켜갈 수 없었다. 경제문제는 대통령이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간단히 개선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이를 대통령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가혹한 처사이다. 그러나 그는 당선된 시점부터 이미 보수의 핵심인 도덕성을 상실한 대통령이었고, 동시에 이명박 정부는 이념이 없는 정부였다. 이념이 없다 보니 두터운 지지층이 없고, 처음 검찰 조사를 받으러 가던 3월 14일 날 아침, 그는 쓸쓸히 검찰청을 향했다. 그래서 이명박 정부를 '영혼이 없는 정부'라 부르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 프로젝트'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니지만, 이명박 전 대통령의 청렴함을 담보하기는 더 더욱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출처: YTN)

그렇다면 박근혜 정부는 이념을 가지고 있었느냐? 절대 그렇지 않다. 증세 없는 복지를 외친 박근혜 정부의 대선 당시의 정책을 보면 타 진보정당 보다도 더욱 급진적이었다. 제18대 대선에서 새누리당과 박근혜 대통령이 발표한 경제와 노동 관련 정책은 훌륭했다. 반값등록금, 재벌 개혁, 노동자와 소상공인 및 중소기업을 살리는

경제민주화 같은 보수 정당이 주장하기엔 파격적인 내용들이 대다수였다. 다만 그 공약을 어떻게 이행할 것인지에 대한 세부적인 계획안이나 예산 등이 명확히 명시되지 않았을 뿐, 큰 제목과 중간 제목으로 등장한 박근혜 대통령의 노동과 경제, 그리고 서민을 바라보는 관점은 틀리지 않았다. 당시 4.13 총선에서 故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는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이 너무 훌륭해 자신은 별도의 공약 책을 만들지 않고,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공약을 자신이 지켜주겠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결국 마른 수건 짜듯 세입 확충 방안 없이 정책을 시행하려다 보니 재정정책의 한계가 드러났다. 어정쩡한 정책으로 빚은 빚대로 늘고 효과는 미미했다.

'2016년 회계연도 국가결산' 보고서에 따르면, 박근혜 정부 4년 동안 늘어난 국가채무는 184조원에 이른다. (출처: 한겨레)

이러한 진보적인 정책에도 불구하고 그럼 보수 정치인으로서 출마한 박근혜를 어떻게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인가? 이는 그녀의 아버지인 박정희 대통령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새마을운동이나 산림녹화 같은 정책들은 진보주의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보수주의자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들이 그를 추대하는 이유는 '번영을 향한 경제설계'라는 슬로건을 통한 부국강병이라는 목표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박근혜는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후광과 유신시대의 향수를 안고 아버지를 흉내 내려 했으나 역량이 부족하여 금치산자 수준의 성과를 보여주고 탄핵당하였다. 결국 현재의 지지층도 유신 정권의 산물일 뿐이고 그녀 스스로 일구어 낸 것은 아무것도 없다. 포퓰리즘을 보수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보수정당과 함께 스스로 몰락하였을 뿐이다.


자칭 보수정당인 자유한국당의 삽질

필자는 과거 새누리당의 전신인 자유한국당을 딱히 보수주의 정당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한국 정치지형에서 이 정당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작지 않기 때문에 언급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보수가 갖추어야 할 자유주의의 가치, 민주주의의 가치, 그리고 공화주의의 가치를 침해했기 때문에 이들은 범보수로부터 외면당한 것이다. 본인들도 현재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나름대로 방법을 강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국민들은 전혀 진정성을 느낄 수 없는 짓거리만 해대고 있으니 일부러 저러나 싶기도 하다. 한 예로, 지난 10월 26일에 열린 '문재인 퇴진과 국가수호를 위한 320인 지식인 선언'에 준비위원회로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김진태 자유한국당 의원, 심재철 전 국회부의장 등 13명으로 구성됐다. 필자는 당최 이 320명의 보수 지식인들은 무얼 하시는 분들인지 궁금해서 조회를 해보려고 하니 132명의 이름만 공개하고 나머지 188명은 보안상의 이유로 공개를 하지 못한다고 한다. 태극기 집회에 계시던 분들이 몇몇 보이는 것 같지만 내 기분 탓이겠지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과연 자유한국당은 이 기자회견에서 무엇을 어필하고 싶었던 걸까?

문재인 퇴진과 국가수호를 위한 320인 지식인선언 (80년대도 아니고 문구랑 날짜가 심히 괴리감이 들지만 넘어가도록 하자)

그나마 진정성이 나타나는 인사 조치는 2018년 7월 16일 원조 친노로 불리던 김병준 국민대학교 명예교수를 혁신비상대책위원장(비대위)으로 임명하여 파격적인 내부 혁신 의사를 나타냈지만 정말 놀랍도록 큰 변화가 없었다. 약 3개월 뒤 대표 보수 논객인 전원책 변호사를 조직강화특별위원회(조강특위) 위부위원으로 임명하였으나 워낙 강경한 사람에게 칼자루가 주어지니 당내에서 전 변호사 영입에 대한 찬반으로 오히려 혼란만 가중되었다. 김병준 비대위원장은 당내 화합을 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려는데 전원책 변호사가 영입하여 인적 쇄신을 강하게 외치며 어수선한 가운데, 또 내부에서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 대한 이슈로 비박이니 친박이니 삿대질을 하며 김병준 비대위원장은 여기에 난색을 표한다. 단언컨대, 인사조치를 제삼자에게 전가를 하든 말든 당내 의원들이 기득권을 놓지 않는다면 그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김병준 자유한국당 혁신비상대책위원장(좌), 전원책 조직강화특별위원회 위부위원(우) (출처: 뉴스티앤티)

합리적 보수와 극중주의의 하모니

그 와중에 대한민국에서 보수가 자리를 잡는데 제 역할을 못하는 당이 있으니 합리적 보수를 외치던 '바른정당'과 극중주의를 표방하던 '국민의당'이 서로 합쳐 만들어진 '바른미래당'이다. 이 열세의 두 정당은 현실적인 문제를 극복하지 못해 합당이라는 선택을 했다. 다만 이데올로기가 다른 두 정당이 하나로 합쳐졌으니 이건 말 그대로 잡탕이다. 이념이 모호한 정당은 필연적으로 무너지게 되어있다. 여전히 합리적인 보수를 표어로 걸고 국회에서 캐스팅보드 역할을 하겠다고 하지만 여전히 바른미래당은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뚜렷한 지지층이 없다. 합당하기 이전이었다면 선명하진 않더라도 각 당이 가지고 있던 이념으로 지지층을 확보할 수 있었겠지만, 결국 그 보릿고개를 극복하지 못하고 합당을 선택해 그 누구에게도 지지받지 못하는 정당이 되어 버렸다.

2018년 10월 29일 바른미래당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한 김관영 바른미래당 원내대표 (출처: 데일리안)

그나마 위안인 것은 합당을 통해 극중주의라는 표어를 채택하지 않은 점이라 할 수 있겠다. 어느 순간부터 극중주의니 협치니 하는 단어가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정말 듣기에만 좋은 소리일 뿐 독이든 성배와 같은 단어들이다. '중도'나 '중립'은 언뜻 합리적으로 들릴 수 있겠으나, 동시에 대중에 편승을 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결국 이는 국민에 기호를 따라가는 포퓰리즘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국민의 80%가 찬성하는 정책은 결코 좋은 정책이 아니며, 개인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정책이 남발되면 결국에 국가는 몰락한다. 그리고 현 정부는 사전에도 없는 '협치'라는 단어를 만들어서 남발하는데 이도 적절치 못하다. 협치라는 게 좋게 말하면 타협이지만,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결국 보수와 진보 간의 정책적 어젠다에 대한 장벽을 허문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대통령제인 우리나라에서 국회와 청와대가 유착할 가능성을 여는 셈이다. 제대로 된 비판과 견제가 담보될 때, 대통령제는 그 기능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각 정당이 입법을 함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조율은 하되 이념의 장벽을 허물어서는 안 된다.

공영방송에서 조차 '협치'라는 단어를 쓰니 답답할 따름이다. (출처: KBS뉴스)

대한민국 보수의 미래

솔직히 말해서 전망이 어둡다. 문자 그대로 앞이 보이질 않는다. 우선 가장 큰 문제는 인물이 없다는 것이다. 여태껏 보수정당은 인물이 아닌 조직으로 지지기반을 확보해 왔다. 그러나 진보는 인물로서 승기를 잡아왔고, 각 인물이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상대적으로 적다. 하지만 보수는 밀고 가야 할 조직 자체가 썩어 문 드러 졌고, 실패를 담대히 짊어질 인물이 없어 대안이 없다. 언급되고 있는 인물들도 보면 황교안 전 국무총리, 오세훈 전 서울시장, 원희룡 제주도지사 등인데 적어도 필자가 보기에는 영양가 있는 선택지는 아닌 것 같다.

자유한국당, 범보수적 인물 영입을 공표하는 김성태 원내대표 (출처: MBC)

탄핵 정국 이후 약 2년 동안 자유한국당의 행보를 원치 않게 보긴 했지만,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는 이상 이들에게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은 분명히 알았다. 범보수를 수용할 수 있는 빅 텐트를 치겠다는 자유한국당은 텐트 치는 방법은 아는데 텐트 기둥이 글러서 아무도 들어가지 않을 것이고, 바른미래당은 재료는 있긴 한데 텐트를 어떻게 치는 지를 모르는 것 같다. 이 참에 대한민국 보수는 개념을 싹 다 갈아치워 새로 태어나는 편이 한시적으로 정치 지형이 왼쪽으로 기울어질 수 있으나 국가의 지속성을 고려할 때는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수순임에 틀림없다. 근본부터 잘못된 대한민국 보수가 새로 정립되어 좌우가 균형이 맞아 좀 더 나은 국가를 만들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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